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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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어강서원(漁江書院)
   경상남도 의령군 용덕면 정동리
   강수남(姜壽男)
   순조연간(1801~1834)
   
   불향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충열공(忠烈公) 강수남(姜壽男)을 모시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순조 연간(1801~1834)에 창건되었으나,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으로 인해 훼철되었다.

1)주벽-강수남(姜壽男, 1552~1592)
 
부자가 남명문인(南冥門人)
그의 자는 인수요, 호는 사월정(沙月亭) 본관은 진양(晋陽)이니, 강혜의 후손으로 진사 서(瑞)의 아들이며, 1552년에 태어났다. 아버지 서는 일찌기 남명 조식의 문인으로 학문이 있어 진사에 올랐으나 부모에 대한 효 성이 지극하여 32세에 부친상을 당하고는 너무도 비통한 나머지 호곡(號哭) 끝에 병을 얻 어 세상을 떠났으니 나라에서 정문(旌門)을 내린분이다. 스승 남명이 이 소식을 듣고 비감하여 서를 위해 시를 지었는데,
中夜叫號瑞節孝(중야규호서절효) 한밤에 울부짖는 서의 효성은
鬼神聞此亦應悲(귀신문차역응비) 귀신마저 이를 듣고 슬퍼하더라.
강수남은 아버지 서의 의리를 쫓아 그도 또한 남명을 찾아 사사(師事)하게 되니 부자 2대 가 남명의 문인이 되었으며, 남명이 특히 그를 총애하였다. 그는 타고난 재명으로 학문이 뛰어났으니 일찍 벼슬길에 올라 28세에 전적(典籍)을 거쳐 병조정랑(兵曹正郞)에 올랐다. 성품이 순후하고 단정하여 상하동료간에도 신망을 결코 저버리는 일이 없었으니 항시 사람들의 규범이 되어 왔다.
 
임진란에 떨어진 별
선조 25년 4월, 왜군 16만이 느닷없이 쳐들어와 일시에 조선강토를 짓밟으니 이른바 임진 왜란이다. 파죽지세의 왜군은 단숨에 한성을 점령하고 그 여세를 평양으로 밀어 올리니 도성(都城) 을 빠져나온 선조임금은 의주로 파천하였다. 이때 경기감사 심대는 홀로 경기도땅 삭령(朔寧:경기도 연천)에 진을치고 왜군을 맞아 싸울 채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경기감사 심대의 막하에는 군무를 맡길만한 인재가 없어 감사는 이를 몹시 고민하고 있던중 조정에서는 병조정랑 강수남을 보내 이 일을 맡도록 하였다. 그가 어명을 받들어서 심대의 군진(軍陳)으로 도임해 보니 허술한 군비에다 군사 또한 오합지졸이라 한심하기가 이를데 없었다. 그러나 장부가 이미 내친 걸음이라 그는 경기감사 심대와 의논하여 국난에 목숨을 던지기로 서로 맹세하니 이를 지켜본 군졸들 또한 사기백배하여 이들의 뒤를 따를 것을 소리높이 외치고 나섰다. 그리하여 경기감사의 군진에는 하루 아침에 병사들의 사기가 하늘을 찌른 가운데 드디어 왜군과 한바탕 결전의 날이 온 것이다.
이날 아침에 그는 가솔들을 불러놓고 이르기를, 『필시 내게 불행한 일이 있을 것이나 나의 시신일랑 전장에 가서 찾도록 하라』하고는 스스로 상투 끝에다 붉은 실을 매어서 표식을 하고 나갔다. 그날 하루종일 삭령 벌판에서는 전투가 벌어져 쌍방간의 시체가 산더미로 쌓여갔다. 그는 감사와 함께 군졸들을 독려하면서 끝까지 버티었으나 마지막 화살은 다하고 역진(力盡)하니 주먹으로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그러나 어쩌랴, 대세는 이미 기울고 화살은 바닥이 났으니, 그는 경기감사 심대와 함께 멀리 의주 땅을 향해 북향사배(北向四拜) 한후 남은 군졸들을 수습하여 적진으로 달려가 끝내 장렬하고 처절한 최후를 마쳤던 것이다.
 
가노(家奴), 검산(檢山)의 죽음
그에게는 검산이라는 종이 있었다. 종 검산은 항시 주인 곁을 지키는 충복(忠僕)이였다. 전쟁터에서도 그의 곁에 이 충직한 검산이 항시 지키고 있었음은 두말 할 나위가 없다. 종 검산이 바로 이날에, 주인의 장렬한 최후를 끝까지 지켜보게 되었던 것이다. 검산은 주인의 시신을 붙잡고 통곡하더니 『상전이 죽었는데 종은 살아서 무엇 할꼬』외 치며, 적진으로 달려가 그도 또한 왜병의 칼에 죽었으니 이 얼마나 충직스러운 죽음이였으랴.
 
