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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벽-이능간 (李凌幹, ?∼1357)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남원(南原). 충선왕이 충숙왕에게 선위하고 원나라에 있을 때 반전별감(盤纏別監)으로 왕을 모시고 있었는데, 그 때 함께 일을 맡은 자들은 모두 치부하였으나 홀로 청고한 생활을 하였다. 또 충선왕이 티베트〔吐蕃〕에 귀양을 가게 되자 역졸을 시켜 금을 바쳐 왕과 호종신(扈從臣)의 옹색을 면하게 하였다. 1325년(충숙왕 12) 밀직부사로 충선왕의 재궁(梓宮 : 유해를 모신 관)을 모시고 귀국하였다. 그 이듬해 원나라가 고려에 성(省)을 두려 하자 지밀직사사(知密直司事)로 김이(金怡)·전영보(全英甫) 등과 함께 원제(元帝)에게 주청하여 중지하게 함으로써 1등 공신에 책록되었다. 1328년 감찰대부(監察大夫)로 있을 때 원에 가서 문종의 즉위와 개원(開元)을 축하하고 돌아왔다. 1330년 충혜왕이 즉위하자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었고, 이어 사신으로 원에 다녀왔으며, 1341년(충혜왕 복위 2) 정승에 올랐다. 그 이듬해 정승으로 성절사(聖節使)가 되어 원나라에 다녀왔으며, 이해에 조적(曺使)의 난 때 충혜왕을 시종한 공으로 다시 1등 공신에 책록되고 철권(鐵券)이 하사되었다. 1348년(충목왕 4) 영천부원군(寧川府院君)에 봉해졌다.1351년 공민왕이 즉위하자 또 영천부원군에 봉해지고 좌정승 영도첨의사(左政丞領都僉議事)에 올랐으며, 문하시중으로 치사(致仕)하였다. 충선왕과 가까이 지냈기 때문에 일찍이 왕의 총희(寵姬)를 백문거(白文擧)와 함께 한 사람씩 물려받았으나 별실에 두고 한 번도 가까이하지 않았으므로 왕이 의롭게 여겼다 한다. 2)정염(丁焰, 1524∼1609)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창원(昌原). 자는 군회(君晦), 호는 만헌(晩軒). 아버지는 종석(終碩)이며, 어머니는 영광주씨(靈光周氏)로 만귀(萬貴)의 딸이다. 7세에 여숙(閭塾)에 입학하여 학문을 닦다가 23세 때 정황(丁熿)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1549년(명종 4) 진사시에 합격하고, 그해 정황의 배소인 거제도로 찾아가 학문을 강마하였다. 1560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교서관에 들어갔고, 1567년 사헌부감찰에 임명되었으며, 형조좌랑을 거쳐 1569년(선조 2) 능성현령이 되었다. 그 뒤 춘추관기주관·예조정랑 등을 역임하고, 1580년 영광군수가 되었다. 그때 임씨(林氏)와 나씨(羅氏) 사이에 소송사건이 있었는데, 명석한 재판을 진행하여 왕으로부터 칭찬을 받았다. 1582년 성균관직강이 되었다가 안성군수를 역임한 뒤 1584년 광주목사(光州牧使), 1588년 고부군수를 지냈다. 그 뒤 정여립(鄭汝立)의 모반사건을 평난한 공로로 1590년 통정대부(通政大夫)의 가자(加資)를 받고 원종공신(原從功臣) 1등에 녹선되었다. 만년에는 후진교육에 힘썼고, 1603년 80세로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승자(陞資)되었다. 저서로는 ≪만헌집≫ 4권 2책이 있다. 3)김복흥(金復興, 1546∼1604)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순천(順天). 자는 경언(景言), 호는 계곡(谿谷). 남원 출생. 아버지는 부사정(副司正) 익창(益彰)이며, 어머니는 합천송씨로 참봉 세영(世英)의 딸이다. 정염(丁焰)의 문인으로서 문장이 뛰어나 14세 때 도시(道試)에서 장원하였다. 1570년(선조 3)에 생원·진사시에 합격, 별제·직장의 벼슬을 거쳐 의금부도사를 역임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군량미를 조달하였으며, 명나라 장수 여응종(呂應鍾)과 함께 군사기밀을 의논하는 등 왜적과 싸웠다. 관직에서 물러나서는 학문과 후진양성에 전념하면서 당시 명성이 높았던 이대유(李大甹)·최상중(崔尙重)·양사형(楊士衡)·조찬한(趙纘韓) 등과 교유하였다. 남원의 현주서원(玄洲書院)에 봉향되었다. 저서로는 ≪계곡유고≫ 5권 1책이 있다. 4)변유(邊瑜) 자는 여헌(汝獻)이고, 호는 정묵재(靜黙齋)이며, 본관은 장연(長淵)이다. 그의 생졸년대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는 도탄 변사정의 증손으로 1606년(선조 39) 남원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총명하였고, 효우가 뛰어났으며, 학문이 훌륭하였다. 5)정견(丁涀) 자는 여활(汝活)이고, 호는 육졸(六拙)이며, 본관은 창원이다. 그의 생졸년대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는 만헌 정염의 증손으로 지금의 장수군 산서면 월곡리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사리(事理)와 판별력(判別力)이 분명하였으며, 성리철학에 밝았다. 그는 평생을 분수에 맞게 살았는데, 집이 가난하여 비가 새기도 하였으나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