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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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화산서원(花山書院)
   전라북도 순창군 류등면 괴정리 저灘上
   신말주(申末舟) 김 정(金 淨) 김인후(金麟厚)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 박 상(朴 祥) 유 옥(柳 沃) 신공제(申公濟) 양사형(楊士衡) 김시서(金時瑞)
   1607년(선조 40)
   
   
   신말주선생의십로계첩(申末舟先生의十老契帖)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42호(1992.06.20지정)
1607년(선조 40)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신말주(申末舟), 김정(金淨), 김인후(金麟厚), 고경명(高敬命), 김천일(金千鎰) 등의 덕행과 충절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박상(朴祥), 유옥(柳沃), 신공제(申公濟), 양사형(楊士衡), 김시서(金時瑞)등을 추가배향 하였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며, 훼철되기 전의 경내 건물로는 현전(賢殿), 신문(神門)과 동·서 협문(夾門), 강당, 전사청(典祀廳), 고사(雇舍) 등이 있었다.

1)주벽-신말주(申末舟, 1439∼1503)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자집(子楫), 호는 귀래정(歸來亭). 서화가 덕린(德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조참의 포시(包翅)이고, 아버지는 공조참판 장(檣)이며, 어머니는 정유(鄭有)의 딸이다. 숙주(叔舟)의 동생이다.
1454년(단종 2) 생원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정과로 급제하여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다. 성격이 조용하고 담담하여 벼슬하기를 즐기지 않았다. 단종이 왕위에서 물러난 이후로 벼슬을 사임하고 물러나 순창에 살면서, 귀래정을 지어 산수를 즐겼다.
형 숙주가 강권하여 벼슬에 나오게 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한편,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그가 1470년(성종 1) 봄에 순창에 내려가 오래 귀경하지 않아 한때 파직된 것은 사실이지만, 그 뒤 1476년 전주부윤, 1483년 창원도호부사, 1487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와 대사간, 이듬해 첨지중추부사·전라수군절도사를 지낸 기록이 있다.
 
2)김정(金淨, 1486∼1521)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원충(元冲), 호는 충암(冲菴)·고봉(孤峯). 보은 출신. 호(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처용(處庸)이고, 아버지는 호조정랑 효정(孝貞)이며, 어머니는 김해허씨(金海許氏)로 판관(判官) 윤공(尹恭)의 딸이다.
1507년 증광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보임되고, 수찬(修撰)·병조좌랑을 거쳐 정언(正言)으로 옮겨졌다.이어 병조정랑·부교리(副校理)·헌납(獻納)·교리·이조정랑 등을 거쳐 1514년에 순창군수가 되었다. 이 때 왕의 구언(求言 : 정치에 도움이 되는 말이나 글)에 응해 담양부사 박상(朴祥)과 함께 중종 때 억울하게 폐출된 왕후 신씨(愼氏)의 복위를 주장하고, 아울러 신씨 폐위의 주모자인 박원종(朴元宗) 등을 추죄(追罪)할 것을 상소했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보은에 유배되었다. 이 때 권민수(權敏手)·이행(李荇) 등은 이들을 엄중히 다스릴 것을 주장한 반면, 영의정 유순(柳洵) 등은 이에 반대했고, 조광조(趙光祖)도 치죄를 주장한 대간의 파직을 주청하였다. 이 문제를 둘러싸고 대간 사이에도 대립이 생겼고, 둘 다 옳다는 설까지 제기되었다.
1516년 석방되어 박상과 함께 다시 홍문관에 들고, 권민수와 이행의 파직으로 마무리되었다. 그것은 곧 중앙정계에서의 사림파의 승리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 뒤 응교(應敎)·전한(典翰)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고, 뒤에 사예(司藝)·부제학·동부승지·좌승지·이조참판·도승지·대사헌 등을 거쳐 형조판서에 임명되었다. 이러한 그의 정치적 성장은 괄목할 정도였는데, 그것은 당시 사림파의 급속한 성장과 긴밀한 관계를 지닌 것이었다. 그 뒤 기묘사화 때 극형에 처해지게 되었으나, 영의정 정광필(鄭光弼) 등의 옹호로 금산(錦山)에 유배되었다가, 진도를 거쳐 다시 제주도로 옮겨졌다. 그 뒤 신사무옥에 연루되어 사림파의 주축인 생존자 6인과 함께 다시 중죄에 처해져 사사되었다. 1545년(인종 1) 복관되었고, 1646년(인조 24)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제자로는 김봉상(金鳳祥)·김고(金顧)·최여주(崔汝舟) 외에 조카인 천부(天富)·천우(天宇) 등이 있다.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청주의 신항서원(莘巷書院), 제주의 귤림서원(橘林書院),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충암집≫이 있는데, 여기에 실린 <제주풍토록>은 그가 기묘사화로 제주도에서 유배생활을 하면서 견문한 제주도의 풍토기이다. 시호는 처음에는 문정(文貞)이고, 나중에 문간(文簡)으로 고쳐졌다.
