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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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지음서원(芝蔭書院)
   전라북도 김제시 흥사동 지음리 469
   이 귀(李 貴) 나 쾌(羅 快) 나수눌(羅守訥) 고봉익(高鳳翼) 나처대(羅處大) 나희후(羅喜厚)
   1634년(인조 12)
   
   2월, 8월 중정(中丁)
   
1634년(인조 12)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나쾌(羅快)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경기도 이천에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병자호란으로 소실되자 1752년(영조 28) 김제 지봉(芝峰) 아래로 옮겨 세우고 이귀(李貴)·고봉익(高鳳翼)·나처대(羅處大)를 추가 배향하였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71년(고종 9)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09년 유림에 의하여 제단을 설치하고 향사를 계속해오다가 1911년 유허지(遺墟地)에 복원하고 그 뒤 나수눌(羅守訥)·나희후(羅喜厚)를 추가 배향하였다.

1)주벽-이귀(李貴, 1557∼163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연안(延安). 자는 옥여(玉汝), 호는 묵재(默齋). 세조조의 문신 석형(石亨)의 5대손으로, 대호군 수장(壽長)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 기(夔)이고, 아버지는 증 영의정에 추증된 정화(廷華)이며, 어머니는 안동 권씨로, 청송부사 용(鎔)의 딸이다.
이이(李珥) ‧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해 문명을 떨쳤으며, 1582년(선조 15) 생원이 되었다. 이듬 해 일부 문신들이 이이와 성혼을 공박, 모함해 처지를 위태롭게 만들자 여러 선비들과 함께 논변하는 글을 올려 스승을 구원하였다.
1592년 강릉참봉(康陵參奉)으로 있던 중 왜적의 침입으로 어가(御駕)가 서행(西幸)한다는 소식을 듣고, 제기를 땅에 묻고 능침에 곡읍한 후 물러 나와 의병을 모집해 황정욱(黃廷彧)의 진중으로 갔다가 다시 어가가 주재하는 평양으로 가서 죄를 청하고 방어 대책을 아뢰었다. 이어 이덕형(李德馨) ‧ 이항복(李恒福) 등의 주청으로 삼도소모관(三道召募官)에 임명되어 군사를 모집, 이천으로 가서 세자를 도와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였다. 이듬 해 숙천 행재소로 가서 왕에게 회복 대책을 올려 후한 상을 받고, 다시 삼도선유관(三道宣諭官)에 임명되어 군사 모집과 명나라 군중으로의 군량 수송을 담당하였다.
그는 체찰사 유성룡(柳成龍)을 도와 각 읍으로 순회하며 군졸을 모집하고 양곡을 거두어 개성으로 운반해서 서울 수복전을 크게 도왔다. 그 뒤 장성현감 ‧ 군기시판관(軍器寺判官) ‧ 김제군수를 역임하면서 난후 수습에 힘썼다.
1603년 정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형조좌랑 ‧ 안산군수 ‧ 양재도찰방(良才道察訪) ‧ 배천군수 등을 차례로 지냈고, 1616년(광해군8) 숙천부사로서, 해주목사에게 무고를 받고 수감된 최기(崔沂)를 만난 일로 탄핵을 받아 이천에 유배되었다. 1619년에 풀려나와1622년 평산부사가 되었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개탄하고, 김류(金瑬) ‧ 신경진(申景禛) ‧ 최명길(崔鳴吉) ‧ 김자점(金自點) 및 두 아들 시백(時白) ‧ 시방(時昉) 등과 함께 반정 의거를 준비하였다.
이듬해 3월 광해군을 폐하고 선조의 손자인 능양군 종(綾陽君 倧)을 왕으로 추대, 인조반정에 성공해 김류 ‧ 이서(李曙) ‧ 심기원(沈器遠) ‧ 김자점 ‧ 신경진 ‧ 최명길 ‧ 이흥립(李興立) ‧ 심명세 (沈命世) ‧ 구굉(具宏) 등과 함께 정사공신(靖社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그 뒤 호위대장(扈衛大將) ‧ 이조참판 겸 동지의금부사 ‧ 우참찬 ‧ 대사헌. ‧ 좌찬성 등을 역임하고, 연평부원군(延平府院君)에 봉해졌다. 그 동안 남한산성의 수축, 호패법의 실시, 무사의 양성, 국방 강화 등을 건의해 국력 충진에 힘썼다. 1626년(인조 4) 병조 ‧이조의 판서를 지내고, 이 해에 김장생(金長生)과 함께 인헌왕후(仁獻王后 : 元宗妃)의 상기를 만 2년으로 할 것을 주장하다가 대간의 탄핵으로 사직하였다.
이듬 해 정묘호란 때에는 왕을 강화도에 호종해 최명길과 함께 화의를 주장하다가 다시 탄핵을 받았다. 당쟁이 치열하고 명.청 관계의 외교가 복잡한 시기에 나라를 위해 크게 공헌하였다. 저서로는 ≪묵재일기≫ 3권이 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인조 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충정(忠定)이다.
 
