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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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원계서원(遠溪書院)
   경상북도 경산시 와촌면 계전리 489
   송응현(宋應賢) 송 걸(宋 傑)
   1927년
   
   2월 하정(下丁)
   
임진왜란때 큰 공을 세운 송응현(宋應賢)과 그의 아들 주부공 양곡(陽谷) 송걸(宋傑)을 배향하기 위해 세워졌다. 1927년 사림에 의해 원계서원(遠溪書院)이라는 이름을 얻었고 지금의 건물은 1972년에 세워진 것이다. 골새마을 뒤쪽의 산자락에 동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송응현(宋應賢)
자는 사희(士希), 호는 양오당(養吾堂), 본관은 은진이며 쌍청당 송유(雙淸堂 宋愉)의 5대손이고 인수(仁壽)의 아들이다. 회덕군 동면 달감리(대전 동구 마산리)에서 출생, 문무를 겸비하여 조정에 선발되어 정사에 힘썼으나 권신선배들의 미움을 받아 영남으로 내려와 객지로 전전하다가 밀양 화악산 아래 살면서 인근에 정사를 지어 양오당이라 이름하고 후진양성에 진력하였다. 그의 벗 곽망우당도 그 서당에 기문을 써 주셨다. 그 후 임진왜란이 일어나 선생이 아들 걸과 함께 의병 수백을 일으켜 왜병과 대적하다 부자가 함께 의사하고 말았다. 이때 공의 배위인 영인 광주 김씨 역시 적에게 굴하지 않고 목숨을 끊으니 모두가 말하기를 아비는 나라를 위해 순국했고 자식은 아비가 죽자 효심으로 죽었으며 아내는 또 남편을 따라 자결하였으니 열부라 칭찬하였다. 충, 효, 열이 송씨 일문에서 나왔다고들 말하였다. 장계가 조정에 상진 되어 을사(1905년)에 부자가 함께 선무원종공신 이등에 수록되고 녹권도 하사받았다. 아들도 주부(主簿)로 증직되었다. 대구시 망우당공원 임난호국 영남충의단에도 배향되었고  후손들이 경산시 하양읍 정천리에 청전정사를 지었다.

충의문(忠義門)이라 편액한 산형대문(山形大門)을 들어서면 좁은 마당을 사이에 두고 강당이 자리 잡고 있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 규모의 맞배기와집이며, 평면은 가운데의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좌우에 온돌방을 둔 중당협실형(中堂挾室形)이다. 대청에는 우물마루를 깔았고 전면에는 툇마루를 설치하였으며, 좌측방은 집의당(集義堂), 우측방은 경의재(敬儀齋)라 편액하였다. 가구(架構)는 3량가(三樑架)의 간결한 구조이며 처마는 홑처마이다. 사당(祠堂)은 강당 뒤의 경사진 대지위에 자리 잡고 있는데, 주위에는 담장을 둘러 별도의 공간을 이루고 있다. 평대문(平大門)으로 이루어진 내삼문(內三門)을 들어서면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사당이 묘(廟)의 공간 주임에 자리 잡고 있다. 사당은 충덕사(忠德祠)라 편액하였는데, 평면은 전면에 퇴칸(退間)을 두지 않고 내부를 모두 통칸(通間)으로 구성하였다. 기둥은 정면과 측면에만 원주(圓柱)를 사용하였으며 기둥위에는 이익공(二翼工)으로 장식하였다. 가구(架構)는 대량(大樑)위에 동자주 대공(童子柱 臺工)을 세워 마룻대와 장혀를 받게 한 3량가(三樑架)의 간결한 구조이다. 처마는 겹처마이고, 지붕은 맞배기와집인데 양측 박공면(朴工面)에는 풍판(風板)을 설치하였다.

