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제14회 석학 연속 강좌 - 천라이·양일모 교수 대담]
천라이 中 칭화대 교수
- 물욕 횡행하고 윤리 무너진 시장경제, 유교적 가치가 통합·안정 구심점
서구적 사유 한계에 대안으로 주목… 세계화 시대 국제 평화 실마리 담겨
양일모 서울대 교수
- 中 학계, 유학의 비판적 기능보다 공생·화해 앞세워 사회통합 강조
소수민족도 '중국'에 넣는 다원일체론, 논리적 충돌 극복할 수 있을까
한국학술협의회, 대우재단과
조선일보는 천라이(陳來·60) 중국 칭화(淸華)대 국학연구원 원장(철학)과 거자오광(葛兆光·62) 푸단(復旦)대 문사(文史)연구원 원장(역사학)을 초청해 '2012 제14회 석학 연속 강좌'를 갖는다. 천 교수는 중국의 전통 철학·역사·문학 등 '국학(國學)'계의 대표적 학자. 15일 공개 강연에 앞서 천 교수가 양일모(50)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동양철학)와 12일 대담을 가졌다.
양일모(이하 양)=지난 세기 중국 지식인들은 유교가 현대화 또는 사회주의 건설의 장애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최근 10년간 민·관 할 것 없이 공자와 유교에 대한 관심이 크게 고조됐다.
천라이(이하 천)=사회적 전환기는 혁명의 시대와는 다른 이데올로기를 필요로 한다. 중국의 시장경제가 발전하면서 도덕과 개인의 성공이라는 가치가 나날이 충돌하게 됐다. 청년층은 대인관계와 삶의 표준을 유학에서 찾고 있다. 유교가 주는 생활규범과 가치, 문화적 귀속감은 당대 시장경제 사회를 살고 있는 중국인들의 마음의 안정과 사회 통합에 적극적인 작용을 하고 있다.
- 천라이 中 칭화대 교수(사진 왼쪽), 양일모 서울대 교수
양=대학입시 때 부모들이 합격을 기원하면서 공자묘에 참배하고, 또 공자묘에서 승진과 재운을 비는 부적을 팔기도 한다.
천=공자묘가 기복신앙의 대상이 되는 것은 동아시아에서 오랫동안 나타난 현상인데, 중국에선 소멸됐다가 최근 다시 출현하고 있다. 기복신앙은 종교의 세속적 기능 중 하나일 뿐, 종교의 본질은 사람과 사회를 위해 올바른 가치를 제공하는 것이다.
양=유교와 사회주의의 가치는 서로 충돌하지 않는가.
천=유교에서 얘기하는 근검절약, 근로의 가치는 근대화와 시장경제 건설에 기여한다. 하지만 유교 문화가 근대사회에 갖는 본질적 역할은 윤리적 가치가 시장 논리에만 빠지지 않도록 보호하는 것이다. 근대화는 피할 수 없는 과정이지만, 유교는 근대화 과정에서 나타나는 물욕의 횡행, 가치의 해체, 인간성 소외 등 부정적 요인에 대해 비판적 태도를 지닌다. 이런 기능을 외래문화와 종교로 대체할 수 없다.
양=한국 학자들은 전통 유학 속에서 지식인의 사회적 책임이나 시대에 대한 비판적 역할을 강조해왔다. 그러나 선생은 유교 이론을 바탕으로 공생과 화해 등을 앞세운다.
천=근대 이래 지식인의 비판적 기능이 강조된 것은 서양문화의 영향이다. 유교적 전통에서 현실 비판은 지식인의 한 측면일 뿐이고, 사회 풍속의 개량과 도덕윤리의 건설도 책임져야 한다. 1990년대 이래 중국은 전통 윤리가 커다란 충격을 받은 시기이기도 하다. 지식인이 현실 정치에 영합해도 안 되지만, 정치 비판만 일삼을 게 아니라 새로운 가치와 윤리를 건설해야 한다.
양=최근 중국에서는 전근대 동아시아 조공체제의 경험 속에서 세계화 시대의 국제질서를 모색하고자 하는 '천하체계' 이론이 제시되기도 했다. 현실 국제정치 속에서 가능한 이야기인가.
