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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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신안서원(新安書院)
   전라북도 임실군 임실읍 신안리 1134
   주 희(朱 熹) 이 서(李 舒) 송경원(宋慶元) 한호겸(韓好謙) 한필성(韓必聖) 강백진(康伯珍) 한명유(韓鳴愈) 송시웅(宋時熊) 김수근(金洙根)
   1588년(선조 21)
   1819년(순조 19)
   3월 9일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22호(1984.04.01지정)
신안서원이 처음 창건된 것은 1588년(선조 21)인데 이때는 하나의 사우(祠宇) 형태였다. 한호겸(韓好謙)은 당시 성리학자로 효행과 충절이 지극하고 항상 주희의 영정을 봉안하고 거기서 자신의 문인들에게 강독하였다고 하는데, 그가 사망하자 그의 문인들이 그를 위해 주희와 그 위패를 봉안하여 신안사라 이름하고 배향하였다. 이곳의 지명이 현재 신안리로 하게 된 것은 이때부터였다고 한다.
그 뒤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가 현종 10년(1669) 중건되었다. 1819년(순조 19)에 이르려 규모를 증설 확장하였는데 함평의 자양서원(紫陽書院)에 안치된 주희(朱熹)의 영정을 이곳으로 옮겨와 주벽(主壁)으로 봉안함과 동시에 ‘신안(新安)’이라고 사액(賜額)되어 서원으로 승격되었으며, 그러나 1869년(고종 5)대원군의 전국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해방 뒤 1958년 이 지역 유림들에 의해 복설하였다. 이 서원에는 중국 남송대 성리학자 주희(朱熹)를 주벽으로 하고, 이서(李舒), 송경원(宋慶元), 한호겸(韓好謙), 한필성(韓必聖), 강백진(康伯珍), 한명유(韓鳴愈), 송시웅(宋時熊), 김수근(金洙根)을 배향하고 있다.

