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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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구연서원(龜淵書院)
   경상남도 거창군 위천면 황산리 769
   신 권(愼 權), 성팽년(成彭年), 신수이(愼守彛)
   1694년(숙종 20)
   
   3월, 9월 말정(末丁)
   거창구연서원관수루-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422호(2005.01.13지정)
1694년(숙종 20)에 지방 유림이 신권(愼權)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하여 신권이 제자를 가르치던 구주서당(龜州書堂) 자리에 서원을 창건하여 성팽년(成彭年)과 같이 위패를 모셨다. 그 뒤  1808년 신수이(愼守彛)를 추가 배향하여 선현 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에 훼철되었다가 1990년 3월에 복설하였으며. 이곳에는 신권의 사적비와 신권을 위한 산고수장비(山高水長碑)와 성팽년의 석곡성선생유적비(石谷成先生遺蹟碑), 신수이의 황고신선생유적비(黃皐申先生遺蹟碑), 열녀, 효자 정려각 등이 많고, 관수루가 서원의 문루로 서있다.

1)주벽-신권(愼權, 1501~1573)
조선 전기의 문인으로 호는 요수(樂水)이며 안음출신이다. 임득번(林得蕃)의 사위로 임훈(林薰)과 더불어 학문을 쌓았다. 선생은 천성이 효성스럽고 덕이 많았다. 또 학문에 뜻이 깊어 널리 성현을 찾아 배웠다. 과거 공부를 하였으나 중앙의 회시(會試)에는 뜻을 이루지 못해 관직에는 진출하지 못하였다. 평생에 소학(小學)을 중요시하여 그 문도를 가르침에 반드시 소학으로 우선하였다. 후진들에게는 퇴계와 일두선생을 종사(宗師)로 삼으라고 가르쳤다. 공이 야담(夜潭)에 갈 때 천석(泉石)의 절승이 있어 그 귀에 집을 짓고 요수(樂水)라고 편액을 하고 때때로 처형제인 임훈과 이정(李楨)이 모여 여러 날을 강의하며 토론하고 혹은 시를 짓고 소요하다가 세상을 마치니 학자들이 일컫기를 요수선생이라고 하였다 한다.
 
2)성팽년(成彭年, 1540~159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이옹(頤翁), 호는 석곡(石谷). 안음(安陰) 출신. 아버지는 교위(校尉) 한량(漢良)이다. 임훈(林薰)의 문인이다. 1564년(명종 19)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유생으로 있었다. 그러던 중 1569년(선조 2) 아버지가 죽자 학업을 그만두고 오직 어머니에게 효성을 다하였다. 효행으로 천거받아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김면(金沔)이 고령·거창·현풍 등 경상도지역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이 때 정유명(鄭惟明) 등과 함께 안음에서 기병유사(起兵有司)로 창의문(倡義文)을 발통하는 등 김면의 참모가 되어 의병활동을 하였다. 시문과 글씨에 뛰어났고, 의약(醫藥)·복서(卜筮)·산경(山經)·지지(地誌) 등 유학 이외의 분야도 두루 섭렵하였다. 지평에 추증되고, 안의(安義)의 구연사(龜淵祠)에 제향 되었으며, 저서로는 문집인 ≪석곡집≫이 있다.
 
3)신수이(愼守彛, 1688~1768)
자는 군서(君叙)이며 호는 황고(黃皐)이다. 도백(道伯)이 선생의 학문이 독실하고 효행이 극진함을 수차 조정에 보고하여 동몽교관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셋째 아들 인명(認明)이 한림원의 시종관이 된 은전으로 통정대부의 품계에 오르고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가 되었다. 경기도 용인의 한천(寒泉)으로 도암 이재를 찾아 뵙고 몇 달 동안 같이 지내고 제자가 되었다.

건물은 문루인 관수루와 강당, 사당, 전사청, 관리사로 구성되어 있다. 관수루와 강당, 그리고 사당인 구연사를 직렬배치하여 담장을 둘렀다. 뜰에는 구연서원 사적비가 있고 요수 신권을 기려서 세운 ‘산고수장비’, 그리고 '석곡선생유적비' ‘황고신선생사적비’ 등이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로 전·후면에 퇴칸을 둔 전·후퇴집이다. 실의 배열은 가운데 꾸민 2칸의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 칸에 정면 1칸의 방을 들인 평면형식이다.

