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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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봉강서원(鳳岡書院)
   전라북도 완주군 봉동읍 구만리 529
   이방간(李芳幹) 이헌구(李憲球)
   1754년(영조 30)
   
   2월, 8월 중정(中丁)
   
봉강서원은 1754년(영조 30) 용진면 목단동(牧丹洞)에 목단서원(牧丹書院)이라는 사액을 받아 처음 세워졌던 것을 1852년(철종3) 지금의 위치로 이건하여 봉강서원이라 개칭하게 되었다. 그 뒤 대원군의 전국 서원 철폐령에 의해 1869년(고종 6) 철거되었던 것을 1899년(광무 3)에 복원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본 서원에는 현재 이방간(李芳幹)을 주벽으로 이헌구(李憲球)의 신위를 모시고 매년 2월과 8월 두 차례 제사를 지내오고 있다.

1)주벽-이방간(李芳幹, ?∼1421)
조선 전기의 왕자. 이름은 방간(芳幹). 아버지는 태조이며, 어머니는 신의왕후 한씨(神懿王后韓氏)이다. 첫째부인은 판서 민선(閔璿)의 딸이고, 둘째부인은 판서 황형(黃亨)의 딸이며, 셋째부인은 정랑 김인배(金仁排)의 딸이다.
고려왕조에 벼슬해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을 역임하였다. 조선왕조가 개창되자 1392년(태조 1) 회안군(懷安君)에 봉군되었다. 그 뒤 1398년 회안공으로 개봉되면서 의흥삼군부좌군절제사가 되었다. 그리고 이른바 제2차 왕자의 난으로 유배 중인 1401년(태종1) 회안대군이 되었다.
1398년(정종 즉위년) 8월에 발생한 제1차 왕자의 난에 정안군 방원(靖安君芳遠)을 도와 정도전(鄭道傳) 일파를 제거하는 데 세운 공으로 정사공신(定社功臣) 1등으로 책록되었다. 그 뒤 개국공신 1등에 추록되었고, 1399년 풍해도(豊海道)와 서북면의 병사를 분령하였다. 이듬해 지중추부사 박포(朴苞)의 이간에 충동되어 제2차 왕자의 난을 일으켰으나 실패하면서 토산(兎山 : 지금의 황해도 토산)으로 유배되었다.
1400년 2월에 3성의 장무(掌務)가 “방간이 사사로이 군대를 일으켜 골육을 해하려고 했을 때 왕께서 처음에는 도승지를 보내시어 동병하지 말 것을 명했으나 듣지 않고, 군대를 발했으니 대법으로 다스리소서.”라고 하면서 치죄할 것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정종과 방원의 관용으로 죄가 더해지지는 않았다. 그리고 유배된 토산이 전일에 군사를 분령한 곳이기 때문에 후일의 염려가 있다 해서 안산으로 이치(移置)되었을 뿐, 전지(田地)와 식읍을 받았으며 매년 초하룻날에는 한양에 들어가는 것을 허락받았다.
1400년 9월에는 문하부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익주(益州)로 이치되었다. 태종이 즉위한 뒤에도 계속 관용을 받아, 이듬해 5월에는 태종이 보낸 의원으로부터 치료를 받기도 하였다. 그리고 6월에는 실행되지는 못했지만 서울로의 소환까지 논의되었다.
1402년에는 대간으로부터 전렵으로 일을 삼는 등 뉘우침이 없으니 경계와 보전을 위해 제주로 이치 하라는 요청이 있었다. 그러나 순천성(順天城)에 이치 되는 것으로 그쳤다. 1404년 왜구의 화를 피해 익주로 다시 옮겨졌고, 1410년 8월에는 완산(完山)으로 옮겨졌다.
그러나 1416년 형조·대간의 집요한 청죄로, 아들 맹중(孟衆)과 함께 공신녹권(功臣錄券)과 직첩을 몰수당했다. 그리고 1417년 홍주(洪州)로 이치 되었다. 세종치세 때에도 누차 치죄가 논의되었지만 상왕과 세종의 관용을 받았다.
1419년 노비 100구만 속공(屬公)되었을 뿐 천명(天命)을 누리다가 홍주(洪州)에서 죽었다. 오랫동안 ≪선원록 璿源錄≫에서 제외되다가 1605년(선조 38) 선원록교정청(璿源錄校正廳)의 계(啓)를 계기로 신설(伸雪)이 논의되었다. 그 뒤 1680년(숙종 6) 선원록이정청(璿源錄釐正廳)의 계품(啓稟)에 따라 그 자손과 함께 ≪선원록≫에 재록(載錄)되면서 신설되었다. 시호는 양희(良僖)이다.
 
2)이헌구(李憲球, 1784∼185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치서(稚瑞), 호는 국헌(菊軒). 좌의정 건명(健命)의 현손이며, 면지(勉之)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철상(徹祥)이고, 아버지는 장현(章顯)이며, 어머니는 김치온(金致溫)의 딸이다. 청검(淸儉)하며 근면하기로 이름났다.
1814년(순조 14)에 진사가 되고, 1816년(순조 16)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829년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올랐으며 그 뒤 성균관대사성·이조참의를 역임하고, 1836년(헌종 2)에 이조참판에 올랐다. 이듬해 전라도관찰사에 임명되고, 1841년 한성부판윤·공조판서·대사헌을, 이듬해 형조판서·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한편 그 해 평안도관찰사로 파견되어 의주를 비롯한 여러 산성에 군량을 비축하도록 하였고, 별무시(別武試)를 실시하였다.
1844년 사헌부대사헌으로 김유근(金逌根)·김홍근(金弘根)의 추죄를 주장하다가 덕원부에 유배, 이듬해 석방되어 사은 겸 동지정사로서 청나라에 다녀왔다. 1847년 형조판서·대사헌·한성부판윤을 역임하고, 1849년(철종 즉위년) 이조판서, 이듬해 예조판서·판의금부사를 역임하였으며, 1852년 우의정에 올랐다. 그 때 나이 69세로 치사(致仕)하기를 연이어 간청하였으나 허락되지 않았으며 바로 좌의정이 되었다.
고령에도 불구하고 판중추부사·광주유수(廣州留守)를 역임하는 등 치정(治政)에 힘썼다. 70세가 되어 국가로부터 궤장(几杖)을 수여받고 기로소에 들어갔다. 묘정에 배향되었으며,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 내신문(內神門), 4칸의 강당, 대문 등이 있다. 사우에는 이방간과 이헌구의 위패가 배향되어 있다.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된 강당은 서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을 강론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전북원우록 全北院宇錄≫ 1책 등 30여권의 문헌

참고-완주군지1996,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