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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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관곡서원(館谷書院)
   전라북도 임실군 지사면 관기리 208
   최윤덕(崔潤德) 이 적(李 迪) 이형남(李亨南)
   1736년(영조 12)
   
   (음력) 2월 17일
   문관곡서원소장전적 및 고문서 -전라북도유형문화재 168호(2003.05.16지정)
관곡서원은 1736년(영조 12)에 창건되었다가 1868년(고종 5) 대원군의 전국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 뒤 1952년 후손들에 의해 복설되었다. 이 서원에는 최윤덕(崔潤德)을 주벽으로 이적(李迪), 이형남(李亨南)을 배향하고 있다. 향사일은 음력 2월17일이다.

1)주벽-최윤덕(崔潤德, 1376∼1445)
조선 전기의 무신. 본관은 통천(通川). 자는 여화(汝和)·백수(白修), 호는 임곡(霖谷). 아버지는 지중추부사 운해(雲海)이다. 태어나면서 어머니를 여의고 아버지는 국경의 수비에 나가 있어 한마을에 사는 양수척(楊水尺)에 의하여 양육되었다. 어려서부터 힘이 세고 활을 잘 쏘았으며, 어느 날 소에게 꼴을 먹이러 산에 갔다가 호랑이를 만나 화살 하나로 쏘아 죽였다.
그 뒤 음관(蔭官)으로 기용되어 아버지를 따라 여러 번 전공을 세우고 부사직이 되었다. 1402년(태종 2)에 낭장이 되고, 곧 호군을 거쳐 이듬해 대호군이 되었다.
1406년 지태안군사(知泰安郡事)가 되었다가 1410년 무과에 급제하여 상호군이 되었다. 동북면조전병마사(東北面助戰兵馬使)가 되었다가 이듬해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에 올랐다. 1413년 경성등처절제사(鏡城等處節制使)가 되어 동맹가첩목아(童孟哥帖木兒)를 복속시켜서 야인들의 준동을 막았다. 영길도도순문찰리사(永吉道都巡問察理使)·우군총제·중군도총제 등을 역임하였다.
1419년(세종 1)에 의정부참찬으로 삼군도통사가 되어 체찰사 이종무(李從茂)와 함께 대마도를 정벌하였다. 1421년에는 공조판서가 되어 정조사(正朝使)로 명나라에 다녀와서 곧 평안도도절제사가 되었다. 1426년 좌군도총제부사, 1428년에 병조판서에 올랐다.
1433년 파저강(婆猪江)의 야인인 이만주(李滿住)가 함길도 여연(閭延)에 침입했을 때 평안도도절제사가 되어 이만주를 대파했고,이 공으로 우의정에 특진되었다. 이듬해 적이 또 변방을 침입하자 평안도도안무찰리사(平安道都安撫察理使)로 나가 이를 진압했다.돌아와서는 무관으로서 재상의 직에 있을 수 없다는 소를 올려 무관직에 전임할 수 있도록 요청했으나 허락되지 않았다. 1435년에 좌의정으로 승진했고, 이듬해 영중추원사에 전임된 뒤 1445년에 궤장(几杖)을 하사받았다.
성품이 자애롭고 근검해서 공무의 여가를 이용, 묵은 땅에 농사를 지었다. 호랑이에게 잡아먹힌 남편의 원수를 갚아달라는 여인의 호소를 듣고 그 호랑이를 잡은 뒤에 배를 갈라 남편의 뼈를 찾아 장사를 지내게 해 준 일도 있다. 세종의 묘정에 배향되었고, 통천의 상렬사(尙烈祠)와 안주의 청천사(淸川祠)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렬(貞烈)이다.
 
