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덕계서원(德溪書院)
   전라북도 임실군 둔남면 둔기리
   이정숙(李正叔) 이 총(李 灇) 이 기(李 祺) 이 주(李 柱) 최 위 이 도(李 燾) 김유경(金裕慶) 이여재(李如梓)
   1793년(정조 17)
   
   불향
   
이 서원이 처음 세워진 것은 1793년(정조 17)이다. 처음에는 남원시 사매면 대신리 매계마을에 세우고 이름을 ‘매계서원’이라 하였다가 1805년(순조 5) 지금의 장소로 이건(移建)하고 이름을 ‘덕계서원’이라 하였다. 그 뒤 19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1993년에 이르러 원래 창건지에 복설되었다.

1)주벽-이정숙(李正叔, ?∼1521)
조선 중기의 종실. 본관은 전주(全州). 세종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의(義)이며, 어머니는 여산송씨(礪山宋氏)로 부사 자강(自剛)의 딸이다. 유년에 시산부정(詩山副正)에 제수, 일찍부터 학문에 진력하여 성취가 있었다. 중종이 즉위하자 정이(程頣)로 자처하면서 정이와 주희(朱熹)가 황제에게 올렸던 글을 왕에게 전하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길잡이로 삼을 것을 간청하였다. 이후 조광조(趙光祖)·김식(金湜) 등과 교유하였다. 1515년(중종 10) 순창군수 김정(金淨), 담양부사 박상(朴祥)이 폐비 신씨(愼氏)의 복위를 청한 것으로 인하여 의금부에 하옥되자, 강녕부정(江寧副正) 이기(李祺), 숭선부정(嵩善副正) 이총(李灇), 장성부정(長城副正) 이엄(李儼)과 연명으로써 김정·박상을 석방하고 여악(女樂)을 고칠 것 등을 극간하였다. 이후에도 수시로 시사를 진언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 때 관작을 삭탈당하고, 1521년 안처겸(安處謙)의 옥사에 재차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2)이총(李灇, 1488∼154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종지(淙之), 호는 마재(磨齋). 아버지는 세조의 아들인 덕원군 서(德源君 曙)이다. 승헌대부(承憲大夫) 숭선부정(嵩善副正)에 봉해졌다.
조광조(趙光祖)와는 도의(道義)로써 교제했고 일찍부터 정주학에 심취하여 <정주봉사 程朱封事>를 인출(印出), 다스림에 허물이 없도록 임금에게 바쳐 왕으로부터 서적이 하사되었다. 또, 왕에게 표문(表文:임금께 表로 올리던 글)을 올려 정치의 잘못을 극론하고 김정(金淨)·박상(朴詳) 등의 방면과 여악(女樂)을 혁파할 것 등을 주청하였다. 기묘사화 때 조광조 일파인 좌당(坐黨)에 붙어 정치에 관여했다가 관직을 삭탈당하였다. 1520년 김덕순(金德純)의 장인이었던 그는 덕순의 소재에 대하여 심문을 받아 매를 맞고 영해로 유배되어 15년이나 있다가 개령(開寧)으로 옮겨졌다. 1534년에 풀려나 1538년에 겨우 복직되었다.
그의 순수하고 바른 학문과 충효의 절의는 당시 유림들 간에 널리 알려져 추앙받고 있었다. 이이(李珥)가 쓴 묘지에 보면 조광조와는 서로 존경하는 벗이었으며, 천성과 자질이 청수하고 아름다웠고 기량이 숙성했으며, 마음을 바른 학문에 두고 사람을 대할 때는 공경을 다하며 갑작스런 일을 당하더라도 말에 변함이 없었다. 평생 큰 뜻은 오직 충효를 지키는 데 있었고, 검소하며 깨끗하고 청렴한 선비처럼 행세하였다. 육예(六藝)에 정통했는데, 특히 음악과 산수에는 통하지 않는 바가 없었다. 숙종 때 와서 바른 학문과 충효가 이미 유현(儒賢:유교에 대하여 조예가 깊고 행실이 바른 사람)의 정론(正論)하는 바가 있고, 또 조광조와 함께 사화에 화를 입었던 것으로 시호와 봉군(封君)이 추증되었다.
 
