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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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용원서원(龍源書院)
   경상남도 거창군 가북면 용산리 157번지
   문 위(文 緯)
   1686년(숙종 12)
   
   음력 3월 하정일
   남평문씨종가소장고문서-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43호(1998.11.13지정)
1686년(숙종 12)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문위(文緯)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그 뒤 변창후(卞昌後)를 추가 배향하여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왔다. 1868년(고종 6)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가 1989년에 서원이 복원되고 이어서 1991년에 사당을 복원하였다.
 
1633년에 김치경(金致敬), 정기진(鄭起震), 윤영남(尹英男) 등이 사당건립을 발의하고.
1686년 10월 원학동에 용원서원(龍源書院)을 완공함
1759년 정시좌, 이성창 등이 주도, 변월담(卞月潭)공을 추배했다. 
후손 문석에 의하여 가북 용산으로 이건하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헐리게 되었다
2000년 거창 문중에서 성금을 모금하여 모현사(신실)과 강당 및 대문을 건립.

1)주벽-문위(文緯, 1555~1632)
조선 중기의 문신. 거창(居昌) 출신. 본관은 남평(南平). 자는 순부(純夫), 호는 모계(茅溪). 아버지는 통정대부(通政大夫) 산두(山斗)이며, 어머니는 함양선교랑(咸陽宣敎郞) 오세평(吳世平)의 딸이다. 조식(曺植)·오건(吳健)·정구(鄭逑)의 문인이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창에서 의병들을 모집하고, 의병장 김면(金沔)과 함께 고령(高靈)에서 왜군을 맞아 싸웠다. 김면이 싸움중에 병으로 죽자 뒷일을 맡아 처리하였다. 또한, 부모의 상을 당하자 고향인 거창현 모계리(茅溪里)에 터전을 마련하고, 10여년 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이와 같은 독행(篤行)으로 부제학(副提學) 김우옹(金宇顒),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에게 천거되어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다. 그뒤 선공감주부(繕工監主簿)·사헌부감찰을 지냈다.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즉위하자 사직하고 고향으로 내려갔다.
정인홍(鄭仁弘)과는 같은 조식의 문인으로 구면이었으나, 그가 대북(大北)의 집권자가 되자, 관계를 끊고 두문불출 독서에 전념하였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 후 70세의 나이로 고령현감에 부임하였으나, 수개월 뒤 병으로 사임하였다. 거창의 용원서원(龍源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모계집≫이 있다.
 
한강 정구 선생의 문인으로 1592(선조25) 임진왜란때 왜군과 전투중 의병대장 김면의 병사후 의병대장을 맡았고 김옹(부재학), 류성용(재상)의 천거로 동목교관이 되어 선고감주부 감찰을 역임하시다가
광해군 즉위 후 낙향 인조반정후 고령현감을 사임하고 낙향하다
 
가.출생과 성장
12세 익겸(益謙:충혜공)으로 응(雄)은 선생의 조부(祖父)로써 현감(縣監)을 역임하였으며, 함양(咸陽)에서 거창군가북면용산리로 이거(移居)해 왔다. 아버지는 산두(山斗)이고, 호는 학산(學山)으로 학문이 높아 향촌 자제들의 교육을 맡았다.
당시 이석명(李碩明) 거창현감(居昌縣監)은 팔송정(八松亭)을 건조하여 학산공(學山公)에게 지방자제의 교육을 부탁하였고, 영호(瀯湖) 윤경남(尹景男)은 문하생(門下生)이었다. 덕계(德溪) 오건(吳建)선생과도 교우(交友)하였다. 선생은 소년시절의 아버지로부터 학문과 예절을 배웠다. 선생의 어머니는 함양오씨(咸陽吳氏)로써 덕계 선생의 일족이었다. 
아들은 성후(誠後), 경후(敬後), 충후(忠後) 등 삼형제였다.

