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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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옹정서원(甕井書院)
   전라북도 부안군 부안읍 옹중리 387-2
   최생명(崔生命) 최계성(崔繼成) 손홍적(孫弘績) 김석량(金錫良) 최명룡(崔命龍) 최 활(崔 活) 김 단(金 湍) 채달주(蔡達周)
   1694년(숙종 20)
   
   3월 14일
   
옹정서원이 창건된 연대는 1694년(숙종 20)이다. 처음에는 최생명(崔生命)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그 뒤 그의 손자 최계성(崔繼成)의 위패를 1707년(숙종 33) 청계사에 봉안하였던 것을 1714년(숙종 40)에 본 서원으로 이전 봉안하였다. 서원의 건물은 여러 차례 병화로 소실되었으나 1778년(정조 2) 서원의 모든 건물을 중창하고 손홍적(孫弘績), 김석량(金錫良), 최명룡(崔命龍)을 추배하였다. 그 뒤 1835년(헌종 원년) 다시 최활(崔活), 김단(金湍), 채달주(蔡達周)를 추배하였다. 그러나 1865년(고종 2) 대원군의 전국 서원철폐령으로 말미암아 훼철되었다. 이 때 8현의 위패를 매장하고 그 자리에 기념비를 세웠다. 지금은 그 자리에 주초석과 지대석들이 노출되어 있고 비석 1기가 세워져 있다. 매년 3월 14일 8현의 후손들과 이 지방 유림들이 모여 치제를 해오고 있다.

1)주벽-최생명(崔生命)
조선(朝鮮)의 문인. 호는 옹암(甕菴), 문종(文宗)때 입사(入仕)하였으나 학문(學問)에 뜻을 두고 사임(辭任), 영암(靈岩)으로 돌아가 학문에 정진(精進)하였다. 호남(湖南)의 유림(儒林)들이 그의 학문과 덕행(德行)을 칭송(稱頌)하고 부안(扶安)의 옹정서원(甕井書院)에 제향(祭享)하였다.
 
2)최계성(崔繼成)
최계성은 본관이 전주로 호는 처암(處庵), 수손의 아들이며 부안읍 옹정에서 출생하였다. 최필성(崔弼成)의 호는 처헌(處軒), 수손의 아들 계성의 아우, 형제 모두 조광조의 문인이다. 5형제 모두 중종조에 사마시에 올랐다. 모병 종기에 형제가 입으로 빨아 완치케 하였으며 부친이 학질로 병고에 시달릴 때 암동(巖冬)에 박쥐를 잡아 약으로 쓰고 하늘에 자신이 대신하기를 빌고 변을 맛보아 병세를 가늠하였다. 상을 당하여서는 3년 시묘하였다. 뒤에 최계성은 옹정서원에 배향되었다.
 
3)손홍적(孫弘績, 1510∼1549)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언선(彦善). 아버지는 충순위(忠巡衛) 중로(重老)이다. 부안 출신. 1540년(중종 35)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된 뒤 1543년(중종 38)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예문관검열·대교·승정원주서 등을 지냈다. 1548년(명종 3) 사관(史官)으로 있을 때, 이기(李芑) 등의 무고에 의하여 안명세사초사건(安名世史草事件)이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평안도 위원(渭原)에 유배당한 일이 있었다.
 
4)김석량(金錫良)
조선 중기의 유학자 호는 옹촌(甕村), 본관은 부안, 후손의 아들이다. 종형인 김석홍과 더불어 학문이 깊어 그 이름이 널리 알려져 김안국은 부안을 군자의 고을이라 일컬었다. 1516년(중종 11) 사마(司馬)에 들어 조광조의 천거로 현량(賢良)에 들었으나 기묘사화로 조광조 등이 피살되자 벼슬하고 싶은 뜻을 버리고 향리에서 학문에만 전념하였다.
 