 구연서원 강당 중수기 역문(龜淵書院講堂重修記 譯文)
강당은 구연서원의 강학하는 곳이니 숙묘갑술에 창건하였다가 기해(己亥)에 옮겼고 갑신년에 중수를 하였으니 이번까지 네 차례다. 집의 뒤쪽은 덕유산의 낙맥으로 송계와 영취를 거쳐 그 밑에는 여러 개의 시내와 재가 있다. 성천이 남령에서 발원하여 굽이굽이 흘러서 이곳에 이르러 평탄한 터를 이루니 형태가 반달 같은 황강의 서쪽 언덕이다. 본래 안음은 경치 좋은 곳으로 널리 이름이 나 있으나 화림(花林) 심진(尋眞) 원학(猿鶴) 삼동 중 수석이 수려하고 연하(烟霞)가 아름답기로 원학동이 제일이다. 남쪽 삼산(바래기)으로부터 북쪽 사선대에 이르기까지 기암괴석과 맑은 물의 급한 여울이 천태만상으로 한결같이 큰 장관을 이루었으므로 송동춘당(宋同春堂)이 제일동이라 명했고, 퇴계(退溪)는 수승대(搜勝臺)라 고쳐 불렀다. 이 대의 이름이 금강(金剛) 화양(華陽)과 함께 해동(海東)의 명승으로 앞 다투게 되어 삼한 때부터 오늘날에 이르도록 이름난 어진이며 큰 선비 한인묵객들이 끊임없이 연이서 사면(四面)에 틈이 없이 글자를 새겼다.
바위가 신기하게 거북과도 같고 용마와도 같아서 위에는 축단을 쌓고 아래는 굴집이 있으며 굴집 앞에 장주갑(藏酒岬)이 있어 그 모양이 소라같이 깊어서 두어 말 술을 간직할 수 있고 바로 앞에 깊이를 헤아릴 수 없는 구연이 있으며 구연의 좌우상하가 모두 반석으로 면적이 꽤 넓다. 그 사이 구연교가 있고 다리 아래에 약어담이 있어 비가 내리면 물고기들이 물 밖 반석에까지 뛰어 오른다. 구연의 양암은 용의 따바리(똬리) 같은데 이곳이 나의 선조 요수선생께서 노닐던 요수정이다. 정자의 아래쪽 야담(夜潭) 위에 옛날 있었던 정사가 야천선조의 정사로 여러 생도들이 강마하던 곳이며 수승대 바위아래 한쪽 도서(섬솔)의 노송은 황고선생이 손수 심었고 섬솔의 동쪽 두 바위 사이에 관수루(觀水樓)가 있으니 곧 서원의 문루이다. 동편에는 풍우대가 있고 서쪽에는 욕기암이 있으며 영귀정(詠歸亭)이 있고 남으로는 척수대(滌愁臺)가 있으니 이 모두가 어우러져 서원을 돕고 있다. 사우는 비록 허물어 졌어도 강당은 아직 있으니 향사의 예를 곧 회복할 수 있으리라.
애석하구나! 수호를 제대로 하지 못해 이루었다. 허물어짐이 여러 번이다. 재작년인 을유년 겨울에 당한 화재는 대단한 축격이 아닐 수 없다. 요수선생을 편히 모시고 강학하던 곳을 잡초에 묻어둘 수는 없는 일이라 후손들이 모아 재건을 다짐하였으니 이듬해 여름에 준공을 보았다. 새로 지은 강당이 나는 것 같이 환연하게 새롭고 창창 밝고 정결함에 달빛이 더해주며 방회람 빛이 나고 숲 바람이 시원하네. 노지영광(魯之靈光) 송지백록(宋之白鹿) 어찌 이에 더 하리… 대대로 뒤따르는 사람들이여 여기서 강학하여 요수선생의 도학을 체득하여 독신호학 할 것이며 춘추향천에는 재명성복으로 반드시 옆에 계신다는 정성으로 조금도 소홀함이 없이 길이 보전할 것이다. 무자 춘삼월 갑자일에 11대손 종립(宗立)이 근지하였다.