3)이기(李祺)
시호는 문충, 영해군 당(寧海君 李瑭의 손자)이며 정숙(正叔)의 종제이다. 어려서 학문에 뜻을 두고 벼슬에 뜻이 없었다. 조광조 등과 도의로 깊게 사귀었으며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정조 때 강녕군에 봉해지고 시호가 내려졌다.
 
4)이주(李柱, 1562~1594)
자는 방언(邦彦)이고 호는 한촌(寒村)이며, 덕원군 서의 증손이자 임천군 광의 아들로 1562년(명종 17) 전주에서 태어났다. 그가 평안도 순안 법흥사에서 사명당 유정과 함께 병법을 수련하던 중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그는 눈물을 흘리면서 창의하여 의병과 군량을 모집하여 적과 싸울 태세를 갖추고 평양으로 갔다. 그가 평양에 이르렀을 때 왜적이 앞을 가로막았다. 이 때 그는 칼을 빼 수십명의 왜적을 참살하였다. 행재소로 나아가 선조를 배향하였다.
선조는 그의 두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뜻 밖에 종친이 와 왜적을 소탕하여 대훈(大勳)을 세웠다’고 하면서 기뻐하였다. 그는 이곳에서 순안으로 나아가 대군과 합세 선봉에 서서 성 안으로 들어가 왜적 수십명을 참살하였다. 선조가 그의 공을 높이 사 그에게 호성군(湖城君)을 봉하고 마복패(馬服牌)를 은사(恩賜)하였다. 그는 뒤에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에 녹훈되었다. 그는1594년(선조 27) 33세로 요절하였는데, 선조는 그의 죽음을 슬퍼하여 조회를 파하고 관곽(棺槨)을 하사하였으며, 예장(禮葬)과 치제(致祭)를 하도록 명하였다.
 
5)최위(1599~1660)
최위의 자는 원지(遠志)이고 호는 쌍백당(雙栢堂)이며 본관은 삭녕이다. 그는 충의위 상근의 아들로 1599년(선조 32) 남원에서 태어났다. 그는 일찍이 아버지를 여의고 어미니 봉양에 정성을 다하였으며, 어머니의 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시묘를 하였다.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모아 여산을 거쳐 서울로 진격 처숙부 이안눌을 따라 남한산성으로 임금을 호종하였다. 그는 화의를 결사반대하다 마침내 화의가 이루어지자 통곡하면서 고향으로 돌아와 산속으로 자취를 감추고 세상과의 인연을 끊었다. 1660(현종 1)에 죽었다.
 
5)이도(李燾, 1639~ )
이도의 호는 용산(龍山)이고 시사정 정숙(詩山正 正叔)의 5세손으로 1639년(인조 17)에 태어났다. 그는 널리 배워 행실 돈독하였다. 그의 저서로 <존주이굴(尊周理窟)>이 전해지고 있다.
 
6)김유경(金裕慶)
호는 정재(靜齋)이고, 본관은 경주이다. 그는 1644년(인조 22) 계림군(鷄林君)의 후예로 태어났다. 그는 품성이 중후하고 효우가 뛰어났다. 그는 공조좌랑을 역임하였으며, 산음현감을 하였는데 치적이 있었다.
 
7)이여재(李如梓, 1709~?)
호는 악재(樂齋)이고 본관은 전주이다. 그는 시산정 6세손으로 1709년(숙종 35) 지금의 오수면 둔기리에서 태어났다. 그는1759년(영조 35)에 진사시에 합격한 뒤 영릉참봉(寧陵參奉)을 하였다. 그는 졸 년대에 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1993년 복원

참고-임실군지199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북향교원우대관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