원계서원 탐방
 
경상북도 하양읍 와촌면 계전1리에는‘원계서원(遠溪書院)’이 있다. 이 원계서원에는 임진왜란(壬辰倭亂) 때에 큰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이등(宣武原從功臣二等)에 병록(幷綠)된 양오당(養吾堂) 송응현(宋應賢) 선생과 그의 아들인 양곡(陽谷) 송걸(宋傑) 선생이 배향되어 있다. 두 선생에 관한 기록을 찾아볼 길은 막연하고, 오직 통정대부(通政大夫) 비서원승규장직각(秘書院丞奎章直閣)을 지낸송규헌(宋奎憲) 선생의「墓碣銘(묘갈명)」만이 선생의 일을 기술하여 현재까지 전하고 있는데, 양오당 선생의 어렸을 적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서술하였다.
“선생은 대대로 무관(武官)의 집안에서 태어나 성품이 대범하였으며, 또한 큰 뜻을 품고 있었다.
더욱이 독서를 좋아하여 일찍이 어질고 뛰어나다라는 평을 들었으며, 문무(文武)를 겸비하기 위하여 무도(武道)를 익혔다.”
은진(恩津) 송씨(宋氏)가 회덕(懷德)에 터를 잡고 번창하기 시작한 것은 세종(世宗) 때의 학자인 쌍청당(雙淸堂) 송유(宋愉: 1389-1446) 선생 때부터이다. 쌍청당 선생은 맑고 곧은 인품으로 당대의 명현(名賢)들과 교류하면서 고결한 삶을 이룬 분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지평(持平)을 지낸 계사(繼祀) 선생과, 사직(司直)을 지낸 계중(繼中) 선생의 두 아들을 두었다. 이로부터 은진 송씨는 대표적인 양반으로 부상하게 되는데, 지평공과 사직공의 후손들을 살펴보면, 지평공의 자손들은 주로 문관(文官) 벼슬을 지냈음에 비하여 사직공의 후손들은 주로 무관(武官)의 벼슬을 지냈음을 알 수 있다.
곧, 사직공의 5대 후예인 양오당 선생은 무(武)에 대하여 특장(特長)이 있었음과 아울러, 한강(寒岡) 정구(鄭逑: 1543-1620) 선생에게 학문의 도를 물었을 정도이니, 이는 선대(先代)인 지평공과 사직공의 정신을 본받아 문무(文武)를 겸비하고자한 점과 무관하지 않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선생은“도내(道內)의 열읍(列邑)이 와해되고, 사람들이 적에게 죽임을 당하니 이는 진실로 위급한 때로다. 평생토록 충(忠)과 의(義)로써 이야기하고 마음으로 되새겼거늘 어찌 가만히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고는 아들인 양곡(陽谷) 선생과 함께 의병 수 백명을 모집하여 홍의장군(紅衣將軍)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1552-1617) 선생과 협력하여 적을 토벌하기로 약속하였다. 하지만 의병을 이끌고 망우당 선생에게로 가는 도중 적의 대군을 만나 힘을 다해 싸우다가 양오당 선생과 양곡선생 모두 적에게 죽임을 당하게 되었으니, 이 어찌  하늘의 뜻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두 부자의 죽음을 들은 양오당 선생의 부인 광주(廣州) 김씨(金氏)는 통곡하면서“내 어찌 구차하게 홀로 살아남으리오.”라고 말하고는 선생을 따라 목숨을 끊었다. 이 후 양곡 선생의 부인 김씨는 세살배기 아이를 엎고 시신을 수습하여 청도군 각남면 내사리에 안장하였다고 전하나 이미 오래전 일이라 그 묘를 찾아보기는 힘들다.
1605년(선조 38) 도승지(都承旨)로 있던 상촌(象村) 신흠(申欽: 1566-1628)은 전지(傳旨)를 받들어 선생을 선무원종공신이등(宣武原從功臣二等)에 병록(幷綠)하였으며, 나라에서는 양오당 선생에게는 첨정(僉正)의 벼슬을, 양곡 선생에게는 주부(主簿)의 벼슬을 내렸다. 선생의 생애와 업적에 대해서는 자료의 미비함으로 인하여 자세히 고찰하지 못함이 한스럽다. 이후 송규헌 선생은 다음과 같이 명(銘)을 지어 선생의 뜻을 기렸다.
赫赫大節昭乎日月(혁혁대절소호일월)
빛나는 절개는 일월보다 빛나도다.
妻也子也成忠成烈(처야자야성충성열)
아내와 자식은 열부(烈婦)요 충자(忠子)였으니
孰其致者先生之化(숙기치자선생지화)
선생의 화감(化感)에 누가 이르리오.
吾文雖質永世傳播(오문수질영세전파)
내 글이 비록 질박하나 영세토록 전하리라.
 
경상북도 경산시 하양읍에서 신령방향으로 십여분 달리면 와촌면이 나오고, 이곳에서 조금 더 들어가면 와촌 초등학교가 나온다. 와촌 초등학교에서 백 여미터정도 지나면 우측으로 계전1리로 들어가는 표지석이 나오는데, 이 표지석을 따라 5분여를 걷노라면 계전1리마을회관이 나온다. 이 마을회관을 좌측으로 돌아 다시 우측으로 꺾어 돌면, 마을 끝부분 나지막한 산자락에 자리한 원계서원(遠溪書院)을 만날 수 있다.
원계서원은 선생이 돌아가신 후, 3백여 년이 지난 1927년에 사림의 공의에 의하여 지어졌다. 서원의 입구에 서면 우측으로 선생의 유허비(遺墟碑)가있으며, 정문은 내삼문으로 선생의 업적을 기려 충의문(忠義門)으로 편액하였다. 정문을 지나 좁은 마당으로 들어서면 정면 4칸, 측면 1칸의 서원정당이 자리하고 있으며, 서원의 좌측방은 집의당(集義堂), 우측방은 경의재(敬儀齋)로 편액하였다. 서원의 우측으로는 봉성실(奉誠室)로 편액한 협실이 있으며 정당과 협실 사이의 길을 따라 뒤로 돌아 계단을 오르면 양오당(陽吾堂) 송응현(宋應賢) 선생과 양곡(陽谷) 송걸(宋傑) 선생을 배향하고 있는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충덕사(忠德祠)를 만날 수 있다.
원계서원의 정당에 앉아 사색의 시간을 갖노라면, 전통적인 요소가 차츰 사라지고 있는 요즈음, 선대의 업적을 기리고 그 정신을 본받고자하는 후인들의 노력이 돋보이는 것 같아 한편으로는 기쁜 마음이 들면서, 또 다른 한편으로는 그 업적을 현창(顯彰)할 수 있는 사료(史料)의 부족이 아쉬움으로 남는다.(2007년 11월 횃불 통권 27호 2.28 편집위원 김상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