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용암서원(龍巖書院)
   전라북도 김제시 교동 38-2
   조 간(趙 簡) 이계맹(李繼孟) 나안세(羅安世) 윤 추(尹 推) 이세필(李世弼) 나응삼(羅應參) 조윤침(趙潤琛)
   1575년(선조 8)
   
   2월 중정(中丁)
   
1575년(선조 8)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조간(趙簡)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후 이계맹(李繼孟),나안세(羅安世)를 추가 배향하였다.
1712년(숙종 38) 윤추(尹推), 이세필(李世弼), 나응삼(羅應參)을 추가 배향하였으며, 그 뒤 조윤침(趙潤琛)을 모셔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왔다.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으나 유림에 의하여 유허지(遺墟地)에 제단을 마련하고 제향을 계속해오다가 1911년에 복원하였다.

1)주벽-조간(趙簡, 생몰년 미상)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김제(金堤). 1279년(충렬왕 5) 문과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서적점녹사(書籍店錄事)에 보임되었고, 이듬해 왕이 문신들에게 시부(詩賦)를 시험할 때 또 수석을 차지하였으므로 황패(黃牌)를 받고 내시(內侍)에 소속되었다.
1288년에 국학직강(國學直講)으로 왕명에 의하여 새로운 악곡을 작곡하기도 하였다. 벼슬이 점차 올라 보궐(補闕)이 되었을 때 아버지의 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하자, 왕이 이를 가상하게 여겨 기거주(起居注)로 특진시켰고, 다시 첨의사인(僉議舍人)으로서 경상안렴사(慶尙按廉使)에 보임되었다.
1298년에는 좌사의(左司議)로 과거를 주관한 바 있고, 1300년 좌부승지로서 동지공거(同知貢擧 : 부고시관)가 되어 진사를 뽑았다. 그 뒤 좌간의·좌승지를 거쳐 우상시권수밀직부사(右常侍權授密直副使)에 올랐다.
충선왕 때 형조시랑우간의대부(刑曹侍郎右諫議大夫)를 거쳐 밀직부사가 되었으며, 충숙왕 때 검교첨의평리(檢校僉議評理)를 역임한 뒤 찬성사에 올라 별세하였다. 시문에 뛰어나 조선 영조 때 유광익(柳光翼)의 ≪풍암집화 風巖輯話≫에도 수록되어 있다. 시호는 문양(文良)이다.
 
2)이계맹(李繼孟, 1458∼152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전의(全義). 자는 희순(希醇), 호는 묵곡(墨谷) 또는 묵암(墨巖). 태사(太師) 도(棹)의 후손이며, 부여감무 의(宜)의 증손으로, 아버지는 영(潁)이며, 어머니는 생원 채소명(蔡紹明)의 딸이다.
1483년(성종 14) 진사·생원시에 합격했으며, 1489년 식년 문과에 갑과로 급제해 설서·검교·정언·집의·좌승지 등을 지냈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라는 죄목으로 영광에 유배되었다. 그러나 조사 결과 김종직이 전라도관찰사로 있을 때 유생을 모아 치른 시험에서 성적이 뛰어나 종이와 붓을 받았을 뿐 사제 관계는 아님이 판명되어 석방되었다.
오랫동안 야인으로 있다가 1503년 장령이 되었고, 전한을 거쳐 좌부승지가 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이 일어나자 대사헌으로 승진했으나 이듬 해 박경(朴耕)의 옥사로 진도에 유배되었다. 곧 억울하게 연루되었음이 밝혀져 풀려나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509년 경기도관찰사에 임명되고 이듬 해 성절사로 중국에 다녀온 뒤 평안도관찰사를 비롯해 호조·형조·예조판서를 역임하였다. 1517년 주청사(奏請使)로 중국에 가서 ≪대명회전 大明會典≫에 이성계(李成桂)가 이인임(李仁任)의 아들로 잘못 기록된 것을 발견하고 보고하였다. 이어 좌찬성·병조판서 겸 지경연사(兵曹判書兼知經筵事)를 거쳤다.
1519년 기묘사화(己卯士禍) 때 사류(士類)들에 대한 처리가 지나치자, 스스로 논의에 맞지 않다고 여겨 김제(金堤)에 있는 농막으로 퇴거하였다. 성품이 강직해 옳고 그름에 명백한 태도를 취했고 군자다운 태도가 있었다 한다. 전주의 서산사우(西山祠宇)와 김제의 용암서원(龍巖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평(文平)이다.
 
3)나안세(羅安世)
조선 초기의 유학자이며 효자이다. 자는 덕여(德輿), 호는 건계(建溪), 본관은 나주이며 상장군 나부(羅富)의 후손이다. 김제 입천면 호포(狐浦)에서 출생하여 1507년(중종 2)에 사마에 올랐고 효성으로 널리 알려졌다.
 
4)나응삼(羅應參)
조선 전기 유학자이며 효자이다. 자는 중장(仲章) 호는 구산(龜山)·이석당(怡夕堂)으로 나안세의 아들이다. 이계맹을 사사(師事)했으며 효성이 지극하고 학문이 독실하여 임금으로부터 구산처사라는 호를 받았으며 병풍에 그려 찬양했다. 김일손, 이계맹, 김정국 등과 도의로 교류가 깊었다. 나씨 八孝의 한 사람이다.
 
5)윤추(尹推)
조선후기 청백리, 호는 농은(農隱), 본관은 파평, 1682년(숙종 8) 회덕현감, 1686년(숙종 12) 정산현감, 1688년(숙종 14) 석성현감, 1694년(숙종 20) 용담현령, 1697년(숙종 23) 김제군수, 1707년(숙종 32) 사헌부장령 등을 지냈다. 천성이 검소하여 옷을 적게 입었으며 옷이 못 입게 되어서야 새로 짓게 하였다. 아침으론 죽(粥)을 먹었으며 점심에 밥 한 그릇을 먹고 저녁은 먹지 않았다. 관리로 있으면서도 똑같이 하고 다섯 고을의 수령으로 있을 때 간검청덕(簡儉淸德)하여 선치(善治)하였다.
 
6)이세필(李世弼, 1642∼1718)
조선 후기의 학자 문신.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군보(君輔), 호는 구천(龜川). 항복(恒福)의 증손이며, 이조참판 시술(時術)의 아들이다.
송시열이 삭직 당하자 그를 적극 옹호하였고 송시열의 원통함을 호소하다가 영광에 유배되어 5년이나 있는 동안 퇴계집을 읽고 느낀바 있었다. 1680년 학행으로 창릉참봉에 제수되었고 이어 형조좌량 삭녕군수, 김제군수, 형조참판을 제수받았다.
대학(大學)을 깊이 연구하였고, 특히 경술을 논한것과 예에 관하여 논답한 것 등 20여권이 있으며, 악원고사(樂院故事) 1책이 있다.
호조판서 태좌(台佐)의 아버지로 이조판서와 의정부좌찬성에 추증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7)조윤침(趙潤琛)
조선 전기의 유학자, 자는 가헌(可獻)이며 호는 백천당(百千堂), 본관은 김제, 공조참판 원우(元祐)의 아들이다. 사람을 대하되 성과 예를 다했으며 한 치도 예의범절에 어긋남이 없어 중종 때 한성서윤으로 불렀으나 당쟁에 염증을 느껴 나아가지 않고 오직 학문과 도학에 열중하면서 후학 육성에 진력하였다.

경내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신문(神門), 3칸의 강당, 대문 등이 있다. 사우에는 조간, 이계맹, 나안세, 윤추, 이세필, 나응삼, 조윤침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참고-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북향교원우대관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