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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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백곡서원(栢谷書院)
   경상남도 밀양시 용평리 582-1 백곡마을
   이 행(李 行) 이 태(李 迨) 이광진(李光軫) 이경홍(李慶弘)
   1800년(정조 24)
   
   
   금시당백곡재(今是堂栢谷齋)-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28호(1996.3.11지정) 밀양12경도(密陽十二景圖)-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08호(1996.03.11지정)
여말의 충절로서 두문동 72현의 한 사람인 문절공(文節公) 이행(李行)을 비롯하여, 그 5대손 이태(李迨), 6대손인 이광진(李光軫), 7대손인 이경홍(李慶弘) 등 여주 이씨 명현 네 사람을 향사하던 서원이다.
1800년(정조 24) 향중 선비들의 공론으로 처음 백곡사(栢谷祠)로 창건하였으며, 이때 백곡사봉안사선생문과 상향축문은 이만운(李萬雲)이 지었다.
그 뒤 백곡사는 후손들에 의하여 ‘세덕사(世德祠)’로 현판을 바꾸었으며 다시 ‘백곡서원’으로 높여 부르다가 1868년(고종 5)에 서원훼철령에 따라 사당이 훼철되었다.

1)이행(李行, 1352~1432)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주도(周道), 호는 기우자(騎牛子)·백암거사(白巖居士)·일가도인(一可道人). 충주목사 천백(千白)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황씨(黃氏)이다.
1371년(공민왕 20) 과거에 급제, 한림수찬이 되었다. 1386년(우왕 12) 탐라(耽羅)가 자주 반란을 일으키므로 전의부정(典醫副正)으로 탐라에 가서 성주(星主) 고신걸(高臣傑)의 아들 봉례(鳳禮)를 볼모로 데리고 왔다.
1389년(창왕 1) 좌사의대부(左司議大夫)로 사전(私田)의 폐단을 논하는 상소를 올렸고, 이해에 지신사(知申事)가 되었다. 1390년(공양왕 2) 윤이(尹彛)·이초(李初)의 옥사가 일어나자 이에 연루되어, 이색(李穡)과 함께 청주옥에 갇혔으나 수재로 석방되었다. 그 뒤 경연참찬관(經筵參贊官)·예문관대제학을 지냈고, 1392년에는 이조판서로 정몽주(鄭夢周)를 살해한 조영규(趙英珪)를 탄핵하였다. 고려가 망하자 예천동(禮泉洞)에 은거하였다.
1393년(태조 2) 고려의 사관(史官)이었을 때 이성계(李成桂)를 무서(誣書 : 글로써 무고함)한 죄가 있다 하여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가산이 적몰되고 울진에 귀양갔다가 이듬해에 풀려났다. 시호는 문절(文節)이다.
 
2)이태(李迨, 1483~153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여주(驪州). 자는 중예(仲豫), 호는 월연(月淵). 지돈녕부사 자(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증석(曾碩)이고, 아버지는 교위(校尉) 사필(師弼)이며, 어머니는 진사 유자공(柳子恭)의 딸이다. 김안국(金安國)의 문인이다.
1507년(중종 2) 생원·진사시에 모두 합격하고, 1510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12년 봉교로 재직중 모친의 병을 거짓 칭탁하고 사직하였다.
1519년 함경도도사로 있을 때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벼슬을 버리고 고향에 내려가 학문에 전념하였다. 뒤에 등용되어 1532년 삼척부사가 되었으나 탐학하다는 죄로 대간의 탄핵을 받아 삭직된 뒤 향리에 은퇴, 학문 연구와 후진 교육에 힘썼다.
일찍이, 한원(翰苑)에 있을 때 김안로(金安老)가 병풍에 휘호하기를 요청했는데 이를 거절하였으므로 여러 모함을 받았다. 김정국(金正國)·이현보(李賢輔)·권발(權橃) 등과 교유하였으며, 문장에 능하고 글씨가 뛰어났다. 저서로는 ≪월연집≫이 있다.
 
3)이광진(李光軫, 1513~1566)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여임(汝任), 호는 금시당(今是堂). 행(行)의 후예로, 아버지는 진사 원(遠)이며, 어머니는 봉상시부정(奉常寺副正) 홍윤덕(洪潤德)의 딸이다.
1540년 사마시에 합격하여 생원이 되고, 1546년(명종 1)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으며, 1549년 봉교를 거쳐 전적이 되어 ≪중종실록≫·≪인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하고 병조의 좌랑·정랑을 지냈다.
1561년(명종 16) 헌납(獻納)·장령·사간·지평 등을 거쳐 1565년 좌부승지에 이르렀고, 그 뒤 고향에 돌아가 산수를 즐기며 학문에 전념하였다.
어려서 아버지를 잃고 어머니를 지성으로 모셔 효자로 알려졌고, 김극일(金克一)·이정(李楨)·노정(盧楨) 등과 도의로써 사귀었다. 유학자로 널리 알려져 1564년 사유(師儒)로 뽑혔다.
 
4)이경홍(李慶弘, 1540~1595)
여주인 자(字)는 백긍(伯兢), 호(號)는 근재(謹齋). 효우(孝友)가 돈독(敦篤)하고 학문(學問)이 정심(精深)하였다. 명종(明宗) 때 진사(進士). 이후 거업(擧業)을 폐하고 한강(寒岡) 정구(鄭逑), 동강(東岡) 김우옹(金宇顒), 옥천(玉川) 안여경(安餘慶) 등 제현(諸賢)과 도의(道義)로 사귀면서 그 부친 금시당(今是堂)의 별서(別墅)에서 휴양(休養)하였다. 선조(宣祖) 때 효행(孝行)으로 천거(薦擧)되어 선원전참봉(璿源殿參奉)에 제수(除授)되었다. 겨우 1년 만에 임진왜란(壬辰倭亂)이 일어나니, 공(公)은 분환(奔還)하여 모부인(母夫人)을 모시고 부(府) 동(東)쪽의 석골동(石骨洞)으로 피란(避亂)하여 공(公)의 제(弟) 진사(進士) 이경승(李慶承). 오한(오漢) 손기양(孫起陽) 등과 함께 창의(倡義)하였으나, 얼마지나지않아 졸(卒)하였다.

서원은 복원되지 않았고 부속건물들만 남았는데 금시당과 백곡재가 있다.
 
1)금시당백곡재(今是堂栢谷齋)-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28호(1996.3.11지정)
금시당과 백곡재 2채로 된 건물이다. 금시당은 조선시대 문신인 금시당 이광진 선생이 말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제자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지은 건물이다. 이광진은 1546년(명종 1)에 문과에 급제하여
1)밀양12경도(密陽十二景圖)-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08호(1996.03.11지정)
금시당을 중심으로 한 밀양의 12명소를 그린 그림이다. 조선 선조 때 효행이 뛰어나 준원전 참봉에 제수되었던 이경홍이 그의 부친 금시당 이광진 공의 병환을 위로하기 위해 그렸다는 말이 전해오고 있다. 임진왜란 이전의 작품으로, 높은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다.
 
 
참고-밀양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