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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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운강서원(雲崗書院)
   경상남도 진주시 금곡면 금암리 운문마을
   하공진(河拱辰) 하 륜(河 潤)
   미 상
   1718년(숙종 44)
   2월 23일
   
고려의 문신인 하공진(河拱辰)과 조선 전기의 문신인 하윤(河潤)을 모시기 위해 세운 서원이다. 서원의 창건 연대는 미상이며, 1718년(숙종 44)에 지방 유림들이 국가에 청원하여 사액서원으로 지정되었다. 그 후 1869년(고종 6)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80년에 재건되었다.

1)주벽-하공진(河拱辰, ?~1011)
고려 전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994년(성종 13)에 압강도구당사(鴨江渡勾當使)가 되었다. 목종 때 중랑장(中郎將)으로서, 목종이 병들어 자리에 눕자 친종장군(親從將軍) 유방(庾方), 중랑장 탁사정(卓思政) 등과 함께 목종이 거처하는 궁궐 주변을 지켰으며, 얼마 뒤 상서좌사낭중(尙書左司郎中)이 되었다.
1010년(현종 1)에 일찍이 동서계(東西界)에 있을 때 임의로 군대를 동원하여 동여진(東女眞)의 촌락을 치다가 패한 일이 드러나 유배당하였다. 그 해 거란의 성종이 목종을 시해한 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핑계로 고려에 침입하자 유배에서 풀려났다.
호부원외랑(戶部員外郎) 고영기(高英起)와 함께 군사 20여명을 거느리고 남쪽으로 피난 중이던 현종을 뒤따라가 양주에서 거란군의 철수교섭을 자청, 국왕의 사절로 거란 성종을 만나 군대를 철수시키는 데 공을 세웠다. 고영기와 함께 거란에 볼모로 잡혀 가 거란왕에게 신임을 받았으나, 탈출을 꾀하다가 실패하여 연경(燕京)으로 옮겨져 양가(良家)의 딸을 아내로 맞아 살면서 철저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
평소 저자에서 준마(駿馬)를 많이 사 고려로 가는 길에 배치하여 두고 귀국을 꾀하다가 탄로가 나 거란왕의 국문(鞠問)을 받게 되었다. 거란왕은 온갖 악형과 회유로 신하가 될 것을 요청하였으나 이를 완강히 거절하였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심한 모욕적인 말로 응대하여 거란왕을 크게 격분시킴으로써 살해된 뒤 간마저 꺼내져 씹히기까지 하였다. 상서공부시랑(尙書工部侍郎)에 추증되었다.
 
2)하윤(河潤, 1452~1500)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수부(睡夫), 호는 운수당(雲水堂). 아버지는 현령 계지(繼支)이며, 김지경(金之慶)의 문인이자 사위이다.
1477년(성종 8) 생원·진사의 양시에 합격하고 1483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 검열에 보직되었다. 1487년 예문관봉교로서 파출되었던 임사홍(任士洪)의 서용을 극력 반대하였다.
1489년 예조좌랑으로서 민정을 살피는 임무를 띠고 영안도(永安道)에 나갔으나 이듬해 모친상으로 사직하였다. 1494년(연산군 즉위년) 호조좌랑, 이듬해 형조좌랑이 되었으나 연산군의 난정(亂政)으로 사퇴, 고향으로 돌아가 행우산(行于山) 기슭에서 은거하였다.
1498년 지평으로 폐비윤씨(廢妃尹氏)의 입묘추숭(立廟追崇)의 그릇됨을 극간, 곧 순천군수로 나가 무오사화의 화를 면하였으나 임지에서 죽었다. 정광필(鄭光弼)과 친교가 있었으며, 진주 정강서원(鼎岡書院)에 제향되었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 신문, 3칸의 강당 등이 있다. 별묘인 경인사(景仁祠)는 영정을 모신 곳으로 앞면 3칸·옆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강당은 정면 3칸·측면 2칸의 규모이며 지붕은 팔작지붕이다.


참고- 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