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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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창주서원(滄洲書院)
   전라북도 남원시 도통동 315
   노 진(盧 禛)
   1579년(선조 30)
   1600년(선조 33)
   3월 20일
   전라북도문화재자료 제51호(1984.04.01지정)
창주서원은 1579년(선조 12)에 지금의 남원군 금지면에 세웠던 것을 1959년에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처음 서원의 이름은 고룡서원(古龍書院)이었다. 정유재란으로 소실되고 사우(祠宇)만 남아 있다가 1600년(선조 33)에 창주(滄洲)라는 사액을 받고 사액서원이 되면서 창주서원(滄洲書院)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이곳에는 옥계 노진(玉溪 盧禛)의 위패를 주벽으로 하고 있다.

1)주벽-노진(盧禛, 1518∼157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천(豊川). 자는 자응(子膺), 호는 옥계(玉溪)·칙암(則庵). 함양출신. 예조참판 숙동(叔仝)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반(盼)이고, 아버지는 참봉 우명(友明)이며, 어머니는 사성원 권시민(權時敏)의 딸이다.
1537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546년(명종 1) 증광문과에 을과로 급제, 승문원의 천거로 박사가 되고, 전적·예조의 낭관을 거쳐1555년 지례현감(知禮縣監)으로 나갔다. 그곳에서 선정을 베풀어 높은 치성(治聲)을 들었으며 청백리로 뽑혔다. 1558년 필선·부응교가 되고 이듬해 장령·검상·사인·집의·직제학을 지냈다. 1560년 형조참의를 거쳐 도승지가 되었는데, 시골에 계신 늙은 어머니의 봉양을 위하여 외직을 지원하여 담양부사·진주목사를 지냈다. 1567년 이조참의로 있다가 충청도관찰사와 전주부윤이 되어 선정을 베풀었고, 다시 부제학에 임명되어 중앙으로 들어왔다. 1571년(선조 4) 늙은 어머니의 봉양을 위하여 다시 외직으로 나갈 것을 허가받아, 친가와 가까운 곤양(昆陽)의 군수(郡守)가 되었다.
이듬해 대사간·이조참의가 되고 경상도관찰사·대사헌 등을 지냈다. 1575년 예조판서에 올랐으나 사퇴하고 그 뒤 대사헌·이조판서·형조판서·공조판서·예조판서 등의 벼슬에 연배(連拜)되었으나, 모두 병으로 나가지 않았다. 평소에 기대승(奇大升)·노수신(盧守愼)·김인후(金麟厚) 등의 학자들과 도의(道義)로 교유하였다. 효로써 정려(旌閭)가 세워졌고, 남원의 창주서원(滄州書院), 함양의 당주서원(溏州書院)에 제향되었으며, 저서로는 ≪옥계문집≫이 있다.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현재 이 서원에는 사우(祠宇)인 명덕사(明德祠)와 내삼문(內三門), 강당, 고직사(庫直舍)등의 건물이 있다. 명덕사는 낮은 석축위에 세워졌으며, 지붕은 맞배지붕이고, 처마는 겹처마이다. 강당은 서쪽으로부터 방2칸, 대청 2칸, 방 1칸의 순서로 구성되었으며, 정면에는 퇴를 놓았다. 지붕은 팔작지붕이며 처마는 겹처마이다. 사우와 내삼문은 높은 석축담으로 둘려있다. 강당은 근래에 세운 까닭도 있지만 매우 건실하게 지어졌으며, 기둥이 높아 건물 자체가 훨씬 돋보인다.
유물로는 ≪퇴계선생문집부록 退溪先生文集附錄≫ 1책 등 100권의 문헌이 있다.
참고-전라북도문화재대관
문화재청 http://www.cha.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