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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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소계서원(蘇溪書院)
   경상남도 양산시 상복면 소토리 667
   안몽득(安夢得) 안 우(安 宇) 안 주(安 宙) 안 택(安 宅) 안 근(安 瑾) 안 수(安 琇) 안시명(安諟命) 안이명(安以命) 안신명(安信命)
   1783년(정조 7)
   
   3월 10일
   
조선 태종(太宗) 때 유학자인 안몽득(安夢得)과 그의 아들 안우(安宇), 안주(安宙), 안택(安宅) 3형제와 임진왜란 공신 안근(安瑾), 안수(安琇), 안시명(安諟命), 안이명(安以命), 안신명(安信命) 등을 추모하기 위하여 1783년(정조 7) 광주 안씨 문중에서 건립한 것이다.

1)주벽-안몽득(安夢得, 1372~1452)
조선 전기의 문인이며 본관은 광주이다. 문행이 높아 경덕재생(經德齋生)으로 선발되었으며, 조선 태종 조에 생원으로 권농판사(勸農判事)에 등용되었다. 13세 때의 헌수시(獻壽詩)가 유명하다. 함안 봉산재의 안영사(按嶺祠)와 양산 소계서원에 배향되었다.
 
2)안우(安宇, 1498~1550)
본관은 광주이며 자는 태허(太虛)이고, 호는 계산(戒山)이다. 1524년(중종 19)에 문과별시에 장원급제하여 홍문관 수찬·춘추관 편수관을 역임하였다. 을사사화 때 권신의 유혹을 거절하고 환향하였다. 신재 주세붕이 소(疏)를 올려 권했으나 출사하지 아니하였다.
 
3)안주(安宙, 1500~1569)
자는 태고(太古)이고, 호는 치암(恥庵)이며, 1533년(중종28년)에 식년을과(式年乙科)에 장원(壯元)하여. 호조정랑(戶曹正郞)을 비롯하여 청도군수(淸道郡守), 밀양부사(密陽府使), 홍문관 부교리(弘文館 副校理), 제용감정(濟用監正)을 지냈다. 을사사화(乙巳士禍)때 권신(權臣)의 횡행(橫行)을 피해 관직을 버리고 환향(還鄕)하였다.
 
5)안택(安宅, ?~1560)
자(字)는 태거(太居), 호(號)는 광능자(廣陵子). 1540년(중종35년)에 성균관 생원(成均館 生員)하고 벼슬은 도사(都事)하다. 함안팔현(咸安八賢)의 한사람으로 함안 여양서원(咸安 廬陽書院)에 배향(配享)되었다.
 
