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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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소곡서원(蘇谷書院)
   경상남도 창녕군 고암면 우천리 922
   노변소(盧抃素) 노 침(盧 沈) 노홍언(盧弘彦)
   1650년경
   
   불향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376호(2005.07.21지정)
소곡서당은 1650년경 창건된 소곡서원이 창건 200여년 후 퇴락됨에 따라 1856년 병진 철종 8년에 재건한 “소곡서당”은 경남 창녕군 고암면 우천리 775번지에 위치한 조선 후기 서당 건축의 형식과 구조를 잘 갖추어 축조된 건물로서 경상남도 문화재 자료 제376호로 지정 관리되고 있으나, 전설에 의하면 위 같은 마을 蘇吐谷(소토곡) 大犢山(대독성) 자락의 빈터에 위치하였다는 “소곡서원”은 임란에 화재를 입고 그 흔적이 전무하나 당시 불타고 남은 연목 등을 옮겨 왔다는 전언 등이 남아있을 뿐이다.
1642년(인조20년)~1742년(영조18년)에 이르도록 조선후기 서원 사우 등에 대한 여러가지 사항을 엮은 “書院謄錄(서원등록)”에 의하면 인조20년(1620년)부터 왕의 재가를 얻어야 서원이 설치될 수 있었다고 적고 있으나, 아쉽게도 영조2년(1726년)에서 영조12년(1736년)까지 11년간의 사실이 결본되어 “소곡서원”의 등록 사항을 찾아 볼 수가 없으나,(규장각 소장본 1~6권의 축소 영인본 참고) 경자년(1900년)에 발간한 “창녕현지”의 사우 편에 “소곡서원”으로 기록되어 淸敏公(청민공) 盧抃素(노변소), 참봉 盧沉(노침), 진사 盧弘彦(노홍언) 3인을 合享(합향) 하였다고 적고 있으며, “嶠南誌(교남지)” 권지 75 창녕군 편의 校院欄(교원란)에 冠山書院(관산서원), 勿溪書院(물계서원), 燕巖書院(연암서원), 高岡書院(고강서원), 蒼山書院(창산서원), 光山書院(광산서원), 東山書院(동산서원), 蘇谷書院(소곡서원) 등이 기록되어 있으면서 역시 위의 3인을 享祀(향사) 하였다고 적고 있고, “雲下見聞錄(운하견문록)” 내의 “道內各邑書院毁撤査括成冊草(도내각읍서원훼철사괄성책초)”에 의하면 “소곡서원”이 서원 철폐령에 의거 재차 훼철질에 훼철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전답과 전재는 없고 保率(보솔)은 “甲子因京關疤定軍伍(갑자인경관파정군오)”(갑자년에 수군을 비롯하여 어영군, 마군, 사고군 등 타군에 충군 되었다는 의미임)라고 명백하게 적고 있음으로 문헌상으로는 갑자년(1864년)에 훼철되었다는 기록이 보존되고 있음이 고증되었다

1)주벽-노변소(盧抃素, 생몰년대 미상)
자는 회문(繪文)이고 초명은 참(旵)이니, 고려 말 상국 명신의 손자이다.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가 되었다.
고려 말 정변을 당하여 정몽주와 뜻을 같이 하였다. 태조가 등극하여 그를 불렀는데, 대궐에 나아갈 때도 소복(素服)을 바꾸지 않고 면전에서도 읍(抃)만 할 뿐 절(拜)을 하지 않았다. 이에 태종이 웃으면서 “옛 매무새를 고치지 않으며, 읍만하고 굽히지 않으니 ‘抃素子’라 부를 만하다”고 하여 그를 노변소라 하였다. 부윤을 제수하였으나 시를 지어 불굴의 뜻을 밝히고 숨어 살다가 생을 마쳤다. 청백으로 生祠堂이 세워졌으며, 자헌대부 대호군에 증직되고 淸敏이라는 시호가 내렸다.
 
2)노침(盧沈,1526~1591)
노변소의 현손으로 자는 景昇, 호는 晩翠, 또는 둔옹(遯翁)이라 하였다. 명종 때 성균진사가 되었으며, 학행과 문장으로 이름이 높았다. 건능원 참봉을 제수 받았다.
 
3)노홍언(盧弘彦, 생몰연대미상)
성균 진사로서 임진란 때 창의하여 대산성에서 싸웠다. 왜적이 어머니를 죽이려 하자 몸으로 막아 싸우다가 죽었다. 조정에서 정문을 세웠으며, 절효(節孝)라는 시호가 내렸다.

소곡서당의 현 배치형태는 튼ㅁ자 형으로, 남북 축선 상에 대문채와 강당을 두고, 그 정면 좌우에 관리사와 영사정이 자리 잡고 있다. 소곡서당과 관련하여 남쪽 500여 미터 지점에 청민공묘(기념물 153호)가 자리 잡고 있고, 북쪽 500미터 지점에는 절효공(節孝公) 노침(盧沈)의 묘가 있다.
강당은 대문채 정면에 자리 잡고 있는 건물로, 지붕 내림마루 끝에 사용한 망와의 ‘함풍(咸豊) 6年’이란 명문으로 미루어 볼 때 1856년에 건립한 건물로 볼 수 있으나 망와의 경우 재사용될 수도 있으므로 망와의 명문만으로 건축연대를 추정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전퇴를 둔 중당협실형의 평면, 온돌방 천장의 고졸한 고미반자 형식, 측면 2칸 중 반간은 전퇴, 한 간반은 온돌방으로 사용하는 평면 구성형식과 창호구성을 살펴 볼 때 적어도 19세기말에는 건축된 것으로 보인다.
정면 4칸, 측면 2칸 규모의 중당협실형(中堂夾室形) 건물이다. 좌우 온돌방 정면에도 현판을 달았는데, 좌측 온돌방은 청아헌(淸雅軒), 우측 온돌방은 ‘양진당(養眞堂)’이라 했다. 평면은 가운데 개방된 2칸 마루를 두고 좌우에 온돌방을 들였으며, 전퇴에는 툇마루를 시설했다. 개방된 중앙 마루 배면에는 쪽마루를 꾸몄으며, 이 쪽마루 끝에 맞추어 좌우 온돌방의 뒷벽이 시설되어 있다. 창방과 처마도리 받침 장여 사이에 소로를 끼운 소로수장집으로, 건물의 구조는 막돌 허튼층쌓기 한 3척 정도의 기단 위에 막돌초석을 놓고 기둥을 세우고 3량가(樑架)의 상부가구를 받게 했다.
강당은 전통건축의 강당형식을 충실히 따라 건축된 것으로, 조선 후기 창녕지방 서당건축의 형식과 구조를 잘 보여준다. 강당은 3량기의 간략한 구조 수법을 사용한 소로수장집으로, 자연스럽게 흰 곡재(曲材)를 대들보로 사용하여 종대공을 생략했다. 건축적 특징으로 기둥 상부에 보아지를 끼워 넣어 고정시키고, 보모리를 파고 주두를 올려놓는 기법, 처마에 굴도리 사용, 소로수장, 알추녀, 기둥의 민흘림 기법, 산석(山石) 초석, 대들보 등에 육송 대신 활엽수를 적극 사용한 점을 들 수 있다.


참고-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