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호암서원(湖巖書院)
   전라북도 남원시 덕과면 만도리 682-1
   이 서(李 舒) 심구령(沈龜齡) 안 성(安 省) 소 연(蘇 沿) 소산복(蘇山福) 이 당(李 棠)
   정조 13년(1789)
   
   3월 초엿샛날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55호(1984.04.01지정)
이서(李舒)를 주벽으로 하여 심구령(沈龜齡), 안성(安省), 소연(蘇沿), 소산복(蘇山福), 이당(李棠) 등 6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서원이다. 이 서원은 정조 13년(1789)에 지금 있는 자리로 옮기면서 호암서원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고종 5년(1868)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폐쇄되었으나, 1961년에 복원하였다.

1)주벽-이서(李舒, 1332∼1410)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홍주(洪州). 자는 양백(陽伯) 또는 맹양(孟陽), 호는 당옹(戇翁)·송강(松岡). 고려 고종 때 시중(侍中)을 지낸 연수(延壽)의 6세손이며, 아버지는 연경궁제학(延慶宮提學) 기종(起宗)이다. 홍주를 관향으로 한 것은 아버지 때부터이다.
1357년(공민왕 6) 문과에 급제해 여러 벼슬을 거쳐 군부좌랑(軍簿佐郎)에 올랐으나, 세상이 어지럽고 정치가 문란해지자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둔하였다. 1376년(우왕 2) 우헌납에 임명되었으나 노부모의 봉양을 이유로 거절하고, 친상(親喪)을 당하자6년간 여묘(廬墓) 살이를 하였다. 1388년 내부소윤(內府少尹)에 임명되었으나 상이 끝나지 않았다는 이유로 거절하였다. 국가에서는 그의 효행을 높이 기리기 위해 정문을 세워주었다. 이 해 겨울 이성계(李成桂)가 실권을 장악하자 유일인사(遺逸人士)로서 그를 선발해 내서사인(內書舍人)에 제수하였다. 1392년(태조 1) 이성계 추대에 참여해 개국공신 3등에 책록되어 안평군(安平君)에 봉해지고 형조전서(刑曹典書)에 임명되었다. 1394년 사헌부대사헌이 되고, 1396년 신덕왕후(神德王后)가 죽자 3년간 정릉(貞陵)을 수묘(守墓)하였다. 1398년에 참찬문하부사에 오르고, 1400년 태종이 즉위하자 문하시랑찬성사에 이어 우정승으로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다. 이 해 고명사(誥命使)로 명나라에 다녀오고, 이어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가 되었다. 1402년(태종 2) 사임하고, 앞서1398년 왕자의 난 때 상심해 함흥에 가 있던 태조를 중 설오(雪悟)와 함께 안주(安州)에 나가 맞아 귀경하게 했으며, 1404년 다시 우정승이 되었다. 이듬 해 75세의 고령으로 치사(致仕 : 나이가 많아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나는 것 일종의 정년퇴임 같은 것임)했다가 다시 영의정에 올랐고, 기로소에 들어간 뒤 만년을 향리에서 보내다가 죽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2)심구령(沈龜齡, 1350∼1413)
고려 말 조선 초의 무신. 본관은 풍산(豊山). 자는 천석(天錫), 호는 병담(屛潭). 아버지는 전농시사(典農寺事) 승경(承慶)이다. 일찍이 무예훈련에 힘써 솜씨가 인정되자 이방원(李芳遠)을 호종하였다.
1398년(태조 7) 제1차 왕자의 난 때 박원길(朴元吉)·정도전(鄭道傳) 등을 제거하는 데 공을 세웠다. 그 뒤 1400년(정종 2) 제2차 왕자의 난 때에도 상장군(上將軍)으로서 이방원을 호종하여 좌명공신(佐命功臣) 4등에 책록되었고 풍천군(豊川君)에 봉해졌다. 1406년(태종 6) 겸중군동지총제(兼中軍同知摠制)가 되었고 이어서 우군동지총제(右軍同知摠制)에 임명되었다. 당시 남해안 일대에 왜구가 침입하자 조전절제사(助戰節制使)로서 왜구격퇴에 큰 공을 세웠다. 그 뒤 천추사(千秋使)로서 명나라에 다녀왔고 부진무(副鎭撫)·겸동지의흥부사(兼同知義興府事)를 역임하였다. 그런데 1410년 군령과 군기관리의 소홀이라는 혐의로 대간에 의하여 탄핵, 파직되기도 하였으나 국왕의 신임이 두터워 이듬해에는 오히려 지의흥부사로 승진하였다. 이어서 별시위 일번절제사(別侍衛一番節制使)를 역임하였고, 판공안부사(判恭安府事)에 이르렀다. 성품이 강직하고 사어(射御 : 활쏘기와 말타기)에 능하여 일찍부터 태종을 호종하였다. 신분은 비록 미천하였으나 지위가 높아짐에 따라 자신의 직임을 잘 알았으며, 부하들에 대한 통솔력도 매우 뛰어났다. 시호는 정양(靖襄)이다.
 