3)김인후(金麟厚, 1510∼1560)
조선 중기의 학자·문신. 본관은 울산(蔚山). 자는 후지(厚之), 호는 하서(河西) 또는 담재(湛齋). 전라남도 장성 출신. 아버지는 참봉 영(齡)이며, 어머니는 옥천조씨(玉川趙氏)이다.
열살 때 김안국(金安國)에게서 ≪소학≫을 배웠고, 1531년에 사마시에 합격해 성균관에입학, 이황(李滉) 등과 교우가 두터웠다. 1540년에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권지승문원부정자(權知承文院副正字)에 등용되었으며, 이듬해 호당(湖堂)에 들어가 사가독서하고, 홍문관저작(弘文館著作)이 되었다.
1543년에 홍문관박사 겸 세자시강원설서·홍문관부수찬이 되어 세자 보도(輔導)의 임을 맡았다. 특히, 기묘사화 때 죽임을 당한 제현(諸賢)의 원한을 개진해 문신으로서 본분을 수행하였다. 그 해 부모의 봉양을 위해 옥과현감(玉果縣監)으로 나갔다.
중종이 죽자 제술관(製述官)으로 서울에 올라왔으나, 일 년도 채 못 되어 인종이 죽고 곧이어 을사사화가 일어나자, 병을 이유로 고향 장성에 돌아갔다. 그 뒤 1554년까지 성균관전적·공조정랑·홍문관교리·성균관직강 등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나아가지 않았다.
시문에 능해 10여 권의 시문집을 남겼으나 도학에 관한 저술은 많지 않다. 그러나 성리학 이론은 유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그는 당시 이항(李恒)과 기대승(奇大升) 사이에 논란되었던 태극음양설에 대해 이항의 태극음양일물설(太極陰陽一物說)을 반대한 기대승에 동조해, 인심과 도심은 다 그 동처(動處)를 두고 이른 말임을 주장함으로써, 후일 기대승의 주정설(主情說) 형성에 깊은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학문은 성경(誠敬)을 주안으로 하였다. 그러므로 노수신(盧守愼)과 함께 숙흥야매잠해(夙興夜寐箴解)를 논한 내용을 보면, 마음이 일신을 주재한다는 노수신의 설을 비판하였다.
즉, 마음이 일신을 주재하지만 기(氣)가 섞여서 마음을 밖으로 잃게 되면 주재자를 잃게 되므로, 경(敬)으로써 이를 바르게 해야 다시금 마음이 일신을 주재할 수 있게 된다고 주장해, 이른바 주경설(主敬說)을 내놓았다. 또한 천문·지리·의약·산수·율력(律曆)에도 정통하였다. 제자로는 정철(鄭澈)·변성온(卞成溫)·기효간(奇孝諫)·조희문(趙希文)·오건(吳健) 등이 있다.
그는 1796년(정조 20)에 문묘에 배향되었고, 장성의 필암서원(筆巖書院), 옥과의 영귀서원(詠歸書院)에 제향되었으며, 대광보국숭록대부 영의정 겸 영경연·홍문관·예문관·춘추관·관상감사에 추증되었다. 저서로는 ≪하서집≫·≪주역관상편 周易觀象篇≫·≪서명사천도 西銘事天圖≫·≪백련초해 百聯抄解≫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正)이다.
4)고경명(高敬命, 1533∼1592)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은 장흥(長興). 자는 이순(而順), 호는 제봉(霽峰)·태헌(苔軒). 광주 압보촌(鴨保村) 출생. 자검(自儉)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형조좌랑 운(雲), 아버지는 대사간 맹영(孟英), 어머니는 진사 서걸(徐傑)의 딸이다.
