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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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신계서원(新溪書院)
   경상남도 산청군 신안면 문대리 726
   박 익(朴 翊) 박 융(朴 融) 박 소(朴 紹) 박 조(朴 調) 박 총(朴 聰)
   1839년(헌종 5)
   1839년(헌종 5)
   3월 중정(中丁)
   신계서원제기-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35호(1985.11.14지정)
1839년(헌종 5)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박익(朴翊)과 그의 제자 박융(朴融), 박소(朴紹), 박조(朴調), 박총(朴聰)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창건과 함께 ‘신계(新溪)’라고 사액되었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그 후 고종 12년(1875)에 후손들의 정성과 노력으로 영정을 봉안한 영정각과 세한재(歲寒齋)를 건립하고 복원하여 향사를 진행하게 되었다.
1917년에는 향중 유림들의 공의로 박익의 위패를 복설하여 3월 중정일에 석채례(釋菜禮)로 봉안하였으며 사림이 회강(會講)하고 유계안(儒稧案)도 성안(成案)되었다. 1936년에는 재사(齋舍)가 협소하고 노후하여 세한재를 철거하고 중건하여 재호(齋號)를 신계정사(新溪精舍), 사호(祠號)를 ‘송은박선생영당’이라고 현판 하였다. 그 후 1985년 3월에 신계서원을 복원하자는 유림들의 공의가 있었고 1989년 3월에 복원하였다.

1)주벽-박익(朴翊, 1332~1398)
고려 후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초명은 천익(天翊), 자는 태시(太始), 호는 송은(松隱). 판도판서(版圖判書) 영균(永均)의 아들이며, 어머니는 능주구씨(綾州具氏)로 좌정승(左政丞) 위(褘)의 딸이다.
고려왕조에서 예부시랑(禮部侍郎)·중서령(中書令)·세자이사(世子貳師) 등의 벼슬을 지내고, 여러 번 왜구와 여진을 토벌하여 전공을 세웠다. 조선이 개국되자 두문동(杜門洞)의 귀은제(歸隱第)로 들어가 은거하였다. 1395년(태조 4) 공조판서·형조판서·예조판서·이조판서 등에 제수되었으나 모두 거절하고 나가지 않았고, 이듬해에 다시 좌의정에 임명되었지만 부임하지 않았다. 집 뒤의 산을 송악(松岳), 마을을 송계(松溪), 호를 송은, 집을 송암(松庵)이라 한 것은 모두 송경(松京)의 ‘송(松)자’의 뜻을 잊지 말자는 뜻이다.
별세 후 좌의정에 추증되고 충숙(忠肅)이라는 시호가 내렸으며, 밀양의 덕남서원(德南書院)과 신계서원(新溪書院), 용강사(龍岡祠)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송은집≫이 있다.
 
2)박융(朴融, ?~1424)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밀양(密陽). 자는 유명(惟明 : 國朝榜目에는 惟仁), 호는 우당(憂堂). 할아버지는 영균(永均)이고, 아버지는 익(翊)이며, 어머니는 박충민(朴忠敏)의 딸이다. 1408년(태종 8) 생원시를 거쳐 같은 해에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문한(文翰) 계통의 여러 관직을 역임한 뒤 1411년에는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6일에 있었던 취각(吹角) 때에 간관들이 어떤 이유에 의해 모두 이 행사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사헌부의 탄핵을 받아 간관 전원이 면직처분을 받게 되었는데, 그도 사간 정준(鄭悛), 헌납(獻納) 정지아(鄭之雅) 등과 함께 파직되었다. 그 뒤 재서용(再敍用)되어 전한(典翰)이 되었지만, 1418년에는 윤림(尹臨) 등 25인과 함께 어떤 사건에 연루되어 면직되고, 직첩이 환수되었다가 곧 재서용 되었다.
1423년(세종 5) 1월 강원·황해·평안도에 지난해의 기근으로 인해 기민이 크게 발생하자, 해당지역 수령들의 진제(賑濟 : 빈민이나 이재민의 구제) 상황파악을 위해 경차관을 파견하였는데, 그도 이조좌랑으로 강원도에 파견되었다. 그 뒤 경외(京外) 여러 관직을 거쳐 군수에 이르렀다. 저서로는 시문집인 ≪우당집≫이 있다.
 
