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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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성천서원(星川書院)
   경상남도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
   송준길(宋浚吉)
   1703년(숙종 21년)
   
   매년 음력 4월 15일
   
동춘당 송준길은 율곡과 사계의 문인으로 학문에 뛰어나서 문묘에 배향되었는데, 병자호란 뒤 북상면 월성리에 와서 초당을 짓고 거처하였으며 후인들이 성천서원을 세워서 증수 하였다. 그가 은거한 곳은 사선대로 이 곳은 네 신선이 내려와 바둑을 두었다은 전설이 있으며 송기 혹은 송대라고도 불렸다.
동춘당 송준길은 인조 14년(1636) 6월23일에 김상용(金尙容)의 천거로 예산현감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인조실록》. 그해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안음으로 피병(避兵)하고 그곳의 산이 높고 물이 맑은 것을 사랑하여 1년을 살다가 비로소 향리로 귀환하여 학도들을 가르쳤다. "丙子…是冬 避兵至安陰 愛其山高水淸 居一年 始還鄕里 學徒日衆" 《同春堂集 송시열이 지은 墓誌文》. 안음의 어디에서 살았을까? 『안의현읍지』 방리(坊里) 조에 보면 북상면(北上面)이 있고 그 소속 촌에 "월성(月星);문정공 송준길이 일찍이 우거하였다."라고 하였고 서상면(西上面)이 있는데 그 소속 촌에 "노천(蘆川);문정공 송준길이 잠시 우거하였다."라고 하였다. 월성은 현재 거창군 북상면 월성리이고 그곳 내계마을에는 송준길이 은거했던 송여산기(宋礪山基)에 다시 세운 월성초당이 남아 있고, 월성리 월성마을에서 황점(黃店)마을 가는 중간 월성1교 옆 길가에는 사선대(四仙臺)가 있는데 바위 위에 소나무가 있어서 송대(松臺)라 하기도 한 송준길의 유적이다.
 
병자호란 12월 청병 침입
정축 1637 인조15년 1월 동춘당 송준길 화림동 노계촌(蘆谿邨: 함양군 서상면 대남리 대로, 소로, 노상마을)에 피난, 우거
2월 남한산성 항복, 월성촌(月城邨)으로 이거
무인 1638 1월 사산(沙山,공주 사한리)으로 귀환
5년 뒤 송촌(宋邨:대전시)으로 귀환
효종(1649~1959)초 문의현 검호(黔湖)에 보만정 건립

계미 1703, 숙종29년 성천서원 건립
임술년간 1742, 영조18년 안음현감 조영석이 안의향교 옆 1백보 지역으로 이건
기묘 1759, 영조35년 6월(연보에는 5월) 동춘당의 후손 역천 송명흠(당시 55세)이 성천서원과 월성초당 터를 방문하고 향교 옆에 있는 것은 무의미하므로 초당터로 서원을 이건하자고 주장. <기월성고사>를 짓다. <月淵巖 次贈全斯文允錫>
 
월성유허 서시경조재청종인 月城遺墟 書示景祖載淸宗人
오조유서지 吾祖幽棲地
황량난부심 荒凉難復尋
호위하성후 胡爲下城後
우차입산심 又此入山深
상상채미적 想像採薇跡
분명도해심 分明蹈海心
수이운곡묘 誰移雲谷廟
대의게비음 大義揭碑陰
 
갑신 1764, 영조40년 10월 역천 60세 가야산과 덕유산 유람. 안의삼동을 유람하고 성천서원 참배, 지리산 용유담 유람하고 군자사에 숙박. <劉子精彦一追至智異山後 爲誦其送友詩求和 戱作禪語以答之>
정해 1767,영조43년 3월 역천 63세 거창군 북상면 월성에 들어가 초당 터를 매입, 월성초당 3간을 건립, 동춘당의 유물 죽유(대나무창문)와 모란을 이식하고 귀환, 귀로에 완계서원(거창군 주상면 넘터마을)과 창주서원 참배.
화주계사군이익진운 사조월성초당자 和朱溪使君李翼鎭韻 謝助月城草堂貲

학동심심처 鶴洞深深處
연하울미개 煙霞鬱未開
백년유촉비 百年遺躅秘
칠일유붕래 七日有朋來
사자영동우 捨貲營棟宇
매산전초래 買山剪草萊
감군행고의 感君行古義
탄식구배회 歎息久徘徊
<將入月城 滯雨宿龍潭江村 和李景修基普韻 丁亥> 
 
고종 무진년(1868)에는 전국적인 서원 훼철령이 있어 훼철하게 되었다.
그 후 누차에 걸쳐 서원 복원론이 대두되다가 1999년 향중유림의 정기총회에서 본 원의 복설과 중건을 논의 끝에 만장일치로 찬동을 받아 추진위원회를 구성하였다. 군청으로부터 재정지원을 받고 대전 본손으로 부터 협찬을 받아 향중유림들의 동참으로 옛터인 월성초당에 부지를 정하여 가당과 사우를 2000년 4월에 완공하고 매년 음력 4월 15일에 향사를 올리고 있다.
서원훼철전 1716년에 충헌공 이숙(전경상도관찰사)를 추배하였고 1811년 문원공 송명흠을 추배하였다가 2000년부터 폐위하였다.