1552년(명종 7) 사마시에 제1위로 합격, 진사가 되고, 1558년 왕이 직접 성균관에 나와 실시한 시험에서 수석해, 곧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할 수 있는 특전을 받았다. 같은 해 식년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에 임명되고, 이어서 공조좌랑이 되었다. 그 뒤 형조좌랑·사간원정언 등을 거쳐 호당(湖堂)에 사가독서(賜暇讀書)했다. 1561년 사간원헌납이 된 뒤 사헌부지평, 홍문관의 부수찬·부교리를 거쳐 1563년 교리가 되었다. 이 때 인순왕후(仁順王后)의 외숙인 이조판서 이량(李樑)의 전횡을 논하는 데 참여하고, 그 경위를 이량에게 몰래 알려준 사실이 드러나 울산군수로 좌천된 뒤 파직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나 고향에 돌아와 고전을 탐독하거나 자연과 벗 삼아 산수를 유람하면서 ≪유서석록 遊瑞石錄≫을 저술하였다. 1581년(선조 14) 영암군수로 다시 기용되었으며, 이어서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 김계휘(金繼輝)와 함께 서장관(書狀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듬해 서산군수로 전임되었는데, 명사원접사(明使遠接使) 이이(李珥)의 천거로 종사관(從事官)이 되었으며, 이어서 종부시첨정에 임명되었다. 1583년 한성부서윤·한산군수를 거쳐 예조정랑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이듬해 사복시첨정이 된 뒤 성균관사예(成均館司藝)를 거쳐 순창군수로 재직 중 1588년 파직되었다. 1590년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로 다시 등용되었으며, 이듬해 동래부사가 되었으나 서인이 실각하자 곧 파직되어 고향으로 돌아왔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서울이 함락되고 왕이 의주로 파천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그는 각처에서 도망쳐온 관군(官軍)을 모았다. 두 아들 종후(從厚)·인후(因厚)로 하여금 이들을 인솔, 수원에서 왜적과 항전하고 있던 광주목사(廣州牧使) 정윤우(丁允佑)에게 인계하도록 했다. 이어서 전 나주부사 김천일(金千鎰), 전 정언 박광옥(朴光玉)과 의논해 함께 의병을 일으킬 것을 약속하고, 여러 고을에 격문을 돌려 6,000여 명의 의병을 담양에 모아 진용을 편성했다. 여기에서 전라좌도 의병대장에 추대된 그는 종사관에 유팽로(柳彭老)·안영(安瑛)·양대박(楊大樸), 모량유사(募糧有司)에 최상중(崔尙重)·양사형(楊士衡)·양희적(楊希迪)을 각각 임명했다.그리고 전라도 의병군의 결성과 왜적을 격퇴하겠다는 출사표를 양산숙(梁山璹)·곽현(郭玄)으로 하여금 서해를 경유해 조정에 전달하도록 하고, 6월 1일 담양을 출발해 북상을 개시했다. 의병군이 태인에 이르렀을 때, 정윤우에게 관군을 인계하고 돌아온 종후를 만나 그에게 다시 격문을 휴대하고 금구(金溝)·임피(臨陂) 등지에서 병기와 군량을 수집하도록 했고, 또 제주목사 양대수(楊大樹)에게 전마(戰馬)를 보내주도록 요청했다.
6월 13일 전주에 도착해 인후에게 수백 명을 인솔하고 무주·진안 등의 요로에 복병을 배치해, 영남에서 호남으로 침입하는 왜적을 막도록 했다. 22일 전주에서 여산으로 진을 옮겨 이곳에서 종후·인후와 합류하고, 다시 호서·경기·해서 지방에 창의구국(倡義救國)의 격문을 발송했다. 27일 은진에 도달해 왜적의 동태를 살피고 있던 중, 황간·영동 등지에 있는 왜적이 금산을 점령하고 장차 전주를 경유, 호남을 침범할 계획이라는 정보를 입수했다. 이에 곡창인 호남을 왜적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당초의 북상 계획을 변경, 7월 1일 연산(連山)으로 회군했다. 이곳에서 충청도 의병장 조헌(趙憲)에게 서신을 보내어 10일 형강(荊江)을 건너 합세해 금산의 왜적을 공격할 것을 제의한 뒤, 9일 진산을 경유해 금산에 도착, 방어사 곽영(郭嶸)의 관군과 좌·우익으로 진을 편성했다. 이날 의병 중에서 정예 수백 명을 거느리고 적의 본진을 공격했으나, 적의 굳센 저항과 관군의 소극적 태도로 퇴각하고 말았다.
