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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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도천서원(道川書院)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면 신안리 177
   문익점(文益漸) 권 도(權 濤)
   1461년(세조 7)
   1787년(정조 11)
   9월 1일
   신안사재-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37호(1983.08.24지정)
이곳은 고려(高麗) 때의 문신(文臣)이며 우리나라에 목화를 처음 들여온 것으로 유명한 문익점(文益漸) 선생의 연고지(緣故地)로, 1461년(세조 7)에 나라에서 선생을 추모하는 사당(祠堂)을 세웠었다. 사당은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소실되었다가 중건되었으며 1787년(정조 11)에는 도천서원이라고 사액을 받았다. 그 뒤 권도(權濤)를 추가배향하였다.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페령으로 철폐되었으나 1891년(고종 28)에 단성(丹城) 사림(士林)들에 의하여 노산정사(蘆山精舍)란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1975년 사당인 삼우사(三憂祠)를 재건하고 서원으로 복원되었다.

1)주벽-문익점(文益漸, 1329~1398)
고려 말의 문신·학자. 본관은 남평(南平). 첫 이름은 익첨(益瞻). 자는 일신(日新), 호는 삼우당(三憂堂). 강성현(江城縣:지금의 경상남도 산청) 출생. 숙선(淑宣)의 아들이다. 1360년(공민왕 9) 문과에 급제하여 김해부사록(金海府司錄)과 순유박사(諄諭博士) 등을 지냈다.
1363년 사간원 좌정언(司諫院左正言)으로 있을 때 서장관이 되어 계품사(啓襄使) 이공수(李公遂)를 따라 원나라에 갔다. 때마침 원나라에서 벼슬을 하고 있던 고려 사람 최유(崔濡)가 원나라에 와 있던 충선왕의 셋째 아들 덕흥군(德興君)을 왕으로 옹립하고 공민왕을 몰아내려 하고 있었다. 실제로 원나라는 덕흥군을 고려왕으로 봉하였고, 최유는 원나라의 군사 1만 명을 얻어 요동(遼東)까지 진군해 왔으나 1364년 1월 최영(崔瑩) 등에게 패하였다.
정치적 격동기에 원나라에 갔던 문익점은 덕흥군을 지지했다는 혐의로 귀국과 동시에 파직되었다. 원나라에서 귀국할 때 그는 종자(從者) 김룡(金龍)을 시켜 밭을 지키던 노파가 막는 것을 무릅쓰고 목화 몇 송이를 따서 그 종자를 붓대 속에 넣어 가지고 돌아와 장인 정천익(鄭天益)에게 나누어 주고 함께 시험 재배를 하였다.
처음에는 재배기술을 몰라 한 그루만을 겨우 살릴 수 있었으나 3년간의 노력 끝에 드디어 성공하여 전국에 목화씨가 퍼지도록 하였다. 그러나 목화씨를 어떻게 제거하고 실을 어떻게 뽑을지 모르던 중 때마침 정천익의 집에 머물던 호승(胡僧)에게 물어 씨를 빼는 씨아와 실을 뽑는 물레 만드는 법을 배워 의복을 짜서 입도록 하였다.
이처럼 문익점은 정천익과 더불어 목화 종자의 도입, 시험재배 성공, 종자의 전국적 보급, 목화섬유를 이용한 의료제조 등 그 공로는 참으로 컸다. 조식(曺植)은 문익점의 그 공을 기려 훗날 “백성에게 옷을 입힌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후직씨와 같다(衣被生民 后稷同).”는 시를 지어 찬양한 바 있다.
공민왕이 죽고 우왕이 즉위하자 그는 곧 전의주부(典儀主簿)가 되었고, 창왕 때는 좌사의(左司議)로 왕 앞에서 강론을 하기도 하였다. 이때 이준(李遵) 등이 사전(私田)을 다시 세우도록 함은 옳지 않다고 상소한 바 있는데, 문익점은 병을 핑계로 이에 가담하지 않았다. 문익점은 이색(李穡)·이림(李琳)·우현보(禹玄寶) 등과 더불어 사전 혁파를 비롯한 이성계(李成桂) 일파의 전제개혁을 반대했던 것이다. 문익점은 이 사건으로 조준(趙浚)의 탄핵을 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그는 사후 조선 태종 때 참지정부사(參知政府事) 강성군(江城君)에 추증(追贈)되었고, 1440년(세종 22) 영의정과 부민후(富民侯)에 추증되었으며 시호는 충선공(忠宣公)이다. 또한 그의 고향 단성의 도천서원(道川書院)과 전라남도 장흥의 월천사우(月川祠宇)에 사당이 세워졌다.
 
2)권도(權濤, 1575~1644)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정보(靜甫), 호는 동계(東溪). 아버지는 사포서별좌(司圃署別坐) 세춘(世春)이며, 어머니는 상산김씨(商山金氏)로 담(湛)의 딸이다. 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1601년(선조 34) 진사시에 합격했고, 1623년(인조 1) 승정원주서에 제수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한림(翰林)으로 왕을 공주까지 호종(扈從)한 공으로 원종훈(原從勳)이 되어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다. 1625년에는 홍문관부수찬에 제수되었고, 1628년 유효립(柳孝立)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영사원종공신(寧社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631년 원종의 추숭(追崇)을 극력 반대한 일로 남해로 유배되었다. 1640년에는 사간원대사간에 제수되었다. 죽은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도천서원 (道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동계문집≫ 8권이 있다.

서원의 전체적인 배치는 공부하는 공간인 강당과 유생들의 기숙사인 동재·서재가 앞쪽에 제사를 지내는 공간인 삼우사가 뒤쪽에 있는 전학후묘의 형태로 되어있다. 또한 출입구인 내삼문과 외삼문이 있으며, 제사 때 관리들의 숙소로 사용하던 신안사재가 있다. 신안사재는 앞면 4칸·옆면 2칸으로 지붕옆면이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 건물이다. 건물의 양쪽 끝 한칸씩 넓은 마루를 두었다.

1)도천서원신안사재(道川書院新安思齋)
-경상남도유형문화재 237호(1983.08.24지정)
신안사재는 문익점 선생의 향사(享祠) 때 제관(祭官)들이 숙소로 쓰던 건물로 명종(明宗) 6년(1551)에 창건되었으며 현재의 건물은 순조(純祖) 4년(1804)에 다시 지은 것이다. 이 서원 바로 옆 산에는 문익점 선생의 묘소가 있다.
 
2005년 문화재청에서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도천서원에는 고문서 8건, 전적 253건 등이 보관되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고문서 8건 중에는 소지·첩정 · 품목 등이고 전적 253건 중에는 ≪남평문씨족보≫≪동국아운≫등이 중요한 자료로 보고되었다.

참고-산청군지, 2006.
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