1)주벽-주희(朱熹, 1130~1200)
자 원회(元晦)·중회(仲晦). 호 회암(晦庵)·회옹(晦翁)·운곡산인(雲谷山人)·창주병수(滄洲病叟)·둔옹(遯翁). 이름은 희(熹). 푸젠성[福建省] 우계(尤溪) 출생. 선조는 대대로 휘주무원(徽州婺源:安徽省)의 호족으로 아버지 위재(韋齋)는 관직에 있다가 당시의 재상(宰相) 진회(秦檜)와의 의견충돌로 퇴직하고 우계에 우거(寓居)하였다. 주자는 이곳에서 14세 때 아버지가 죽자 그 유명(遺命)에 따라 호적계(胡籍溪)·유백수(劉白水)·유병산(劉屛山)에게 사사하면서 불교와 노자의 학문에도 흥미를 가졌으나, 24세 때 이연평(李延平)을 만나 사숙(私淑)하면서 유학에 복귀하여 그의 정통을 계승하게 되었다.
그의 강우(講友)로는 장남헌(張南軒)·여동래(呂東萊)가 있으며, 또 논적(論敵)으로는 육상산(陸象山)이 있어 이들과 상호 절차탁마(切瑳琢磨)하면서 주자의 학문은 비약적으로 발전 심화하여 중국사상 공전(空前)의 사변철학(思辨哲學)과 실천윤리(實踐倫理)의 체계를 확립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19세에 진사시에 급제하여 71세에 생애를 마칠 때까지 여러 관직을 거쳤으나, 약 9년 정도만 현직에 근무하였을 뿐, 그 밖의 관직은 학자에 대한 일종의 예우로서 반드시 현지에 부임할 필요가 없는 명목상의 관직이었기 때문에 학문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의 학문을 저서를 통해서 관찰해 보면 46세까지를 전기, 이후 60세까지를 중기, 61세 이후를 후기로 하는 3기(三期)로 대별할 수 있다. 주자연보(朱子年譜)에 의해 전기 저서를 순차적으로 열거하면 ≪논어요의(論語要義)≫·≪논어훈몽구의(論語訓蒙口義)≫·≪곤학공문편(困學恐聞編)≫·≪정씨유서(程氏遺書)≫·≪논맹정의(論孟精義)≫·≪자치통감강목(資治通鑑綱目)≫·≪팔조명신언행록(八朝名臣言行錄)≫·≪서명해의(西銘解義)≫·≪태극도설해(太極圖說解)≫·≪통서해(通書解)≫·≪정씨외서(程氏外書)≫·≪이락연원록(伊洛淵源錄)≫·≪고금가제례(古今家祭禮)≫로 이어져 ≪근사록(近思錄)≫의 편차(編次)로 끝맺었다. 이 전기는 북송의 선유(先儒)인 주염계(周濂溪)·장횡거(張橫渠)·정명도(程明道)·정이천(程伊川)의 저서교정과 주례에 전념하고, ‘논어·맹자’ 등은 차기(次期)의 예비사업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즉, 주자의 학문적 기초가 확립된 시기로서 그것이 ≪근사록≫에 집약된 것으로 보인다. 그후에 논적이었던 육상산 형제와의 아호사(鵝湖寺) 강론에서 존덕성(尊德性)에 대해 도학(道學)의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중기에는 ≪논맹집주혹문(論孟集註或問)≫·≪시집전(詩集傳)≫·≪주역본의(周易本義)≫·≪역학계몽(易學啓蒙)≫·≪효경간오(孝經刊誤)≫·≪소학서(小學書)≫·≪대학장구(大學章句)≫·≪중용장구(中庸章句)≫ 등이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사서(四書)의 신주(新註)’가 완성된 점이다.
60세 때는 ≪중용장구≫에 서문을 붙여 상고(上古)에서 후대까지 도학을 전한 성현(聖賢)의 계통을 밝혀 도학의 기초를 확립하였다.후기에는 오경(五經)에 손을 대어 ≪맹자요로(孟子要路)≫·≪예서(禮書:儀禮經傳通解)≫·≪한문고이(韓文考異)≫ ≪서전(書傳)≫·≪초사집주후어변증(楚辭集註後語辨證)≫등이 있다. 더욱이 71세로 생애를 마치던 해 3월, ≪대학≫의 ‘성의장(誠意章)’을 개정(改訂)한 점으로 미루어 그의 ≪사서집주(四書集注)≫에 대한 지정(至情)이 어느 정도이었는지 엿볼 수 있다.
주자의 정치에 대한 의견은 <임오응조봉사(壬午應詔封事)>나 <무신봉사(戊申封事)>에 나타나 있으며 또 절동(浙東)의 지방관으로 있을 때 대기근(大飢饉)을 구제하였다는 실적도 있으나 만년에는 권신의 미움을 사 그의 학문이 위학(僞學)이라 하여 많은 박해를 받았으며, 해금(解禁)이 있기 전에 죽었다.
그 후 그의 학문이 인정되어 시호가 내리고 다시 태사(太師)·휘국공(徽國公)이 추증(追贈)되었다. 그의 유언을 수록한 것으로는 주자의 막내아들 주재(朱在)가 편찬한 ≪주문공문집(朱文公文集)≫(100권, 속집 11권, 별집 10권)이 있고, 문인과의 평생문답을 수록한 여정덕(黎靖德) 편찬의 ≪주자어류(朱子語類)≫ 140권이 있다.
 
2)송경원(宋慶元, 1419∼151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여산(礪山). 호는 둔학(遯壑). 아버지는 군수 치선(治善)이며, 어머니는 연일정씨(延日鄭氏)이다. 김종직(金宗直)·남효온(南孝溫) 등과 교유하였다. 1455년 음보로 전라도사에 임명되었다.
1457년(세조 3) 단종이 영월에 유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재종형 간(侃)과 함께 영월로 달려가 문밖에서 복명하고 돌아왔으며, 단종이 사사되자 간과 함께 계룡산(鷄龍山)으로 들어가 2년간 복상하였다. 그 뒤 출세를 단념하고 임실(任實) 백이산(伯夷山)에 은거하여 그곳에서 일생을 마쳤다.
당시 그 곳에 숨어 충절을 지켰던 이인로(李仁老)·조응(趙膺) 등과 함께 임실생육신(任實生六臣)이라 불린다. 1788년(정조 12) 신안서원(新安書院)에 제향되었고, 이어 숙모전(肅慕殿)에 추배(追配)되었다. 저서로 ≪둔학집≫이 있다.
3)한호겸(韓好謙)
자는 명보(明甫)이고 자는 신재(新齋)이며, 본관은 청주이다. 그는 확(確)의 5대손이자 부(傅)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일재 이항(一齋 李恒)의 문인으로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위기지학에 심취하여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그는 효행과 학덕으로 천거되어 호조참판에 증직되었다.
 