10일 곽영과 합세해 왜적과 대회전을 시도하기로 하고 800여 명의 정예로 선제 공격을 했는데, 왜적은 먼저 약한 관군을 일제히 공격했다. 이에 겁을 낸 관군은 싸울 것을 포기하고 앞을 다투어 패주했으며, 이에 사기가 떨어진 의병군마저 붕괴되고 말았다. 그는 후퇴해 다시 전세를 가다듬어 후일을 기약하자는 주위의 종용을 뿌리치고 “패전장으로 죽음이 있을 뿐이다.”고 하며 물밀듯이 밀려오는 왜적과 대항해 싸우다가 아들 인후와 유팽로·안영 등과 더불어 순절했다.
왜적이 퇴각하기를 기다렸다가 유체를 수렴해 금산 산중에 매장했으며, 10월 화순의 흑토평(黑土坪)에 장사지냈고, 그 뒤 장성의 오동촌(梧桐村)에 이장했다. 어려서부터 행동이 남달리 어른스러워, 백인걸(白仁傑)이 남평현감(南平縣監)으로 있을 때 그를 보고 장차 비범한 인물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고 한다. 뒤에 의정부좌찬성에 추증, 광주의 포충사(褒忠祠),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종용사(從容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배향되었다.
시·글씨·그림에 능했으며, 저서로는 시문집인 ≪제봉집≫, 속집(續集)·유집(遺集), 무등산 기행문인 ≪서석록 瑞石錄≫, 각처에 보낸 격문을 모은 ≪정기록 正氣錄≫이 있다. 시호는 충렬(忠烈)이다.
 
5)김천일(金千鎰, 1537∼1593)
조선 중기의 문신·의병장. 본관은 언양(彦陽). 자는 사중(士重), 호는 건재(健齋). 나주 출신. 할아버지는 주부 윤손(潤孫)이고, 아버지는 진사 언침(彦琛)이며, 어머니는 양성이씨(陽城李氏)로 부위(副尉) 감(諫)의 딸이다. 이항(李恒)의 문인으로, 김인후(金麟厚)·유희춘(柳希春) 등과 교유하였다.
1573년(선조 6) 학행(學行)으로 발탁되어 처음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가 된 뒤 용안현감(龍安縣監)과 강원도·경상도의 도사를 역임하였다. 지평(持平) 때에 소를 올려 시폐를 적극 논란하다가 좌천되어 임실현감이 되었다. 그 뒤 담양부사·한성부서윤·수원부사를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 적의 대군이 북상해 서울이 함락되고 국왕이 서행(西幸)했다는 소식에 접하자 고경명(高敬命)·박광옥(朴光玉)·최경회(崔慶會) 등에게 글을 보내 창의기병(倡義起兵)할 것을 제의하는 한편, 담양에서 고경명 등과도 협의하였다
1593년 4월 왜군이 서울에서 철수하자 이를 추격, 상주를 거쳐 함안에 이르렀다. 이 때 명·일강화가 추진 중인데도 불구하고 남하한 적군의 주력은 경상도 밀양 부근에 집결, 동래·김해 등지의 군사와 합세해 1차 진주싸움의 패배를 설욕하기 위한 진주성 공격을 서두르고 있었다.
이에 6월 14일 300명의 의병을 이끌고 입성하자 여기에 다시 관군과 의병이 모여들었다. 합세한 관군·의병의 주장인 도절제(都節制)가 되어 항전 태세를 갖추었다. 10만에 가까운 적의 대군이 6월 21일부터 29일까지 대공세를 감행하자 아군은 중과부적임에도 분전했으나 끝내 함락되고 말았다. 이에 아들 상건(象乾)과 함께 촉석루에서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사하였다.
1603년(선조 36) 좌찬성에 추증되고, 이어 1618년(광해군 10)에 영의정이 더 내려졌다. 나주의 정렬사(旌烈祠), 진주의 창렬사(彰烈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 태인의 남고서원(南皐書院), 임실의 학정서원(鶴亭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건재집≫이 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6)박상(朴祥, 1474∼153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충주(忠州). 자는 창세(昌世), 호는 눌재(訥齋). 광리(光理)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선천군수 소(蘇)이고,아버지는 진사 지흥(智興)이며, 어머니는 생원 서종하(徐宗夏)의 딸이다.
1496년(연산군 2) 진사가 되고, 1501년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 교서관정자(校書館正字)로 보임받고, 박사를 역임하였다. 승문원교검(承文院校檢)·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병조좌랑을 지내고, 1505년 외직으로 전라도사(全羅都事)를 지냈다. 1506년 중종 초, 사간원헌납이 되어 종친들의 중용(重用)을 반대하다가 왕의 노여움을 사서 하옥되었으나, 태학생(太學生)과 재신(宰臣)들의 상소로 풀려나왔다.
