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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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오봉서원(五峯書院)
   경상남도 밀양시 초동면 오방리 347
   조치우(曺致虞) 조광익(曺光益)
   1795년(정조 19)
   
   3월 하정(下丁)
   
1780년(정조 5)부터 세덕사(世德祠)에서 조광익(曺光益)의 향사를 올렸다. 1790년(정조 15) 자손들이 소(疏)를 올려 선생의 증조 청백리 조치우(曺致虞)도 향사할 수 있도록 청하였으며, 그 다음해 함께 향사를 올리라는 윤허가 내렸다. 1795년(정조 19)에 밀양 사림(士林)들의 공의(公議)로 향사할 뜻을 태학(太學)에 통문하여 청효사(淸孝祠)라 현액하고 춘추로 향사하라는 답을 받았고, 그 다음해에 처음으로 격을 높여 오봉서원이라 하였다. 그러나 1868년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 그 후 후손들의 재숙을 위한 재실을 세워 오봉서당이라 칭하였고, 1988년 청효사를 다시 설립하여 그 전의 현판을 다시 붙이고 신문(神門)을 입덕문(立德門)이라 편액하였다. 1989년에는 위판을 봉안하고 오봉서원을 복원하였다. 1997년 노후한 강당과 정문을 철거하여 옛날의 모습대로 원위치에 중건하고 청효당(淸孝堂)을 실학당으로, 효우당(孝友堂)을 독지재(篤志齋)로 바꾸었으며, 정문을 숭유문(崇儒門)이라 현판하였다.

1)조치우(曺致虞, 1459~1529)
조선 중기의 문신·효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순경(舜卿). 상명(尙明)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경무(敬武)이고, 아버지는 군수 말손(末孫)이며, 어머니는 김한계(金漢啓)의 딸이다.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된 뒤, 1494년(성종 25)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검열·사옹원정을 지냈으며, 연산군 초기에는 성균관전적으로 춘추관기사관이 되어 ≪성종실록≫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어 1498년(연산군 4) 정언을 지냈으나 뒤에 연산군의 학정에 불만하여 관직을 사퇴하였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정세가 바뀌자 다시 기용되어 대구부사로 나갔다. 이어 1519년(중종 14) 예천군수를 지냈다.
재임 중 선정으로 이름이 높아 청백리에 녹선되고, 뒤에 송덕비가 세워졌다. 효행이 뛰어나 왕으로부터 ≪소학≫을 하사받았으며, 55세에 어머니의 봉양을 위하여 사직하고 70세에 어머니의 상을 당하자 애통 끝에 죽었다. 실기(實記)가 전한다.
 
2)조광익(曺光益, 1537~1580)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가회 (可晦), 호는 취원당(聚遠堂) 또는 죽와(竹窩). 아버지는 윤신(允愼)이며, 어머니는 이조판서를 지낸 장말손(張末孫)의 손녀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며, 성리학을 깊이 연구하였다.
1558년(명종 13) 생원·진사 양시에 합격하였고, 1564년 별시문과에 을과로 급제, 1569년(선조 2) 형조좌랑에 이어 감찰을 지내고 1576년 중시(重試)에 장원급제, 의금부도사에 이르렀다.
1578년 강동(江東)으로 좌천된 아우 호익(好益)을 만나려고 평안도 도사의 직책을 얻어 내려갔다가 그곳에서 죽었다. 선조는 그 우애를 가상히 여겨 정문을 내려 표창하고, ≪삼강행실록≫에 수록하게 하였다. 오봉서원(五峰書院)과 청효사(淸孝祠)에 봉안되었다. 저서로는 ≪취원문집≫이 있다.

전학 후묘의 구조인데, 사당이 오른쪽으로 다소 치우쳐 있다. 사우는 청효사(淸孝祠)로서 두 좌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신문은 입덕문(立德門)이다. 강당인 실학당(實學堂)은 5칸으로 전면에 오봉서원이라고 현액하였는데, 이 편액은 서원 창건 당시의 것을 따로 보관했다가 서원복원과 함께 다시 걸었다. 동재는 독지재(篤志齋)이며, 서재 자리에는 오래 묵은 향나무를 그대로 두었다. 정문은 3칸의 숭유문(崇儒門)이다. 그리고 전사청(典祀廳)과 성생단(省牲檀)은 서편 담장밖에 있다.


참고-밀양문화원, ≪밀양지≫, 2006.
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