4)한필성(韓必聖)
자는 자인(子仁)이고, 호는 만회(晩悔)이며, 본관은 청주이다. 그는 호겸의 증손이자 경장(慶長)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용모가 출중하였고 학문에 뜻을 두어 성리학 연구에 전념하였다.
 
5)강백진 (康伯珍, ?∼150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신천(信川). 자는 자온(子韞), 호는 무명재(無名齋). 윤리(允釐)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거례(居禮)이고,아버지는 척(惕)이며, 어머니는 김숙자(金淑滋)의 딸이다. 중진(仲珍)은 그의 아우이다. 김종직(金宗直)의 생질이자 문인이다.
1472년(성종 3) 생원시에 합격하고, 1477년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하였다. 1490년 사헌부지평이 되었다가 같은 해 10월에 함안군수가 되었으며, 재직기간 선정을 베풀어 1493년 경상도관찰사 이극균(李克均)으로부터 선정사실에 대한 장계(狀啓)로 가자(加資)되기도 하였다.
이듬해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사헌부장령·사간원사간을 지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일손(金馹孫)·권오복(權五福)·권경유(權景裕) 등이 대역죄로 능지처사를 당할 때 장(杖) 80에 정주로 귀양가서 봉수(烽燧)의 야역(夜役 : 야간에 불을 피우는 봉수군의 역)을 하였다.
1504년에 무오수죄(戊午受罪 : 무오사화로 죄를 받음)로 외방부처된 사람들의 처리안이 나와 그는 결국 능지처참되고, 아들과 형제들도 결장(決杖 ; 장형을 받음)에다 외방으로 축출당하였다. 1506년(중종 1)에 대사간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효량(孝良)이다.
 
6)한명유(韓鳴愈)
자는 문인(文仁)이고 호는 홍운(鴻雲)이며 본관은 청주이다. 그는 호겸의 현손이자 필현(必賢)의 아들로 태어났다. 사람들은 그를 대명처사라 부르기도 하였다. 그는 20여 년 동안 ≪춘추≫읽기를 즐겨하였으며 후진 양성에 전력을 다하다 여생을 마쳤다.
7)송시웅(宋時熊)
자는 여상(汝詳)이고 호는 거묵(距墨)이며, 본관은 여산이다. 그는 둔학 경원의 현손이자 정빈(廷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천성이 지효(至孝)하여 부모를 모시는 데 지체봉양(志體奉養)을 위주로 하였다. 어버이 명에 몸소 탕제 수발을 다하고 음식을 지성으로 구환(救患)하였다. 어버이 상을 당해서는 시모의 예를 다하였다.
 
8)김수근(金洙根, 1798∼1854)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회부(晦夫), 호는 계산초로(溪山樵老). 원행(元行)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이직(履直)이고, 아버지는 목사 인순(麟淳)이며, 어머니는 신식(申湜)의 딸이다. 1828년(순조 28)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음사(蔭仕)로 동몽교관(童蒙敎官)이 되었으며, 1833년 시제에서 수석하여 전시에 곧바로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얻어 이듬해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1835년(헌종 1) 규장각대교(奎章閣待敎)가 된 뒤 1837년 대사성, 1840년 이조참의, 1845년 우윤(右尹), 1847년 충청도관찰사, 1850년(철종 1) 이조참판·공조판서, 1851년 우참찬·대사헌, 다음해에 이조판서와 홍문관대제학·선혜청당상, 1853년 병조판서, 1854년 형조판서·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하였다. 당대 세도가의 출신으로서, 동생 문근(汶根)은 철종의 장인으로 영은부원군(永恩府院君)에 봉하여졌고, 두 아들 병학(炳學)과 병국(炳國)은 모두 정승에 올랐다.
철종 묘정(廟庭)에 배향되고 거제의 반곡서원(盤谷書院)에 배향되었다. ≪삼연선생연보 三淵先生年譜≫가 있다. 시호는 정문(正文)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신문(神門), 4칸의 강당, 3칸의 동재(東齋), 4칸의 고사(雇舍), 창고, 대문 등이 있다.
사우의 중앙에는 주희의 위패를 봉안하였고, 동서 양쪽에 각각 4명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강당의 중앙에는 마루가 있고 양쪽에는 협실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의 토론장소로 쓰였다. 동재는 수학하는 유생들이 거처하는 곳이며, 고사는 서원 관리자의 사택으로 사용하는 곳이다.
유물로는 ≪당옹실기 戇翁實記≫ 1책 등 10여 종의 문헌이 있다.
참고-임실군지1997,
전라북도문화재대관, 199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두산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