그러나 1년 동안 논쟁이 그치지 않아 전관(銓官)에게 미움을 사서 한산군수로 좌천되었다. 그런데 사헌부가 대간(臺諫)을 외직에 보임하는 것은 옳지 못하다고 논핵(論劾)하여 곧 종묘서영(宗廟署令)·소격서영(昭格署令)으로 옮겼으나, 부모 봉양을 위해 임피현령(臨陂縣令)으로 나아갔다. 3년 만기가 되자 사직하고 광산으로 돌아가 글을 읽으면서 스스로 즐겼다. 1511년(중종 6) 수찬·응교를 거쳐 담양부사로 나아갔다.
1515년 순창군수 김정(金淨)과 함께 상소해 중종반정으로 폐위된 단경왕후 신씨(端敬王后 愼氏)의 복위를 주장하였다. 또 박원종(朴元宗) 등 3훈신(勳臣)이 임금을 협박해 국모를 내쫓은 죄를 바로잡기를 청하다가 중종의 노여움을 사서 남평(南平)의 오림역(烏林驛)으로 유배되었다. 1516년 방면되어, 의빈부도사(儀賓府都事)·장악첨정(掌樂僉正)을 역임, 이듬해 순천부사가 되었으나 그 해 겨울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하였다. 1519년 선공감정(繕工監正) 등을 지냈다. 1521년 상주와 충주의 목사를 지내고, 만기가 되자 사도시부정(司䆃寺副正)이 되었다. 1526년 문과 중시에 장원하고 이듬 해 작은 죄목으로 나주목사로 좌천되었고, 당국자의 미움을 사서 1529년 병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왔다.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성현(成俔)·신광한(申光漢)·황정욱(黃廷彧) 등과 함께 서거정(徐居正) 이후 4가(四家)로 칭송된다. 또한 조광조(趙光祖)는 그의 1515년 단경왕후 신씨 복위 상소가 강상(綱常)을 바로잡은 충언이었다고 극구 칭찬하였다.
저서로는 ≪눌재집≫이 있다. 광주(光州)의 월봉서원(月峰書院)에 제향되었고, 1688년(숙종 1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7)유옥(柳沃, 1487∼151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문화(文化). 자는 계언(啓彦), 호는 석헌(石軒). 면(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인흡(仁洽)이고, 아버지는 순창훈도(淳昌訓導) 문표(文豹)이며, 어머니는 현맹인(玄孟仁)의 딸이다.
고향은 창평이나 할아버지가 사육신의 한 사람인 유성원(柳誠源)과 6촌이었으므로, 화를 면하기 위해 호남으로 이사하였다. 1501년(연산군 7) 생원이 되고, 1507년(중종 2) 식년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해 1509년 홍문관수찬을 거쳐 이듬해 무안현감이 되었다.
이 때 담양부사 박상(朴祥), 순창군수 김정(金淨) 등과 연명으로 단경왕후(端敬王后 : 中宗妃) 신씨(愼氏)의 복위를 청하고, 아울러 신씨를 폐위시킨 훈신(勳臣)들의 죄를 규탄하는 소를 올렸다.
또, 장경왕후(章敬王后 : 中宗의 第一繼妃) 윤씨(尹氏)가 원자를 낳은 지 7일 만에 죽자, 소생이 있는 빈(嬪) 박씨(朴氏)가 정비(正妃)가 될 경우 원자가 위험할 것으로 판단, 박씨가 정비가 되는 것을 반대하는 소를 올렸다. 이에 박상과 김정은 유배되었으나 그는 정광필(鄭光弼)의 도움으로 화를 면하였다.
1515년 사헌부장령, 1517년 함경도평사를 거쳐 이듬해 의정부사인이 되었다. 이 때 경연(經筵)에서 삼대(三代)의 정전제(井田制)대신 우리의 형세에 맞는 한전균전제(限田均田制)의 실시를 주장하였다. 1518년 남곤(南袞)의 미움을 받아 종성부사로 전출되었다.
아버지가 늙도록 아들이 없어 영암의 월출산(月出山)에 기도해 태어난 그는 어려서부터 문장에 뛰어나 신동으로 불렸다. 장성해 문무를 겸비했으나 젊은 나이로 요절해 대신들도 애석해하였다. 1805년(순조 5)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순창의 화산서원(花山書院)에 제향 되었다. 저서로는 ≪석헌집≫이 있다. 시호는 정간(靖簡)이다.