5)최명룡(崔命龍, 1567~1620)
조선 중기의 학자로 자는 여윤(汝允), 호는 석계(石溪), 본관은 전주이며, 전주 석계촌(石溪村)에서 출생했다. 단성 현감(丹城縣監)위(渭)의 아들이며, 이정기(李廷麒), 신중경(申重慶)의 문인이다. 12세에 아버지를 여의고 우죽(友竹) 이정기를 찾아가 수학하였다.그 총명함에 우죽이, “최씨 자제가 나를 가르치러 왔다”고 탄복하였다. 그 후 신중경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20세에 부안 변산의 등운사(登雲寺)에 들어가 10년을 기약하고 사자(四子)와 염락제가(濂洛諸家)를 비롯하여 음양, 천문, 지리, 방기, 도교, 불교, 산학 등을 연구하였다. 26세가 되던 해, 뜻밖에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조를 호위하기 위해 변산에서 나왔다.
의주로 향하던 중 파주에서 우계 성혼(牛溪 成渾)을 만났는데, 우계가 그를 보고 “우리의 도를 의지할 곳이 있다”라고 감탄하였다. 사계 김장생(沙溪 金長生)이 익산 군수로 부임하자 그 문하에 나가 사사하였다. 그가 죽자 김장생이 공자가 안자를 잃었을 때의 슬픔에 견주어 만사(輓詞)와 제문을 짓고, 묘갈명(墓碣銘)을 찬(撰)하였는데, 그 제문(祭文)에서 “내가 그대의 스승이 아니라 그대가 나의 스승이었다.”라고 애도하였다.
학문이 넓고 깊었으며, 근래의 연구에 의하면 양명학에도 조예가 깊었다 한다. 문집이 남아 있지 않아 그의 학문과 사상을 자세히 알 수 없다. 대학자였음에 비해 세상에 이름이 덜 알려진 것은 그의 어머니가 정실이 아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대사헌에 추증되었으며, 전주 기린봉 아래의 인봉서원(麟峯書院)과 부안의 옹정서원(甕井書院)에 제향되었다.
 
6)최활(崔活)
자(字)는 준원(濬源) 호(號)는 묵재(默齋) 몸가짐과 마음가짐을 돈독(敦篤)히 하고 특히 성리학(性理學)에 밝았다. 조정(朝廷)에서 누차 벼슬을 주었으나 나아가지 않고 학문연마(學問硏磨)와 후진 양성(後進養成)에 힘썼다. 부안(扶安)의 옹정서원(甕井書院)에 제향(祭享)되었다.
 
7)김단(金湍)
병자호란 때 의창한 선비, 호는 수분와(守分窩) 본관은 부안, 석량의 증손이다. 1624년(인조 2) 사마에 들고, 이괄의 난에 창의하여 모병하여 공을 세웠고, 또 병자호란에 의창하여 려산(礪山)에 이르러 화의 소식을 듣고 통곡 해산하였다. 송준길, 송시열 등과 도의로 교유하였고, 두 선생이 학행으로 천거하여 현감이 되고 선치(善治)하여 구마(廐馬)가 내려졌다.
 
8)채달주(蔡達周, 생몰년 미상)
조선 중기의 효자. 본관은 평강(平康). 자는 달보(達甫). 호는 신재(新齋). 부안(扶安) 출신. 판서 충경(忠敬)의 후손이다.
3세에 아버지를 잃고 편모슬하에서 자랐으나 효성이 지극하였다. 어머니의 가르침이 매우 엄격하였으며, 어머니가 죽자 한 해 동안 호읍(號泣)을 그치지 않았고, 쇠약해진 몸으로 삼년여묘(三年廬墓)를 준행하였다. 그 효행이 조정에까지 알려져 1806년(순조 6)좌랑을 추증 받았으며, 부안의 옹정사(甕井祠)에 배향되었다.

1865년(고종 2) 대원군의 전국 서원철폐령으로 말미암아 훼철되었다. 이 때 8현의 위패를 매장하고 그 자리에 기념비를 세웠다. 지금은 그 자리에 주초석과 지대석들이 노출되어 있고 비석 1기가 세워져 있다.

참고-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부안 21인터넷신문 www.buan21.com
전북향교원우대관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