 


구연서원 중수기 역문
안의의 구연동은 산수의 승(勝)함이 영남의 제일이다. 그 중에 한 바위가 있어 형상이 엎드린 거북같이 수중에 일어나니 위에 백여 인이 앉을 만하고 수 십주의 노송이 일산을 이루니 대개 본래 신라백제 시대에 사신들이 상송(相送)하던 곳으로 수송대(愁送臺)라 전해왔다. 이조 중종 년간에 우리 종선조 요수선생이 정자를 대상에 짓고 서재를 정 옆에 쌓아서 산수를 관령하여 도를 강하고 학문을 일으키다 퇴계선생과 동경으로 정계가 친밀하셨다. 퇴계께서 그 대명이 아담치 못함을 험의하여 수승으로 고치고 한 율시를 남기시니 대가 이에 더욱 유명했다. 선생이 몰하심에 고을 인사들이 그 덕을 추모하여 사우를 대의동에 지어 구연서원이라 하고 석곡 성선생과 같이 배행하니 요수선생과 한 마을에 사시면서 강질을 많이 하고 충효가 또한 지극하니 때는 숙종갑술이라 그 후 순조무진에 황고 신선생 수이를 배행하니 요수선생의 오대 손으로 덕학이 높아 도암 이문정공의 고제다. 이에 원세가 향방에 높아 많은 선비들이 그 글을 읽고 그 도를 행하여 위연한 교화를 일으켜 추노의 방으로 칭했더니 불행이도 무진의 혼철을 면치 못하니 막중한 예의 장소가 풀이 우거지고 선비가 의귀할 곳을 잃어 경을 강하지 못하고 예교가 행하지 못하여 풍속이 무무하여 구제할 수가 없으니 이겨 탄식을 다할 수 없다. 다행이도 고종 후 재무진에 복설의 사론이 대발하여 기사에 시작하여 몇 달이 못 되어 사우가 완공되니 후손 인범(寅範)이 주관하고 태범(泰範)이 또한 많은 조력으로 명년경오에 향도의 사림이 모아 예성을 하니 이에 산이 더욱 높고 물이 더욱 깊어 운물이 모습을 바꾸고 산천이 광채가 나서 거의 가히 삼선생의 영영을 위로하고 당년의 유화를 흥기할 만한 사실의 기문이 없을 수 없다. 인범 훈범(寅範 薰範)이 나의 글을 청하니 나 또한 이 일에 참여한바 있어 감히 사양치 못하고 약간 그 시말을 기술하고 삼선생의 전현을 잇고 후학에 공이 있음은 전인들의 문자에 가추우고 다 문집과 실기가 있어 가히 상고하여 알 수 있음으로 더 쓰지 않는다.
종후손 사범(思範) 근기
1)거창구연서원관수루(居昌龜淵書院觀水樓)
-경상남도유형문화재 422호(2005.01.13지정)
관수루는 서원의 문루로 1740년 창건되었으며 자연암반을 활용하고 틀어진 재목을 하부기둥으로 사용하는 등 자연과 조화를 이루고 있으며 그 형태 또한 대단히 아름답다.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중층 누각 건물로 암반 사이에 조성된 기단 위에 자연석의 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웠다. 기둥은 모두 원기둥을 사용하였고 기둥 바깥쪽의 네 모퉁이에는 적절하게 높이를 조절한 활주를 세웠다. 누하부 정면에 출입을 위한 문을 달았으며 나머지 공간은 모두 개방하였다. 상층의 바닥에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주변으로 계자난간을 둘렀다.
가구는 5량으로 대들보 위에 포대공을 올려 종보를 받고 다시 종보 위에서 상부에 소로를 끼운 사다리꼴의 판대공으로 종도리를 받게 하였다. 좌우측면에는 충량으로 가구를 구성하였는데 끝단을 용머리로 장식하였다. 기둥머리는 초익공 형식을 하고 있으며 창방과 처마도리 장혀 사이에는 소로를 끼워 장식하였다. 겹처마에 팔작지붕 형식이며 처마앙곡과 기와의 와곡을 크게 하였다.

 수정 : 구산서원 도유사 신석범 
참고-거창군청홈페이지 http://tour.gcgn.go.kr
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