2)이적(李迪,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합천(陜川). 자는 윤지(允之). 아버지는 훈련참군 백손(伯孫)이며, 어머니는 현감 강행(姜行)의 딸이다. 외숙인 전적(典籍) 강문회(姜文會)로부터 가르침을 받았다. 1513년(중종 8)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교서관정자를 거쳐 교리에 이르렀다. 성품이 순화관후(醇和寬厚 : 온순하면서 너그러움)하여 능히 사람을 용서할 줄 알았으며, 집안에서는 산업(産業)을 잘 다스리지 않아 가난에 처함이 매우 심하였으나 이를 편안히 여겼다.
 
3)이형남(李亨男, 1556∼1627)
임진왜란 때 의병. 본관은 진보(眞寶), 자는 가중(嘉仲), 호는 송계(松溪). 안동(安東) 이계(伊溪) 동촌(東村)에서 출생하였다. 아버지는 훈도(訓導) 제(濟)이며, 어머니는 영양남씨(英陽南氏) 참봉 욱(頊)의 딸이다. 이황(李滉)·권대기(權大器)의 문인이다.
1588년(선조 21) 진사·생원 양시(兩試)에 합격하였으나 더 과시에 나아가지 않고 구로동(九老洞)에 집을 지어 대취헌(對翠軒)이란 현판을 걸고 실천(實踐) 공부에 힘썼다. 1592년 왜란이 일어나자 순국의 뜻을 품고 안동 임하현(臨河縣)에서 의병을 모집하였다.
직접 정제장(整齊將)이 되어 김득연(金得硏)과 의창(義倉)에 양식을 가득하게 모아 놓고 의병(義兵)과 관군(官軍)에게 제공하였다.이 소문이 부근에 알려지자 도망간 병사들이 모여 들고 인심이 안정되어 왜적들이 감히 안동(安東)으로 침입하지 못하였다.
유성룡(柳成龍)은 이 때 안동이 무사한 것은 그가 이끈 향병(鄕兵)의 힘이었다고 하였다. 정유재란(丁酉再亂) 때 명나라 경리(經理)양호(楊鎬), 도사(都司) 설호신(薛虎臣)이 안동에 잠시 주둔한 적이 있었는데, 그 종사(從事) 장무덕(張懋德)·진천총(陳天寵)·주공유(朱孔儒) 등이 군량미 조달을 위하여 그의 향병(鄕兵)과 의창(義倉)을 방문하여 보고서 감탄하기도 했다. 1600년 경릉참봉(敬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저서로는 ≪송계문집≫ 2권이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 기와집이고 내삼문은 2칸의 팔작집이다. 외문(1칸)에는 경천문(景天門) 현판이 있고 그 바로 안쪽의 관곡사부설충보기적비(館谷祠復設衷寶紀蹟碑) 와 관곡서원 현판이 있고 그 앞에 요사가 있다.

1)관곡서원소장전적 및 고문서-전라북도유형문화재 168호(2003.05.16지정)
서원 관계 서적이나 문서들이 희귀한 편인데 관곡서원에 관계되는 일괄 문서를 두루 구비하고 있어 매우 귀중한 자료라고 판단되며,보노안(保奴案), 보직안(保直案)은 원노(院奴)와 서원의 직숙을 담당하던 원직(院直)을 재정적으로 돕기 위해 배정된 보노(保奴),보직(保直)의 명단으로 19세기에 서원에도 保가 배정되었음을 알려준다.
고문서 중에는 1) 서원 접인(接人)의 잡역을 금해줄 것을 진정하여 수령으로부터 승인받는 과정을 알 수 있게 하는 것 2) 서원 유안(儒案)에 평민이 입록(入錄)되고 있으며 유생의 확보가 재정적 의미를 가진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 3) 서원 유생을 수령이 착정(着定)하고 그 差帖도 수령이 발행한다는 것을 알려주는 것이 있어 18-19세기 사회를 이해하는 데에 좋은 자료이다.

참고-임실군지1997,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사진-1.다음카페 ‘임실을 사랑하는 사람들’ http://cafe.daum.net/loveimsil/
<정진도>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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