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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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화동서원(華東書院)
   전라북도 고창군 대산면 매산리 교동 743-1
   김양감(金良鑑) 김인우(金仁雨) 김승길(金承吉) 김오행(金五行)
   1957년
   
   (음력) 3월 2일 오전 11시
   
화동서원은 광산김씨의 사우(祠宇)로 원래 1796년(정조 20) 시조(始祖) 신라왕자(新羅王子) 흥광(興光)의 유허(遺墟)인 전라남도 담양군 대전면 평장리(현 광주광역시 평장동)에 종사당(宗祠堂)이라 이름하고 김양감(金良鑑)을 봉안 향사하다가 조령으로 훼철(毁撤) 되었다. 김승길(金承吉), 김오행(金五行)은 장성 경현사에 배향 되었다가 일제의 강압으로 사우가 훼철되었다가 (丁酉)1957년에 현 위치에 사우(祠宇)를 창건하고 김양감, 김인우, 김승길, 김오행을 향사하고 있다.

1)주벽-김양감(金良鑑)
고려 문종 때 학자, 문신 시호(諡號)는 문안(文安). 1051년(고려 문종 5년) 문과급제(文科及第)하여 수태보(守太保) 문하시중(門下侍中) 감수국사(監修國史)에 올랐다. 1074년(문종 28) 사신으로 송나라에 갔을 때, 정자(程子) 문하(門下)에서 넓은 학문(學問)과 밝은 예문(禮文)을 배웠으며 태묘(太廟)와 태학(太學)의 제도(制度)를 본뜨고 경(經)과 전(傳)을 모아 가지고 돌아와 성현(聖賢)의 연원(淵源)을 계승(繼承)하는데 힘썼다. 또 자신의 집에 공자(孔子)의 사당(祠堂)을 세워 춘추(春秋)로 봉향(奉享)했으니 우리나라 문묘(文廟)의 제도(制度)가 이때부터 창시(創始) 되었다고 한다.
○祝文ː 倡明道學 牖我東方 名垂竹帛 功及全邦 玆値春季 宜我精禋 謹以 牲幣醴齊 粢盛庻品 式陳明薦 尙 饗
 
2)김인우(金仁雨) 高麗忠肅王(己巳)1329년-?
고려말 문신 김양감(金良鑑)의 11대손 고려말에 봉익대부(奉翊大夫) 전리판서(典理判書)와 밀직부사(密直副使)를 역임하였다. 1361년(공민왕 10) 홍건적(紅巾賊)의 난(亂)을 평정한 공(功)으로 호종일등공신(扈從一等功臣)에 책훈(策勳)되었다. 뒤에 후진양성에 주력하였다.
○祝文ː 扈從輸忠 功存宗祊 分符爲守 德被湖鄕 玆値 以下 上同
 
3)김승길(金承吉)
고려말 문신 호는 사은(沙隱). 인우(仁雨)의 아들. 고려 공민왕 때에 함종현령(咸從縣令)이 되었다. 일찍이 이색(李穡), 정몽주(鄭夢周), 길재(吉再) 등과 도의(道義)로 사귀다가 고려가 운이 다했음을 예감(豫感)하고 아버지와 함께 장사(長沙) 고을로 내려와 은거(隱居)하였다. 정몽주의 선죽교 참변을 듣고 탄식하기를 ‘나라가 위태로와도 구원하지 못하니 이는 불충(不忠)이요 친구가 의리를 지키다가 죽음을 당했어도 조상(弔喪)을 못하니 이는 무신(無信)이라 불충(不忠)하고 무신(無信)한 사람이 어찌 천지간(天地間)에 서 있겠는가?’ 하고 이어 아들들을 훈계하기를 ‘너희들도 마음가짐을 이 아비의 뜻에 따르라’ 하고 집을 떠난 뒤 간 곳을 알지 못하였는데‘ 전하기를 조공(曺公), 임공(林公), 맹공(孟公)과 함께 불속에 뛰어들어 순절하였다 한다.
○祝文ː 忠貫日月 義秉春秋 規圓矩方 繩直準平 玆値 以下 上同
 
4)김오행(金五行)
고려말 조선초 학자 호는 매은(梅隱). 승길(承吉)의 아들. 고려가 망한 뒤 초야(草野)에서 문을 굳게 닫고 학문만을 강구(講究)하여 조정에서 군기시정(軍器寺正) 등으로 여러 번 불렀으나 유훈(遺訓)을 받들어 고려유민(高麗遺民)으로 자처(自處)하고 종신(終身)토록 벼슬길에 나가지 아니하고 덕(德)을 숨기고 절의(節義)를 지키다가 생(生)을 마쳤다. 사후에 조정에서 그 절의(節義)를 가상히 여겨 특히 국지사(國地師)를 보내 예장(禮葬) 하였다.
○祝文ː守訓撣誠 罔僕盡節 百世羹墻 同德享腏 玆値 以下 上同

경내(境內)의 건물로는 사우(祠宇)3間은 사선생(四先生)의 위패(位牌)가 봉안(奉安) 되었고 내삼문(內山門) 3間, 강당 정모재(靖摹齋)5間, 치경재(致敬齋) 3間, 명성재(明誠齋)5間, 진수당(進修堂)3間, 외삼문(山仰門) 3間으로 되어있다.
1.화동서원(華東書院) 묘정비(廟庭碑)
전라북도 고창군 향토문화유산 제5호 지정(2004년6월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