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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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인천서원(仁川書院)
   경상남도 하동군 북천면 서황리 954
   최 탁(崔 濯)
   1719년(숙종 45)
   
   9월 중정(中丁)
   경현당(景賢堂)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395호(2006.04.06지정)
1719년(숙종 45)에 지방 유림과 전주최씨 후손들이 최탁(崔濯)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여 옥정리 남포마을에 창건하였다. 1868년(고종 5) 서원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는데 1903년에 최탁이 태어난 북천면 서황리에 경현당(景賢堂)을 세우고 인천서원의 현판을 옮겨 걸었다. 1960년에 경현당 뒤에 사당인 경인사(景仁祠)를 건립하여 인천서원에 모시던 네 인물의 위패를 봉안하였다.

1)주벽-최탁(崔濯, 1598~1645)
조선 중기의 무신.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극수(克修), 호는 죽당(竹塘). 아버지는 군수 기변(琦抃)이다. 1630년(인조 8) 무과에 급제, 163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싸우다가 인조가 청나라 태종에게 항복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가 심양(瀋陽)에 볼모로 가는 데 배종(陪從)하였다. 1645년 돌아와 죽산부사가 되었으나, 곧 사퇴하고 속리산에 은거, 벼슬을 버린 죄로 남양에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나 재자관(齎咨官)으로 청나라에 들어가게 되자 눈물을 흘리며 청나라 오랑캐에게 칭신(稱臣)할 수 없다면서 벼슬을 사퇴하려 하였다. 임금의 간곡한 당부로 부득이 청나라에 갔다가 돌아오는 도중 옥하관(玉河關)에서 병사하였다. 평소 자손에게, 자신이 죽은 뒤 묘비에 청나라 이후의 관직을 새기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우부승지에 증직, 인계서원(仁溪書院)에 제향되었다.
 
2)최득경(崔得經, 생몰연대미상)
태종조와 세조조에 문과에 급제하여 영평군수와 형조판서를 역임하였다. 후에는 세상의 어지러움을 보고 자연에 은거하면서 書史로 세월을 보냈다. 전주최씨 판서공파의 파조가 되었다.
 
3)최기필(崔琦弼, 1562~1593)
조선 중기의 의병. 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규중(圭仲). 호는 모산(茅山). 천성이 어질고 품행이 발라 일찍이 지방관의 추천을 받아 봉사가 되었다. 진주부관을 지낸 뒤, 관직에서 물러나 진주 서쪽 백운동(白雲洞)에 살며, 젊은 유생들과 함께 학문과 도의를 강론하였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항왜구국(抗倭救國)의 대의를 성언(聲言)하며 관군·의군의 적 토벌을 지원하였다. 이듬해 적군이 후퇴할 무렵, 가토(加藤淸正) 등이 진주에서의 패전을 복수하려고 많은 군사를 진주로 집결하여 진주성이 위태로워지자 6,063명의 의병을 이끌고 성안으로 들어가 김천일(金千鎰)·최경회(崔慶會)·황진(黃進) 등 수성장(守城將)들과 합심, 분전하였다. 그 해 6월 성이 함락됨과 함께 남강(南江)에 몸을 던져 순국하였다. 뒤에 창렬사(彰烈祠)에 향사되고,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4)김성운(金聖運, 생몰연대미상)
울산 김씨로 호는 주담(珠潭)이며, 백암공(白岩公) 대명의 후(後)이다. 학행이 뛰어나고 문필의 대가였으며, 주담(珠潭)에 재실을 짓고 날마다 악기를 연주하고 시를 읊조리면서 풍류생활을 하였다. 문집 4권을 남겼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廟宇), 3칸의 강당, 신문(神門), 3칸의 고사(庫舍), 외문(外門) 등이 있다. 묘우에는 최탁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강론장소로 사용되어왔다.


참고-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