3)안성(安省, ?∼1421)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초명은 소목(少目). 자는 일삼(日三), 호는 설천(雪泉)·천곡(泉谷). 아버지는 기(器)이다, 고려 우왕 초 진사에 합격하고, 1380년 (우왕 6) 식년문과에 동진사(同進事)로 급제하여 보문각직학사(寶文閣直學士)를 거쳐 상주판관이 되어 청렴한 이름을 떨쳤다.
조선 개국 후, 1393년(태조 2) 청백리에 뽑혀 송경유후(松京留後)에 임명되었을 때, 자신이 대대로 고려에 벼슬한 가문으로서 어찌 다른 사람의 신하가 되어 송경에 가서 조상의 영혼을 대하랴 하고 궁전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며 통곡하니, 태조가 이 사람을 죽이면 후세에 충성하는 선비가 없어진다 하고 죽이려는 좌우를 제지하고 그를 급히 붙들어 내보냈다 한다. 1396년 봉상시소경(奉常寺少卿)으로서 현비(顯妃)의 시호를 잘못 지어 축산(丑山)에 유배되고, 1400년(정종 2) 중승(中丞)을 거쳐 지보주사(知甫州事)가 되었다. 1411년(태종 11) 참지의정부사(參知議政府事)로 정조사(正朝使)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와 강원도도관찰사가 되었으며, 벼슬이 참찬에 이르고 평양백(平壤伯)에 봉해졌다. 뒤에 장수의 창계서원(滄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사간(思簡)이다.
 
4)소연(蘇沿, 1390~ )
아호는 행정(杏亭)이며, 공양왕 2년(1390)에 출생하였다. 재주가 비상하여 신동이라 불렸다고 한다. 노성현감을 지냈다.
 
5)소산복(蘇山福)
호는 매헌(梅軒)이며, 일재 이항의 문인으로 선조 때의 생원이 되었는데 임진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다. 문집이 전한다고 하나 확실하지 않다.
 
6)이당(李棠)
선조 때의 인물로 그의 아호는 죽암(竹庵)이다. 생원과 진사를 거쳐 덕행이 높아 제장으로 받들었다. 병자호란 때 의병을 일으켰으나 화의가 성립되어 통탄해마지 않았다 한다.

서원은 외삼문 강당 내삼문 사우로 구성 되어 있다. 외삼문은 평상문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지붕 위에는 양기와를 얹었다. 벽에는 시멘트를 발랐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의 규모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기둥은 방주를 사용하였다. 평면 구성을 보면 대청은 배치되지 않았고, 모두 방을 설치하였는데 우측의 방에는 미닫이로 칸을 막았으나 필요한 때에는 미닫이를 떼게 되어있다. 각 방과 전면의 퇴 사이에는 두 짝 열 개의 세살문을 달았으며 좌측의 방은 외짝의 세살문으로 드나든다. 우측에서 두 번째의 칸 상부에는 호암서원(湖岩書院 )이라고 쓰인 현판이 있다. 내삼문은 솟을 문으로 되었으며, 지붕에는 양기와를 얹었다. 각 칸마다 벽을 쳐서 칸막이를 하였으며 문은 모두 두 짝 열 개의 널문이다.
사우의 지붕은 맞배지붕이며, 양 박공머리에는 방풍판을 달았다. 규모는 정면이 3칸이며 측면은 한 칸이다. 처마는 전후 겹처마이며 기둥은 모두 두리기둥이다. 공포의 구조는 간단하여 기둥머리에는 주두를 얹어서 들보를 직접 받도록 하였다. 전후면의 창방과 평방 사이에는 굽소로를 배치하였다. 들보 위에는 직접 받도록 하였다. 전후면의 창방과 평방사이에는 굽소로를 배치하였다. 들보 위에는 원형의 대공을 얹어 종마루를 받게 하였다. 전면은 3칸으로 등분하였으며, 각 칸마다 두 짝 열 개의 세살문을 달았다.
유물로는 ≪양대사마실기 梁大司馬實記≫ 1책 등 36종 50여 책이 소장되어 있다.
참고-남원지, 199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문화재청 홈페이지 http://www.cha.g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