나. 행적(行蹟)
선생은 조선 명종(明宗) 9년(서기 1554) 6월 14일 거창 가조현 용산 마을에서 태어났다. 
6세때 독서를 시작하여 9세에는 상서(尙書)의 뜻을 알았다. 
13세때 조부공(祖父公)의 상(喪)을 당하였는데 학산공(學山公)이 시묘(侍墓)하는 데서 영호(營湖) 윤경남과 같이 공부하였다.
○ 19세 : 남명(南冥)선생을 방문하였고, 장례(葬禮)때 참석하여 예(禮)를 배웠다.
○ 21세 : 산청의 덕계선생을 방문하여 역학(易學)을 배웠는데 경의지학(敬義之學)의 근본을 얻었다. 
7월에 덕계를 제사하는 제문(祭文)으로 분명이 진동하였다. 
한강(寒岡) 정구(鄭逑)선생께 50년동안 가르침을 받았는데 많은 영향을 받았고, 정선생 또한 여러 
제자중 으뜸으로 생각하였으며 후에 한강언행록(寒岡言行錄)을 지었다.
○ 38세 : 6월에 영남유생을 대표해서 최수우(崔守愚 이름은 최영경) 신원소를 지었다
9월에는 팔송정(八松亭)에서 현감 이석명의 명으로 생도를 교수함.
○ 39세 : 임진년 창의하여 김면(金沔, 호는 松庵)을 대장으로 추대하여 지례, 병암, 고령, 성주, 합천 
등지에서 왜적을 방어하여 진양일로(晋陽一路)와 주민을 구제하였다.
○ 46세 : 용산에서 모계리로 이거하다 
호(號)의 계(溪)를 '谿로 바꿈은 스스로를 낮추고 경계함이었다고 한다.
○ 50세 : 의사 이형(李亨), 장응인(張應麟), 효자 최발전(崔潑傳)을 지었다.
○ 51세 : 5월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다. 동강(東岡) 김우옹의 추천에 의해 6월에 부임했다. 
당시 문인 모의자(慕義者)는 사우도를 참조할 것. 52세에 계공랑(啓功郞∼종7품)에 승진
○ 52세 : 선무랑(宣務郞), 선교랑(宣敎郞) 종6품에 승진. 선무원종공신 삼등에 봉해지다.
○ 53세 : 선공감주부(繕工監主簿) 12월, 서애 유성룡(柳成龍) 추천으로 사헌부감찰(司憲府監察)에 임명 
○ 55세 : 승훈랑(承訓郞), 승의랑(承義郞), 봉훈랑(奉訓郞 종5품), 봉직랑(奉職郞)에 승진
○ 56세 : 광해군 1년, 벼슬을 버리고 귀향.
○ 61세 : 동계(桐溪) 정온(鄭蘊)은 제주도 대정에 안치, 윤경남이 운봉 현감(縣監)을 하다가 사망하였다.
○ 62세 : 문인 조직(趙稷)이 광해의 폐륜행위를 상소(上訴)하여 남해로 유배되고 선생도 무고(誣告)되어
화(禍)를 당할 뻔 했는데 배대유(裵大維)의 변호로 무사하였다. 
오사호(吳長)는 정온(鄭蘊)을 변호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토산(兎山)으로 유배됨.
○ 63세 : 서계서원(西溪書院) 건립에 전력함.
○ 64세 : 오사호(吳思湖)는 유배지에서 사망, 선생은 삭명사판(削名士版: 모든 벼슬이 삭탈)됨.
○ 65∼66세 : 허목(許穆∼眉), 조경(趙炯∼龍州), 이진철 등과 서신 왕래, 상봉 등이 빈번하였다.
○ 67세 : 한강선생 사망(광해 12년), 위패(位牌)를 모시고, 대곡(大哭)하고 제문(祭文)으로 조의하였다.
○ 69세 : 연평답문절요(延平答問切要)를 초록(抄錄)하였다.
○ 70세 : 인조왕 1년 4월에 조산대부(朝散大夫 종4품) 고령현감에 임명되었다. 6월 부임 -> 11월 사임.
○ 75세 : 도산서원(道山書院) 창건을 발의함.
○ 78세 : 덕계선생 행장(行狀)을 지었다. 12월 24일 별세하시다 
○1644년 공의 행장(行狀)을 허목(許穆)이 찬술함
 
2)변창후(卞昌後, 생몰년미상)
본관은 밀양이고 호는 월담(月潭)이다. 구산 변벽(龜山 卞璧)의 현손이다. 그를 기리기 위해 후손들이 1958년에 가지리 지내 마을 어귀에 사적비를 세웠다. 비문은 김황(金榥)이 짓고 초계 정태균이 썼다.

건축물의 구성은 문루와 강당, 사당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당, 그리고 사당인 모현사(慕賢祠)를 직렬배치하여 담장을 둘렀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규모로 팔작지붕이다.

1)남평문씨종가소장고문서(南平文氏宗家所藏古文書)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43호(1998.11.13지정)
남평 문씨의 종가에서 대대로 소장하고 있는 고문서로, 조선 중기 때의 학자인 모계 문위(1554~1631) 선생의 교지류, 문집, 필첩 등이다. 문위(文緯)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거창에서 의병을 모아 싸웠으며, 부모가 돌아가시자 거창현 모계리에 터전을 마련하고 10여 년동안 제자들을 가르쳤다. 그 후 김우옹, 유성룡 등이 추천하여 동몽교관, 사헌부감찰 등을 지냈으며,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임금의 자리에 오르자 벼슬을 내놓고 고향으로 돌아가 독서에만 전념하였다. 그가 죽은 후 거창의 용원서원에 모셔졌다. 이것들은 당시 조선의 상황과 남평 문씨 가문의 내역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참고-거창군사, 1997.
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