6)안근(安瑾)
선조 25년(1592) 4월14일에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이날 왜병이 돌연 부산포를 침범했다는 시급한 연락을 받은 양산군수 조영규는 동래성으로 가고 양산사람 안근은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일으킬 일을 동지들과 의논하니 따르는 사람이 많았다. 장남 석명은 집일을 돌보게 하고 두 아들 시명, 이명을 데리고 군량과 병기를 정비하여 모집한 의병 수백 명을 이끌고 양산고을로 넘어오는 왜적을 막아내기 시작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이수생, 이몽란, 최기, 방익, 윤옥, 윤발, 정호인, 정호의 등도 일어섰다.
낙동강구와 육로로 몰려오는 왜적을 구포산과 금정산에서 방어하여 왜적 수십 명을 베었고 내송 사는 황선도 우리와 함께 방어전에서 대승하였다. 또한 양산군 동면 제석동에 사는 허희룡은 재빨리 이웃에 사는 이구, 배봉서 등과 같이 양산군 동면 은동석굴을 굳게 지켜 왜적 수십 명을 베었다.
그러나 동래 양산 의열들의 분전에도 불구하고 양산성도 그 해 4월16일 함락되고 말았다.
이 때 연일에 있던 안근의 종제 수와 조카 신명이 합세하여 응원병을 이끌고 구원하러 왔다. 다시 왜선 수척이 밤을 타고 낙동강 연안으로 습격하여 오므로 아군의 진퇴가 곤란하게 되었을 때 안근은 구원병과 합세하여 분대를 편성 역습하여 용전분투하니 왜적들은 배를 버리고 도망쳐 감으로 추격하여 동래의장 김정서 등과 합세하여 밤중에 적과 싸워 대승을 올렸으나 도훈도 수는 장렬히 전사하고, 현감 안윤헌은 모병장으로, 장원 이극심은 영장으로 동래싸움에 참전하여 군수 조영규와 함께 전사하여 호국의 신이 되었다.
4월24일 안근의 매부 윤의식이 병영으로부터 도피하여 돌아와 병사 이각은 만여 명을 이끌고도 불과 수백의 왜적 선봉을 당해내지 못하고 접전치 않아 군의 사기를 꺾을 뿐 아니라 병영 북문으로 도주케 하니 국세가 위급하게 되었음을 안근에게 알리고 통탄하여 대세는 이미 기울어지고 말았으니 안근은 도리 없이 안윤신이 연일 어오산중에서 내금위호는 양산의 원적산 금수굴에서 가족들을 데리고 피난하고 있으므로 밤을 타서 양식을 공급받는 한편 밀양 방면으로 돌격하는 적을 관군과 합세하여 낙동강 작원에서 적을 대파하였으나 양산은 이미 적의 손아귀에 들어갔으며 밀양 청도도 왜군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그러나 안근의 삼남 이명은 청도 운문산에서 청도 의사 박경전과 합세하여 청도 산중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으며 안시명은 울산 구상으로 가서 열읍 의사와 회합하여 전략을 세워 분전 끝에 대전과를 올렸으며 그 해 6월 5일에는 경주 문천에서 회합 동맹하니 각 읍으로부터 많은 의사들이 앞을 다투어 가담케 되었으니 양산에서의 참가자는 안근, 안신명, 이몽란, 정호인, 정호의, 최기 등 6명이었다.
이 회합에서 편대를 조직하여 금오산에다 복병을 시키고 용전분투하니 적이 이롭지 못함을 깨닫고 달아나기 시작하자 복병들이 일어나 추격하여 수백의 적을 사살하고 적의 진로를 차단하는 한편 유격전을 벌여 대전과를 올렸으나 병사 박진이 뜻을 같이 해주지 않아 결국 패하고 말았다.
이듬해 계사 10월에 안시명은 문천과 구강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고 안신명은 형산에서, 안이명은 청도 밀양 동래에서 각각 대전과를 올렸으나 경주와 영천 등지 싸움에서 우리측에서는 많은 정예 선봉을 잃게 되니 전세는 불리해지고 강화의 논의도 있었으나 왜적들은 물러갈 뜻을 보이지 않아 적개심은 더욱 높아 갔다.
1956년 병신 3월 1일 안근은 팔공산으로 가 명장 양호를 위시한 대부분의 영남 의사들과 회동하였다. 이때 양산사람으로는 안근, 안시명, 이수생, 이몽란 등이었다.
다시 편대를 편성하고 군량, 군기를 정비하여 각 읍 탈환을 기도하고 일대 전격전을 개시하니 적도 오랜 싸움에서 지쳤는지 전국은 우리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어 왜적은 전선을 축소하기 시작했다.
1597년 정유 7월 21일 화왕성에서 가서(안근 일동) 곽재우와 같이 성을 정비하여(안근은 부장으로 활약)출전 입수하니 백전백승하게 되었고 동년 9월 14일에는 대구까지 진군하는 동안 적 수백 명을 베었고 안이명은 화왕성에서 임무를 마치고 당포로 가 이충무공 휘하로 들어가 육전에 못지않게 전공이 많았고 동년 10월 16일 밤에는 해남에서 적 13명을 베었으며 왜적에게 투항한 송언봉을 구출하였고 뒤에 가리포첨사가 되었다. 세상에서는 안씨 일문오충(一門五忠) 또는 일문육의(一門六義)로 불렸다.
 
7)안수(安琇)
본관은 광주이다. 임진왜란 당시에 종형(從兄) 안근과 조카 등과 함께 창의하여 양산고을로 넘어오는 왜적을 막는데 큰 공을 세웠다.
 
8)안시명(安諟命)
본관은 광주이다. 안근의 아들로 임진왜란 때 아버지와 동생 등과 함께 창의하여 큰 공을 세웠다. 선조 30년(1597) 방(榜)에 참방(參榜)하였다. 벼슬은 훈련주부였다. 특히 1593년 10월에 문천과 구강 전투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다.
 
9)안이명(安以命)
본관은 광주이다. 안근의 아들로 임진왜란 때 아버지와 형 등과 함께 창의하여 큰 공을 세웠다. 선조 23년(1590) 방(榜)에 참방(參榜)하였다. 벼슬은 첨사였다. 특히 1597년 7월 21일 화왕성에서 임무를 마치고 당포로가서 이충무공 휘하로 들어가 육전에 못지 않게 많은 전공을 세웠다. 뒤에 가리포첨사가 되었다.
 
10)안신명(安信命, 1575~1636)
자(字)는 군실(君實), 호(號)는 매죽헌(梅竹軒). 임진왜란(壬辰倭亂)때 의병(義兵)을 일으켜 공을 새워 훈련원 판관(訓練院 判官),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에 증질(增秩)되고, 선무원종공신3등(宣武原從功臣三等)의 녹훈(錄勳)을 받았다. ※숙질(叔侄), 재종간(再從間)의 5名이 모두 녹훈(錄勳)을 받으니 세칭 안씨일문의 5충(世稱 安氏一門의 五忠)이라 하였다. 양산 소계서원·보령 호국사·울산 충의사(梁山 蘇溪書院, 保寧 護國祠, 蔚山 忠義祠)에 배향(配享)되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으로 근대에 재건한 건물이며 비석 8기가 있다. 묘우인 소계사는 정면 3칸 규모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이다.


참고-양산시지, 2004.
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