2)나쾌(羅快, 1546∼1632)
나주인으로 호는 주은(酒隱)이다. 그는 경기도에서 태어났으며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선조 8년(1575)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광해군 7년(1615) 인목대비가 서궁에 유폐되자 그는 경기도 이천으로 병거(屛居)하였으며 1618년 (광해군 10년)에는 남원(南原)으로 옮겼다가 다시 1622년(광해군 14년)에 김제로 전거(轉居)하였다. 여기서 그는 후진을 양성하면서 여생을 보냈다. 세상을 떠난 뒤 좌승지 겸경연참찬관(左承旨 兼經筵參贊官)에 증직되었다.
 
3)나수눌(羅守訥)
호는 산정(山亭)이다. 이이의 문하에서 수학(修學)하고 관직에 나아갔으나 광해군의 난정(亂政)에 실망하여 관직에서 물려나 후학 양성에 전념하였다. 임진왜란시 功이 있어 선무랑(宣務郞) 주부(主簿)를 지내다.
 
4)고봉익(高鳳翼)
조선 후기의 의사(義士)이다. 자는 희안(希顏), 호는 취죽헌(翠竹軒), 본관은 제주, 유즙(柳楫), 조성립(趙成立), 이정상(李廷祥)과 도학(道學)으로 교유(交遊)가 있었고 인조대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 때 창의하여 공이 있었으며 병자호란 때에서 창의하여 나아갔는데 화의가 성립되었음을 듣고 북향 통곡하였다. 1756년(영조 32) 장락원정(掌樂院正)에 증직되었다.
 
5)나처대(羅處大)
조선후기 유학자, 자는 대여(大汝), 호는 희음재(希音齋), 본관은 나주, 낙천와 중우(樂天窩 仲佑)의 후손, 김제 장신리 출생이다. 16세 때 屛溪 윤봉구의 문하에서 수학할 때 스승으로부터 희음재라는 호를 얻었다. 효우학행(孝友學行)으로 여러 차례 천거 되어1779년(정조 3)에 온릉참봉(溫陵參奉)이 되었고 그 뒤 자문감역·선공봉사(紫門監役·繕工奉事) 등을 역임하였다. 말년에 지병으로 귀향하여 후진양성이 진력하였다.
 
6)나희후(羅喜厚)
조선후기 유학자, 자는 재원(載元), 호는 근구재(勤懼齋), 본관은 나주이다. 백부 처대(處大)에게 수학, 성담 송환기(性潭 宋煥箕)의 문인이다. 근구재(勤懼齋)라는 호는 스승 성담에게서 받은 호이다. 독학역행(篤學力行)하고 매사에 신중히 판별하니 배우고자 하여 모여드는 사람이 많았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앙덕사(仰德祠), 3칸의 훈화문(薰化門), 4칸의 혜학당(惠學堂), 대문 등이 있다. 사우(祠宇)인 앙덕사에는 나쾌, 이귀, 고봉익, 나처대, 나수눌, 나희후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으며, 훈화문은 내신문(內神門)의 명칭이다. 혜학당은 서원의 강당으로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참고-김제문화원,참고-김제문화원김제의 숨결-김제시편, 1994.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북향교원우대관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