 
8)신공제(申公濟, 1469∼153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고령(高靈). 자는 희인(希仁), 호는 이계(伊溪). 아버지는 여절교위(勵節校尉) 홍(洪)이며, 어머니는 변균(卞鈞)의 딸이다.
1486년(성종 17) 진사가 되고 1495년(연산군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부정자가 되고, 예문관검열·승문원주서를 거쳐 옥당(玉堂:홍문관의 다른 이름)에 들어갔다.
1506년(중종 1) 사간원 헌납과 장령을 지냈고, 1516년 창원부사로 있을 때에는 청렴하고 근면한 수령(守令)으로서 표창을 받았다. 1517년에 홍문관부제학·호조참판·이조판서 등을 역임하였는데, 특히 이조판서로 있을 때는 과거시(科擧試)의 전형을 맡아 사사로움이 조금도 없는 공정한 관리를 하였으며, 1522년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28년 좌참찬(左參贊), 이해 겨울에 호조판서 겸 세자좌부빈객(戶曹判書兼世子左副賓客)을 거쳐, 1536년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지냈다. 그는 순창의 수석을 사랑하여 한 정자를 짓고 스스로 이계주인(伊溪主人)이라 하였는데, 호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초서와 예서에 능하였고 촉체(蜀體)를 잘 썼다. 또한, ≪해동명적 海東名蹟≫이라는 동국명인의 필적을 간행하였다. 글씨는 광주안참판침묘비 (廣州安參判琛墓碑)와 남원윤판서효손묘비(南原尹判書孝孫墓碑)가 남아 있다. 청백리에 피선되었으며, 시호는 정민(貞敏)이다.
 
9)양사형(楊士衡, 1547∼1599)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계평 (季平), 호는 영하정(暎霞亭) 또는 어은(漁隱). 배(培)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공준(公俊)이고, 아버지는 사복시부정(司僕寺副正) 홍(洪)이며, 어머니는 순흥안씨(順興安氏)로 극함(克諴)의 딸이다.
노진(盧禛)·유희춘(柳希春)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1579년(선조 12) 생원시에 합격하였고, 1588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군자감(軍資監)의 봉사(奉事)·직장 (直長) 등을 역임하였다. 1592년 벼슬을 사임하고 남원에 낙향하였는데, 그 해 여름에 왜적이 침범하자 이대윤(李大胤)·최상중(崔尙重) 등과 군량을 모아 금산의 전지로 보냈다. 1594년 윤두수(尹斗壽)가 체찰사로 삼남지방을 순시할 때 그를 참좌하였다.
또 변사정(邊士貞)·정염(丁焰) 등과 의병으로 활동한 공로가 평가되어 병조정랑에 오르고, 이어서 춘추관기사관·경기도사·남평현감(南平縣監)·예조정랑을 거쳐 1599년 영광군수(靈光郡守)로 임지에서 죽었다. 승정원도승지의 증직이 내리고, 원종공신(原從功臣) 2등에 책봉되었으며, 남원 화산사(華山祠)에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어은유집≫이 있다.

1871년(고종 8) 훼철 후 복원이 이루어지지 못했으며 훼철되기 전의 경내 건물로는 현전(賢殿), 신문(神門)과 동·서 협문(夾門), 강당, 전사청(典祀廳), 고사(雇舍) 등이 있었다.
1)신말주선생의십로계첩(申末舟先生의十老契帖)
-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142호(1992.06.20지정)
조선 세종 때의 문신인 신말주 선생의 유물로, 계에 관한 사항을 정리한 첩(帖)이다. 그는 단종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권지정자가 되었고, 세조 때는 형 신숙주가 단종 폐위에 가담함에 따라 벼슬을 사양하고, 순창으로 낙향하였다. 이 곳에서 귀래정이라는 정자를 짓고 산수를 즐기며 은둔생활을 하였다. 말년에는 70세가 넘은 노인 10명과 계회를 맺어 십노계(十老契)라 이름하고, 첩 10개를 만들어 각자 소유하였는데, 그 중에 하나만이 남은 것으로 추정된다. 이 첩은 총 420자로 되어 있는데, 여기에는 계를 맺은 연유, 목적, 성격, 행동 등이 기록되어 있다. 또한 열 명의 노인의 인물도를 그린 후 각 개인의 성품과 사상, 계훈적인 절구시를 기록하였다.

참고-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국가문화유산포털 http://www.heritage.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