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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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신남서원(辛南書院)
   경상남도 밀양시 무안면 정곡리 74번지
   박 위(朴 葳) 박 기(朴 耆)
   1822년(순조 22)
   
   2월 하정(下丁)
   경보당(景報堂)-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56호(1997.12.31지정)
고려말에 대마도(對馬島)정벌(征伐)은 물론 이성계를 도와 위화도회군(威化島回軍)에 공이 컸던 정국군(靖國君) 박위(朴葳)장군과 조선 초 문신(文臣)인 박기(朴耆) 부자를 향사(享祀)하는 서원이다.
1822년(순조 22)에 후손인 박기성(朴基聖)의 주청으로 밀양 사림(士林)들의 공론을 모아 이 서원을 창건 하였는데, 사당을 상모사(尙慕祠)라 하였고 강당을 경보당(景報堂)이라 하였으며 봉안문(奉安文)과 상향축문(常享祝文)을 응교(應敎) 강세백(姜世白)이 지었다.
1868년(고종 5)에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에 따라 사당은 철거되었으나 강당은 경보당(景報堂)으로 이름을 바꾸어 재실(齋室)로 삼고 후손들에 의해 이곳에서 박위장군을 주향(主享)으로 하고 박기를 배향하여 향사가 받들어 졌다.
1981년에 후손들의 발의와 고을 유림들의 호응으로 서원을 복원하여 상모사(尙慕祠)를 그전대로 중건하였는데 현재 서원의 배치는 사당인 상모사를 중심으로 전면에 신문(神門)을 설치하여 신역(神域)을 구획하였으며 바깥에는 강당인 경보당(景報堂)이 있다.

1)주벽-박위(朴葳, ?~1398)
고려 말·조선 초의 무신. 본관은 밀양(密陽). 우달치(迂達赤 : 왕을 호위하던 숙위병)로 등용되었다가 김해부사에 올라 왜적을 격퇴하였다.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遼東征伐) 때 이성계(李成桂)를 따라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 최영(崔瑩)을 몰아낸 뒤에 경상도도순문사(慶尙道都巡問使)로 전함 100여척을 이끌고 대마도(對馬島)를 쳐서 적선 300여척을 불태워 크게 이겼다.
뒤에 판자혜부사(判慈惠府事)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창왕을 폐하고 공양왕을 추대한 공으로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가 되고 충의군(忠義君)에 봉해졌으며, 공신이 되었다.
1390년(공양왕 2) 김종연(金宗衍)의 옥사에 연루되어 풍주(淵州)에 유배되었으나 곧 사면되어 회군공신(回軍功臣)이 되고, 조선초에 참찬문하부사(參贊門下府事)를 거쳐 양광도절도사(楊廣道節度使)가 되어 왜구를 물리쳤다.
이 때 밀성(密城:지금의 경상남도 밀양)의 소경 이흥무(李興茂)의 옥사에 연루되어 구금되었다. 대간(臺諫)과 형조에서 대역죄로 논의되었으나 태조의 호의로 석방, 서북면도순문사(西北面都巡問使)로 나갔다가, 사헌부의 거듭되는 탄핵으로 파직되었다.
 
2)박기(朴耆)
조선 초 문신(文臣)인 호는 소총재(小塚齋)이다. 조선초 문과에 급제하여 남양부사(南陽府使)로 나갔고, 후에 가의대부(嘉義大夫) 및 이조참판, 경연참찬관,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일찍부터 문학으로서 명성을 떨치었다는 기록만 남아 있을 뿐 출생 연도와 별세일, 묘소 등이 전해지지 않는다.

신남서원은 상모사를 중심으로 전면에 신문(神門)을 설치하여 신역(神域)을 구획하였고, 바깥에 강당인 경보당(景報堂)이 있으며 경내에 박위 장군과 박기 선생의 제단비가 있는데 밀성박씨 정국군파 문중에서 관리하고 있다. 한편 이 서원의 강당인 경보당(景報堂)은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56호로 지정되어있다.


참고-밀양문화관광 http://tour.miryang.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