1)송준길(宋浚吉)
조선 후기의 문신이며 학자다. 본관은 은진(恩津)이고 자(字)는 명보(明甫), 호(號)는 동춘당(同春堂)이다. 세영(世英)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군수 응서(應瑞)이고, 아버지는 영천군수(榮川郡守) 이창(爾昌)이다. 어머니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김은휘(金殷輝)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이이(李珥)를 사숙(私淑)했고 20세 때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생이 되었다. 1624년(인조 2) 진사(進士)가 된 뒤 학행으로 천거 받아 1630년 세마(洗馬)에 제수되었다.
이후 효종이 즉위할 때까지 내시교관(內侍敎官)·동몽교관(童蒙敎官)·시직(侍直)·대군사부·예안현감·형조좌랑·사헌부지평·한성부판관 등에 임명되었으나 대부분 관직에 나가지 않았고, 단지 1633년에만 잠깐 동몽교관직에 나갔다가 장인 정경세(鄭經世)의 죽음을 이유로 사퇴하였다. 1649년 김장생의 아들로 산당(山堂)의 우두머리인 김집(金集)이 이조판서로 기용되면서 송시열(宋時烈)과 함께 발탁되어 부사직(副司直)·진선(進善)·사헌부장령 등을 거쳐, 사헌부집의에 올랐고 통정대부로 품계가 올랐다.
이 해에 인조 말부터 권력을 장악한 김자점(金自點)·원두표(元斗杓) 등 반정공신 일파를 탄핵하여 몰락시켰으나, 김자점이 효종의 반청정책을 청나라에 밀고하여 그도 벼슬에서 물러났다. 그 뒤 집의·이조참의 겸 찬선 등으로 여러 번 임명되었으나 계속 사퇴하였으며, 1658년(효종 9) 대사헌·이조참판 겸 좨주를 거쳤다.
1659년 병조판서·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우참찬으로 송시열과 함께 국정에 참여하던 중, 효종이 죽고 현종이 즉위하자 자의대비(慈懿大妃)의 복상 문제로 이른바 예송(禮訟)이 일어났는데 송시열이 기년제(朞年祭 : 만 1년)를 주장할 때 그를 지지하였다. 이 해에 이조판서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였다. 이후 우참찬·대사헌·좌참찬 겸 좨주·찬선 등에 여러 차례 임명되었으나, 기년제의 잘못을 규탄하는 남인들의 거듭되는 상소로 계속 사퇴하였다. 단지, 1665년(현종 6) 원자의 보양(輔養)에 대한 건의를 하여 첫 번째 보양관이 되었으나, 이 역시 곧 사퇴하였다.
1673년 1월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나 1674년 효종의 왕비인 인선대비(仁宣大妃)가 죽자 또 한 차례 자의대비의 복상 문제가 일어나게 되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남인의 기년제설이 서인의 대공설(大功說 : 9개월)을 누르고 남인의 주장을 관철, 남인이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에 1675년(숙종 1) 허적(許積)·윤휴·허목 등의 공격을 받아 관작을 삭탈당하였다. 이어 1680년 경신환국으로 서인이 재집권하면서 관작이 복구되었다. 송시열과 동종(同宗)이면서 학문 경향을 같이한 성리학자로 이이의 학설을 지지하였다. 특히 예학(禮學)에 밝아 일찍이 김장생이 예학의 종장(宗匠)이 될 것을 예언하기도 하였다. 문장과 글씨에도 능하였다.
1681년 숭현서원(崇賢書院)에 제향되고 문정(文正)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같은 해 김장생과 함께 문묘(文廟)에 종사(從祀)할 것이 건의된 이래, 여러 차례 상소가 있은 다음 1756년(영조 32) 문묘에 제향되었다. 충현서원(忠賢書院)·봉암서원(鳳巖書院)·돈암서원(遯巖書院)·용강서원(龍岡書院)·창주서원(滄洲書院)·흥암서원(興巖書院)·성천서원(星川書院) 등에도 제향되었다. 저서로 『어록해(語錄解)』·『동춘당집』이 있으며, 글씨로는 부산의 충렬사비문(忠烈祠碑文), 남양의 윤계순절비문(尹啓殉節碑文)이 있다.

성천서원 강당 1동 3칸. 성천사 1동 2칸. 유허비 1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