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동산서원(東山書院)
   경상남도 창녕군 이방면 동산리 93
   노선경(盧善卿) 노극홍(盧克弘) 노세후(盧世厚) 노 해(盧 垓)
   1829년(순조 29)
   
   불향
   창녕동산서당소장 광산노씨세보(昌寧 東山書堂 所藏 光山盧氏世譜)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367호(2005.01.13지정)창녕동산서당소장 한강연원록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368호(2005.01.13지정) 창녕동산서당소장책판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369호(2005.01.13지정) 창녕동산서당강당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370호(2005.01.13지정)
사간(司諫) 노선경(盧善卿), 증 이조참판(贈 吏曹參判) 노극홍(盧克弘), 월촌 노세후(月川 盧世厚), 증 이조참의(贈 吏曹參議) 노해(盧垓)의 학덕을 기리기 위해 1829년(순조 29)에 창건하였다. 사액은 받지 못하였으며, 고종 5년(1868)에 훼철되었다.
그 후 55년이 지난 1923년에 후손과 사림들이 그 유허지에 집을 세워 동산사당이라 이름 하였다. 그 齋는 재성재(存誠齋), 당은 고경당(居敬堂), 문은 유의문(由義門), 누는 구인루(求仁樓)이다.

1)주벽-노선경(盧善卿, 생몰년 미상.)
조선 세종 때의 문신.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양필(良弼). 호는 동악(東岳). 아버지는 도염서승(都染署丞) 갑생(甲生)이다. 1435년(세종 17) 식년정시(式年庭試)에 병과로 급제, 서승(署丞)이 되었고, 이듬해 중시(重試)에 발탁되어 사간원에 들어갔다.
1464년(세조 10) 승(僧) 원각(圓覺)이 왕에게 아뢰어 도성 안에 절을 짓고, 또 왕을 청하여 황곡사(篁谷寺)에 가자 그 옳지 못함을 상주하여 원각을 참수시킨 일이 있었다. 권귀(權貴)의 미움을 사서 함양군수로 좌천되었다가, 다시 고령현감이 되었다.
관직에서 물러나서는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전념하였다. 저서로는 ≪동악고≫가 ≪광주노씨세고 光州盧氏世稿≫에 수록되어 있다.
 
2)노극홍(盧克弘,1553~1625)
조선 중기의 학자·의병장.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의보(毅甫), 호는 옥촌(沃村). 창녕(昌寧)에서 출생. 아버지는 부정(副正) 엄(儼)이며, 어머니는 청주정씨(淸州鄭氏)로 증 판서(贈判書) 사중(思中)의 딸이다. 외삼촌인 정구(鄭逑)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학문에 침잠, 천인(天人)·성명(性命)을 깊이 궁구하였다. 아버지는 일찍 죽고, 어머니의 엄격한 훈도로 자랐다. 형제간에 우애가 지극했으며,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는 자제들을 이끌고 의병장 곽재우(郭再佑)의 휘하에 들어가 서기(書記)·참모(參謨) 등으로 활약, 왜적과 싸웠다.
그 후 정유재란 시에도 다시 화왕산성(火旺山城)에 들어가 방어하였는데, 곽재우가 상(喪)을 당하여 귀향, 의병들의 사기가 떨어지자 동지(同志)들과 합심하여 민심을 수습, 화왕산성을 끝까지 지키는데 공을 세웠다. 만년에는 후진의 교육에 힘썼다.
학행으로 조정에서 벼슬이 주어졌으나 취임치 않다가 노인직으로 첨지중부사에 제수되었다. 저서로는 <옥촌고 沃村稿>가 ≪광주노씨세고 光州盧氏世稿≫ 중에 수록되어 있다.
3)노세후(盧世厚, 1583~1663)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세순(世順), 호는 월천(月川). 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의병활동으로 지중추부사가 된 극홍(克弘)이다. 일찍부터 학문에 뜻을 두어 정구(鄭逑)에게서 배웠다.
성리학에 잠심하여 상수학(象數學)·정전법(井田法) 등에 정통하였다. 임진왜란 때에는 아버지 극홍과 함께 정구·곽재우(郭再祐)의 휘하에서 의병으로 싸웠다. 정구로부터 학문을 인정받았고, 벼슬에 뜻을 두지 않고 초야에서 숨어 살았다. 아버지 노극홍과 함께 동산서원(東山書院)에 제향되었다.
 
4)노해(盧垓, 1598~1663)
자(字)는 자굉(子宏)이고, 호는 국담(菊潭)이니, 극홍의 손자다. 정구의 문인으로 병자호란 때 창의하여 김상헌과 뜻을 같이하였다. 이조참의에 증직되었으며, 일고(逸稿)가 있다.

