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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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주암서원(舟巖書院)
   전라북도 임실군 지사면 방계리 713-1
   최덕지(崔德之) 최연손(崔連孫) 장 급(張 伋) 장경세(張經世)
   1654년(효종 5)
   
   3월 중정(中丁 : 두번째 丁日)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21호(1984.04.01지정)
주암서원은 1654년(효종 5)에 창건되고, 최덕지(崔德之)를 주벽으로 최연손(崔連孫)을 배향하였다. 그 뒤 1787년(정조 11) 장급(張伋), 장경세(張經世)를 추배하였다. 1871년 대원군의 전국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59년 후손들에 의해 복설되었다.

1)주벽-최덕지(崔德之, 1384∼1455)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가구(可久). 호는 연촌(烟村)·존양(存養). 용봉(龍鳳)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을인(乙仁)이고, 아버지는 참의 담(霮)이며, 어머니는 박인부(朴仁夫)의 딸이다.
1405년(태종 5)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士)로 급제한 뒤 추천을 받아 사관이 되었고, 1409년 교서관정자로서 환구단(圜丘壇)에서 기우제를 지낼 때 오제제문(五帝祭文)을 준비 못하여 한때 투옥되었다. 뒤에 감찰 등 삼사(三司)의 청요직(淸要職)을 거쳐, 외관으로 김제군수·남원부사 등 여러 주·군을 다스렸다. 남원부사를 사퇴한 뒤 영암의 영보촌(永保村)에 내려가 학문연구에 몰두하였는데 이때 존양이라는 호를 사용하였다. 문종이 즉위하자 그를 불러 예문관직제학에 임명, 그의 학문을 높이 평가하였으나 그는 아직 치사할 나이가 안 되었는데도 연로함을 이유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당시 풍습으로 볼 때 명예로운 직책을 사임하고 귀향하는 경우가 드물었으므로 동료들은 그의 높은 덕과 행동을 칭송하며, 다투어 시부를 지어주고 노자를 마련하여 주었다. 72세에 죽으니 영암의 주민들이 사당을 세워 제사하고 존양사(存養祠)라 이름 지었다.
그는 세종 때 배출된 많은 학자 중 한 사람으로 정치적 격동에 휘말려들지 않고 문신이자 학자로서 명예로운 삶을 마쳤다. 전주의 서산사(西山祠), 남원의 주암서원(舟巖書院), 영암의 녹동서원(鹿洞書院) 등에 제향 되었다. 시호는 문숙(文肅)이다.
 
2)최연손(崔連孫)
자는 자윤(子胤)이고 호는 암계(巖溪)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그는 덕지의 증손이다. 그는 벼슬이 이조참판에 이르렀다.
 
3)장급(張伋)
호는 율계(栗溪)이고 본관은 흥덕(興德)이다. 그는 남주(南州)의 삼호(三豪) 가운데 한 사람이다.
 
4)장경세(張經世, 1547∼1615)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흥성(興城, 興德). 자는 겸선(兼善). 호는 사촌(沙村). 남원 출생. 아버지는 정랑 장건(張健)이며, 어머니는 양공건(楊公健)의 딸이다. 종부(從父)인 급(伋)에게 입양되었다.
재질이 총명하여 5, 6세에 벌써 글을 해독할 줄 알았다. 주로 가학(家學)을 전해 받은 그는 경사백가(經史百家)에 두루 통하고, 당송팔가(唐宋八家)의 맥을 이었으며, 따라서 성리학에도 조예가 깊어 일가를 이루었다.
사우관계로는 당시 덕행이나 문명으로 드날렸던 노진(盧禛)을 비롯하여 김복흥(金復興)·양사형(楊士衡)·최상중(崔尙重) 등을 들 수 있다. 1585년(선조 18) 생원이 되고, 1589년 43세로서 증광문과(增廣文科)에 병과로 급제한 뒤, 교서관저작을 거쳐 1593년 공주제독관으로 있다가 얼마 뒤에 승문원박사로 옮겼다.
이어 공조·예조의 좌랑을 거쳐 전라도도사로 나갔으며, 1602년에는 노모를 모시기 위하여 금구현령을 자청해 나갔다가 그 이듬해에 실정으로 인하여 그만두었다. 이후로 벼슬을 단념하고 시문을 즐기며 여생을 보냈다. 작품으로 <정부사 征婦詞>·<상사곡 相思曲> 등을 남겨 후세에 문명을 떨치기도 하였다.
특히, 광해군 때 지은 <유선사 遊仙詞>나 이황(李滉)의 <도산육곡 陶山六曲>을 모방하여 국한문으로 쓴 <강호연군가 江湖戀君歌>는 그의 우국애군(憂國愛君)의 충정과 존주척륙(尊朱斥陸)의 사상을 살필 수 있는 작품이다. 남원의 주암서원(舟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는 ≪사촌집≫이 전한다

사당은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공부하는 강당 역시 팔작지붕으로 앞면4칸·옆면 3칸 규모의 건물이다.


참고-임실군지, 1997.
전라북도문화재대관, 1997.
 
사진 : 경주최씨도천공 블로그 http://blog.daum.net/6299842/75991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