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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임실군 둔남면 주천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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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 도(郭 都) 곽득형(郭得亨) 곽흥무(郭興懋) 곽유번(郭維藩) 신계징(申啓澄) 유 조(柳 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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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64년(현종 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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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3월 15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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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서원에는 곽도(郭都)를 주벽으로 곽득형(郭得亨), 곽흥무(郭興懋), 곽유번(郭維藩), 신계징(申啓澄), 유조(柳組)를 배향하였다. 1664년(현종 5) 창건하여 1717년(숙종 43)에 보수하였다.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는데, 그 뒤 1872년(고종 9)에 설단 향사하다가 1975년 다시 세웠고 1992년에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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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벽-곽도(郭都) 자는 최부(崔夫)이고 호는 노재(魯齋)이며 본관은 현풍이다. 그의 생졸년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는 포산군 부(郛)의 후손으로 태종 때 집의를 역임하였다. 수양대군이 단종을 폐위하고 자신이 왕위에 즉위하자 그는 사육신 등과 함께 통곡하고 감악산으로 은퇴하였다가 임실의 노산에 은거하면서 후진을 가르쳤다. 그 뒤 담양 부사에 제수되어 그는 치적을 남겼으며, 승지로 있다가 죽었다. 2)곽득형(郭得亨) 호는 귀노재(歸魯齋)이며, 본관은 현풍이다. 그의 생졸년대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3)곽흥무(郭興懋) 자는 면숙이고 호는 오송(鰲松)이며 본관은 현풍이다. 그의 생졸 년대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는 도의 5세손이다. 그는 우계 성혼의 문인이다. 그는 참봉을 거쳐 간관·첨정을 역임하였다. 그는 임진왜란 때 의주에서 임금을 호종하였으며, 명나라의 장병들과 함께 평양에서 왜적을 쳐부수어 공을 세웠다. 4)곽유번(郭維藩, 1604∼1668) 조선 후기의 문인·의병. 본관은 현풍(玄風). 자는 위경(衛卿), 호는 오암(鰲巖). 아버지는 해(海), 어머니는 흥덕장씨(興德張氏) 통사랑(通仕郞) 비(備)의 딸이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교문(敎文)을 지어 전포(傳布)하고 의병을 모집하여 수원(水原)에 이르렀고, 장차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가려다가 강화의 소식을 듣고 비통(悲痛)의 시를 짓고 해산하였다. 뒤에 수직(壽職 :노인에게 내린 관직)으로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다. 항상 산수(山水)와 풍월(風月)을 즐기며 시주(詩酒)와 금가(琴歌 : 거문고에 맞추어 부르는 노래)로 여생을 보냈다. 저서로는 ≪오암문집≫이 있다. 5)신계징(申啓澄) 호는 은곡(隱谷)이고 본관은 고령이다. 그의 생졸년대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현감을 역임하였다. 6)유조(柳組) 자는 중규(重圭)이고 호는 지곡(芝谷)이며, 본관은 전주이다. 그의 생졸 년대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그는 도암 이재의 문인으로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그는 ‘척사설’을 주장하여 어진 선비들을 변무(辨誣)하였다. 그의 저서로 <지곡집>이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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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당과 내삼문, 강당과 외삼문으로 이루어져 있어 강학공간과 제향공간이 구분되어 있다. 외삼문을 들어서면 정면에 강당이 있으며 강당오른쪽으로 내삼문을 지나 사당이 위치한다. 강당왼쪽으로는 작은 문이 측면으로 따로내어 들어오도록 나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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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임실군지1997, 전북향교원우대관199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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