1)창녕동산서당강당-경상남도 문화재자료 제370호(2005.01.13지정)
강당인 동산서당은 정면 5칸, 측면 1.5칸의 전퇴집으로, 평면은 좌측부터 1칸의 온돌방(存誠齋-존성재), 마루 3칸, 1칸 온돌방(居敬堂-거경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좌우 온돌방 앞에는 툇마루보다 한단 높은 마루를 돌출시키고 삼면에 계자각 난간을 시설했다. 강당은 마루를 가운데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두는 대칭적인 평면으로, 일반적인 서당건축의 형식을 따라 건축되었다. 전퇴가 발달하고 양 측면과 배면에 쪽마루를 시설한 것, 온돌방의 주간이 마루 주간보다 큰 것, 창호형식과 세부기법 등에서 근대기 서당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다.
강당은 겹처마 팔작집으로 상부구조는 5량가로, 시멘트 모르타르로 마감한 기단 위에 화강석으로 만든 2단의 팔각 초석을 놓고 그 위에 기둥을 세운 다음 대량과 종량을 차례로 올려 지붕틀을 구성했다. 정면과 전퇴부에 소로를 촘촘하게 끼워 넣어 수장했다. 초석은 화강석을 팔각형으로 다듬은 것으로, 정면에 팔괘를 새겨 장식했다. 종보 위에는 판재로 만든 격자형 반자를 꾸몄다. 처마는 隅柱(우주) 쪽으로 가면서 위로 휘어 오른 형태이다. 건축형식은 출목 없는 이익공으로 익공쇠서의 형태는 섬약하고, 상부는 蓮花(연화)를 새긴 형태이다. 보머리에도 鳳頭(봉두)를 끼워 장식했다. 익공 쇠서의 內端(내단)을 보아 지형으로 뽑아내어, 들보와 기둥이 견실하게 조립될 수 있게 했다.
유의문은 맞배지붕의 작은 일각문으로, 기둥 전후로 뺄목을 길게 돌출시켜 거기에 지붕을 올려놓았다. 또 지붕처마의 처짐을 막기 위해 뺄목 끝에서 기둥 하부로 비스듬히 가새를 대어 지붕하중을 지탱하고 있다. 기둥 상부에는 이익공 쇠서를 서로 마주보게 끼워 넣어 장식했다.
동산서당의 강당과 유의문은 건축형식과 세부 기법 면에서 특징적이지 않으나 실용성과 경제성을 중시한 근대기에 건축된 서원이라는 점에서 가치를 지니고 있다. 근대기 한옥으로 당시 다양하게 발전하는 한옥의 변천과정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건립연대는 오래되지 않으나 보존가치가 있는 서당의 강당이다.

1)창녕 동산서당 소장 광산노씨세보(昌寧 東山書堂 所藏 光山盧氏世譜)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367호(2005.01.13지정)
창녕 동산서당 소장 광산노씨세보는 표제(表題) 및 내제(內題)와 판심제(版心題) 모두 <光山盧氏世譜>로 되어 있으나, 서문은 ‘光山盧氏族譜序’(광산노씨족보서)라 되어 있다. 위아래 도곳에 화문어미(花紋魚尾)가 있으며, 사방 둘레가 굵은 단선(單線)으로 처리되어 있다. 서문 부분에는 계선(界線)이 없고, 반곽을 상하 6단으로 나누어 보계(譜系)를 기록하고 있다. 판종(版種)은 목활자본(木活字本)이다. 표지를 포함하여 제1책은 102장, 제2책은 120장이다.
서문 4편과 발문 2편이 책머리에 실려 있다. 첫째 서문은 송천 노석후(松川 盧碩厚)의 글인데, 임진왜란을 거치면서 잃어버린 집안 기록을 정리하여 처음으로 족보를 내집(內集)과 외집(外集)의 형태로 완성한 뒤 1686년에 써 둔 것이다. 둘째 서문은 송천(松川)의 증손 인암 노륜(忍庵 盧倫)의 글인데, 이 책의 간행이 자신의 증조 대부터 자신의 대에 이르기까지 4代의 숙원 사업 이라면서, 간행은 현풍(玄風) 예촌(禮村)이고 서문을 쓴 때는 숭정 기원후(崇禎 紀元後) 세 번째 壬午(서기 1762년) 3월이라 밝히고 있다.
<光山盧氏世譜>는 조선후기 선남후녀로 기록방식이 바뀌어 지기 전의 모습을 잘 보여주고 있으며, 족보로서의 객관적 진실성을 담보하고 있다고 판단된다.
처계(妻系)나 외계(外系) 및 외손(外孫)에 대한 기록의 정밀성 등은 혈연의 계보를 정확하게 기록하려는 전형이라 할 만하다. 따라서 이 책은 초간본이면서 희귀한 고문서이다.
 
2)창녕 동산서당 소장 한강연원록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368호(2005.01.13지정)
표제(表題)는
참고-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