3)박소(朴紹, 1347~?)
호(號)는 인당(忍堂). 정포은의 문인(門人). 태종(太宗)때 생원(生員). 안음현감을 지내면서 청백(淸白)한 치적(治積)이 있었다. 안음에 공(公)의 청백선정비가 세워졌다. 문집(文集)이 있다.
 
4)박조(朴調, 1350~1431)
자(字)는 신옹(愼翁), 호(號)는 아당(啞堂), 정포은의 문인(門人) 진사(進士)에 올랐으며 관(官)은 정랑(正郞)을 지냈다. 박익의 제3자이다.
정몽주의 문하에서 배워 크게 성취하니 세인의 칭송이 많았다. 효행으로 천거되어 예조정랑의 벼슬에 올랐다. 그러나 부(父)의 유언과 왕조교체의 시기를 당하여 칭병(稱病)하여 사직하고 관직에 나아갈 뜻을 두지 않고 성현의 학문에 잠심(潛心)하였다.
만년에 두 형이 세상을 뜨자 아우인 박총과 더불어 경상우도에 복거(卜居)하였다.
 
5)박총(朴聰, 1352~?)
자(字)는 명옹(暝翁), 호(號)는 졸당(拙堂) 정포은의 문인(門人), 효행(孝行)으로 이조(吏曹) 참판(參判)에 증직(贈職)되었다. 박익의 제4자이다.
형제가 서로 스승과 벗의 구실을 하여 안으로 지덕이 충적함에 착한 이름이 사방에 드러났다. 도의지교인 길재가 말하기를, “벗이란 그 덕(德)을 벗하는 것이니 박총은 나의 스승이요, 나의 벗이 아니다”라고 할 정도로 칭송이 많았다.
효행으로 천거되어 호조정랑에 있을 때 소장(疏狀)을 올려 직언하다가 미움을 받아 귀양살이를 하면서도 도의를 강명(講明)하고 경사(經史)를 연구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다.
만년에 형과 더불어 낙동강 우편 송지촌(松旨村)에 복거하였다. 사후 세종이 호조참의를 증직하였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廟宇), 5칸의 정사(精舍), 5칸의 고사(庫舍)·신문(神門)·대문 등이 있으며, 묘우에는 박익을 주벽(主壁)으로 하여 좌우에 박융, 박소, 박조, 박총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1)신계서원제기-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35호(1985.11.14지정)
조선 헌종 5년(1839)경에 박익(朴翊)의 제사에 사용하기 위하여 제작된 그릇들이다. 제작 당시에는 모두 32점이 제작되었으나 현재는 술잔 6개, 술통 2개, 사각형 밥그릇 4개, 원형 밥그릇 2개, 촛대 2개, 향을 담는 그릇인 향합 1개 등 18점이 남아있다. 이 그릇들은 제기로서는 드물게 청동으로 만들었다.
제작당시에는 반기 7개, 술잔 3개, 술쭉 1개, 술잔 9개, 향로 3개, 촛대 6개, 향합 3개 등 모두 32점이 제작되었으나 일제시대에 촛대 2개, 향합 2개를 빼앗기고 6·25동란 시 폭격으로 인해 술잔 1개, 반기 1개가 파손되었다.
이 그릇들은 제기로서는 드물게 청동을 원료로 사용하였으며 매년 3월 초정일(三月 初丁日) 신계서원에서 모셔지는 송은 선생의 제사에 사용해오고 있으며, 신계서원에서 관리하고 있다.

참고-산청군지, 2006.
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