상투의 붉은 실로 시신을 찾아
싸움이 끝나고 수백 수천의 시체더미에서 가족들은 다만 상투에 매인 붉은 실의 표식만으로 간신히 그의 시신을 수습할 수가 있었다. 그리하여 종 검산의 시신과 함께 고향땅 선산밑에 장사를 지내니 선조 임금은 관원을 보내 제사를 지내게 하고 특히 제문에 쓰기를 「먼저 가족을 영결하면서도 국사에 죽기를 서약했고, 나라 위해 죽은 주인을 따라 목숨을 버린 노복 또한 늠름하도다. 그 충절 천고에 빛이 나리라.」 하였다. 이어 선조는 그에게 특명으로 승정원 도승지를 추증하는 한편, 종 검산을 복호하였다. 광해군때 다시 이조참판이 증직되고 1709년 중신들의 주청으로 자헌대부, 이조판서의 증직과 충열(忠烈)의 시호가 내려졌으며, 3년뒤 1712년 역시 중신들의 주청에 의해 경기감사 심대와 똑 같은 예우로서 「一體旌閭」 네글자의 어필(御筆)을 하사하여 어강서원(漁江書院)에 향사하게 하였다. 이어 1791년에는 다시 삭령의 표절사에 배향하니 임진년의 국난에 순절한 그의 위국충절(爲國忠節)은 후세에 까지도 길이 빛이 나고 있다.

칠정려

기본정보

  • 지정번호 : 경상남도 기념물 제35호
  • 지정일자 : 1977년 12월 20일
  • 소 재 지 : 경남 의령군 의령읍 동동리 1134-1 외 2필지

소개

칠정려 이 건물군은 조선시대의 진양강씨 문중이 낳은 일곱 분의 충효열 삼강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정려각(旌閭閣)으로써 일명 삼강문(三綱門)으로도 불리며 6동(棟)의 건물이 한곳에 자리 잡고 있다.

제1려 강 우(姜 瑀)

자는 백규(伯圭) 호는 모암(慕庵) 이니 청풍군수 혜의 증손이며 남명과 종유 하였다. 연산 을묘생(1495)으로 1513년 성균진사 1517년 모부인 중상일에 여막에서 계서 1744년에 효정 1847년 충효사에 배향

제2려 강 서(姜 瑞)

자는 숙규(菽圭) 호는 매곡(梅谷)이니 진사 우(瑀)의 아우요 남명 문인이다. 중종 경오생(1510년)으로 1537년 성균진사 1540년 부친상에 침점멸성 1544년 효정

제3려 강 수 남(姜 壽 男)

자는 인수 호는 사월정(沙月亭) 진사 서(瑞)의 아들, 생부는 충순위도 명종 임자생(1552년)으로 돈대산 사월정지에서 서식강도
  • 1580년 별시 문과 주서 전적 양성현감 호병정랑
  • 1592년 충장공 심대(沈垈) 종사관으로 출전
  • 1592년 10월 18일 삭령전에서 순절
  • 1608년 8월 28일 치제(致祭) 증 도승지(贈 都承旨)
  • 1609년 증 이조참판
  • 1709년 증 이조판서 사시 충렬(賜諡忠烈)
  • 1712년 어필특서 일체정려(一體旌閭) 4자
  • 1791년 10월18일 삭령 표절사 사액치제 의령 정곡 어강서원 제향
  • 1909년 사월정 중건 제향

제4려 강 기 룡(姜 起 龍)

자는 응문(應文)이요 호는 동호(東湖)며 직장 복남(福男)의 아들로 진사 우(瑀)의 본생손이다. 생년은 전하지 않으며 음전력부위(蔭展力副尉)
  • 1592년 창의하여 진주성에 참전
  • 1593년 6월 그믐 순절
  • 1847년 백형 초정(草亭)공과 같이 충효사 배향
  • 1861년 증 이조참의 충정(贈 吏曹參議 忠旌)

제5려 열부 허씨 정려

열부허씨정려는 강시주처 김해허씨의 열정을 기리기위하여 고종 19년(1882년)에 지은 맛배집이다.

제6려 강 재 중(姜 在 重)

자는 거보(擧甫)요 호는 수재(修齋)이니 진사 우(瑀)의 9세손이다. 부부구효지극(夫婦俱孝至極). 1905년 효정(孝旌)

제7려 강효부 조씨(姜孝婦 趙氏)

효자 강재중의 처 함안조씨 생육신 여(旅)의 후예
쌍효정려는 수제공 강재중과 그의 처 함안 조씨의 효성을 기리기 위해 고종6년(1869년) 왕명으로 세웠다.
참고-의령군지, 2003.
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