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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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매계서원(梅溪書院)
   전라북도 남원시 사매면 관풍리 794-6
   이정숙(李正叔) 이 청(李 灇) 이 기(李 祺) 이 주(李 柱) 최 원(崔 薳) 이 도(李 燾) 김유경(金裕慶) 이여재(李如梓)
   1781년(정조 5)
   
   미상
   
1781년(정조 5) 대신리 상신마을에 설립하여 8현을 봉향(奉享)하다가 순조 을해년에 기지(基地)의 저습으로 지금의 오수면 둔기리로 이건(移建)하여 덕계(德溪)로 개칭하였다가 1868년(고종 5)에 철폐 되었던 것을 1992년 남원 유림들이 복설을 의결하여 관풍리 794-6번지에 건립을 착공하여 1993년 4월15일 준공을 하고 매계서원으로 환원하였다.

1)주벽-이정숙(李正叔, ?∼1521)
조선 중기의 종실. 본관은 전주(全州). 세종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의(義)이며, 어머니는 여산송씨(礪山宋氏)로 부사 자강(自剛)의 딸이다. 유년에 시산부정(詩山副正)에 제수, 일찍부터 학문에 진력하여 성취가 있었다.
중종이 즉위하자 정이(程頣)로 자처하면서 정이와 주희(朱熹)가 황제에게 올렸던 글을 왕에게 전하면서 나라를 다스리는 길잡이로 삼을 것을 간청하였다. 이후 조광조(趙光祖)·김식(金湜) 등과 교유하였다.
1515년(중종 10) 순창군수 김정(金淨), 담양부사 박상(朴祥)이 폐비 신씨(愼氏)의 복위를 청한 것으로 인하여 의금부에 하옥되자,강녕부정(江寧副正) 이기(李祺), 숭선부정(嵩善副正) 이총(李灇), 장성부정(長城副正) 이엄(李儼)과 연명으로써 김정·박상을 석방하고 여악(女樂)을 고칠 것 등을 극간하였다. 이후에도 수시로 시사를 진언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 때 관작을 삭탈당하고, 1521년 안처겸(安處謙)의 옥사에 재차 연루되어 처형되었다. 시호는 문민(文愍)이다.
 
2)이총(李灇)
자는 종지(淙之), 호는 마재(磨齋), 시호는 문헌(文憲)이며 덕원군 서(曙)의 아들이다. 이정숙, 조광조 등과 도의로 교유하였으며, 기묘사화에 조광조 일파로 지목되어 유배되어 15년을 적거(謫居)하였으나 독신무민(篤信無悶)하였다. 숙종 대 숭선군(嵩善君)에 봉해지고 영조 때 시호가 내려졌다.
 
3)이기(李祺)
시호는 문경(文景), 영해군 당(寧海君 瑭)의 손자이며, 이정숙의 종제이다. 어려서 학문에 뜻을 두고 벼슬에 뜻이 없었다. 조광조 등과 도의로 깊게 사귀었으며 기묘사화에 연루되어 유배되었다. 정조 대 강녕군(江寧君)에 봉해지고 시호가 내려졌다.
 
4)이주(李柱)
조선 선조 대 공신·의사, 자는 방언(邦彦), 호는 한촌(寒村), 숭선군의 종손이다. 임진왜란 때 왕이 의주로 몽진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창의하여 의병 천여명을 모집하고 가재를 기울여 군량을 마련하여 의주로 달려가 선봉에 서서 많은 공을 세우고 행장소에서 왕을 배알하니 왕의 칭송이 대단하였다. 이어 평양성 탈환에 전공이 많았다. 선조 대 호성군(湖成君)에 봉해졌고 선무일등훈(宣武一等勳)에 책록되었다.
5)최원(崔薳)
조선 인조 때 의사·유학자, 호는 쌍백당(雙栢堂), 본관은 삭녕, 문정공 항의 후예이다. 병자호란에 창의기병(倡義起兵)하였다가 중도에 화의성립의 소식을 듣고 통곡하며 해산하였다. 이 후 조정에서 교수직(敎授職)으로 초빙(招聘)하였으나 불취(不就)하고 유일(遺逸)로 잠광은거(潛光隱居)하였다.
 
6)이도(李燾, 1639∼1713)
자(字)는 재경(載卿), 호(號)는 용산(龍山). 영해군의 7대손이며 충의위(忠義衛) 동영(東英)의 아들이다. 천품이 영특하고 학식(學識)이 온중하고 심오하여 존주대의(尊周大義)에 밝아 <존양록(尊攘錄)>에 기록되었고 계룡산 밑에 있는 그의 서재 용산정사에서 많은 선비들과 의론하면서 비록 초야의 포의한사(布衣寒士)이지만 나라의 공족으로서 우국의 정성이 간절하였다. 1699년(숙종 25)왕명에 의하여 최여천(崔與天)과 함께 <여지승람>을 편수하여 조정(朝廷)에 바쳤으며 <용성지(龍城誌)> 2권을 편집(編輯) 출간하였다. 묘소(墓所)는 전북 남원시 보절면 서치리 산54의 1번지에 있으며 <용산집(龍山集)> 3권이 있다.
 
7)김유경(金裕慶)
조선 숙종 때 관인으로 자는 덕여(德餘), 호는 정재(靜齋)이며, 본관은 경주이다. 학림군 정(鶴林君 程)의 후예이다. 형의 권유로 생원시에 올랐다. 1689년(숙종 15) 趙嗣基가 명성왕후를 헐뜯으니 忠憤을 못이겨 형에게 家事를 부탁하고 도끼를 가지고 상경 명성왕후를 헐뜯은 자를 참수할 것을 요청하였다. 1695년(숙종 21)에 恭陵參奉으로 좌랑에 오르고 숙종 28년 산음현감이 되어 善治하였다.
 
8)이여재(李如梓, 1685∼1763)
자(字)는 계직(季直), 호(號)는 낙재(樂齋). 첨추(僉樞) 후(煦)의 아들이다. 1759년(영조 35)에 진사(進士)에 오르고 영릉참봉을 제수받았다. 판서(判書) 유척기(兪拓基)·좌랑 유일상(柳一相)·지평 한상기(韓尙箕)와 도의교를 맺고 교유하였으며 학자들은 남주(南州)의 부자(夫子) 낙재선생이라 불렀다고 한다. 묘소(墓所)는 전북 남원시 사매면 관풍리 산15의 1번지에 있다.

본당 1동 맞배지붕 12평, 외문 1동 9평, 수직사 1동 12평이 있다.

참고-전북향교원우대관, 1994.
남원시 사매면 홈페이지 http://enamwon.org/
신종우의 인명사전 http://www.shinjongwoo.c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