천=이상이 역사 속에서 실현되는 데는 역사적 상황의 제약을 받는다. 전근대 동아시아의 천하 구조는 역사적 특수 형태이지만, 그 안에는 민족국가를 초월하는 세계 관념, 무력이 아닌 형식으로 세계 평화를 도모하는 이상을 담고 있다. 이상은 현실을 개량하는 동력이므로, 현실적 설득력만을 기준으로 가치와 이상을 가늠할 수는 없다.
- 공자 탄신 2563주년을 하루 앞둔 지난 9월 27일 중국 산둥성의 한 초등학교에서, 교복 차림의 학생들이 공자상을 향해 허리를 숙여 절하고 있다. 중국 칭화대 국학연구원장 천라이 교수는“지금 중국에서 유교 문화는 도덕과 윤리적 가치가 시장 논리에 매몰되지 않도록 붙잡는 적극적 작용을 하고 있다”고 했다. /Corbis/토픽이미지
양=최근 유럽 중심의 사유 방식의 한계에 대한 대안으로 중국 문화가 떠오르고 있다. 유교가 중국을 넘어 세계적 차원의 보편성을 가질 수 있다고 보는가.
천=전근대 시기에 유교는 이미 보편성을 획득했다. 불교, 유교는 물론 다른 동양 문화의 지혜도 보편화될 수 있다. 각 문명이 가진 보편성을 인정해야 하며, 이것이 내가 말하는 '다원적 보편성'이다.
양=중국은 경제·군사적 성장을 기반으로 '대국굴기(��起)'를 표방하고 있다. 중국의 일부 지식인들은 중국이 대국굴기가 아니라 세계적 차원에서 보편성을 획득할 수 있는 '문명굴기'로 가야 한다고 주장한다.
천=중국 내에선 이를 '중화문명의 부흥'이라고 하는데, '문명굴기'라기보다는 '문화자각'을 강조한다. 중국의 부흥은 단순히 민족국가의 부흥이 아니라 '문명' 부흥의 의미를 갖는다.
양=선생은 '다원일체론' '민족문화의 중국적 주체' 등의 개념을 사용한다. 그러나 외국 학계는 '중국은 하나'라는 관점에 비판적이다. 중국 내 소수민족에도 당신의 개념을 적용할 수 있나.
천=인종의 문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소수민족은 자신만의 문화가 있다. 그러나 중화민족의 일원으로서 그 정치적 정체성은 다원일체만 가능하다. 미국인의 인종이 단일하지 않지만 공동의 국가 정체성, 문화 정체성을 갖는 것과 같다. 근대 정치의 기본 임무는 다원적·분산적 사회에서 민족 전체의 구심력을 응집해내는 데 있다. 중국인의 정체성은 결코 역사를 벗어날 수 없다.
양=선생의 관점은 유교의 도덕적 측면과 정치철학을 새 시대의 이상으로 제시하고자 하는 주장이 돋보인다. 그러나 유교문화는 중국이라는 특수한 지역과 시간 속에 전개된 것임을 간과해선 안 된다. 선생이 주창한 '다원일체론'에는 '다양한 특수성'과 '하나의 통일체'라는 상반된 논리가 섞여 있다. 둘을 이어주는 논리적 장치가 더 필요할 것으로 보인다.
☞천라이(陳來) 교수
가장 널리 알려진 현대 중국 철학자 중 한 명인 펑유란(馮友蘭·1894~1990)의 수제자이며, 중국의 대표적 ‘국학(國學)’ 학자. 1986년부터 베이징대 철학과 교수를 지내다, 2009년 ‘중국 문화 국제화의 플랫폼’을 목표로 칭화대 국학연구원이 80년 만에 다시 문을 열었을 때 초대 원장을 맡아 지금도 이끌고 있다. ‘주희의 철학’(2002), ‘중국 고대 사상문화의 세계’(2002) 등 저서는 한국어로도 번역·출간됐다.
☞양일모 교수
중국 전통철학을 포함한 동아시아 전통사상의 상호 교류와 영향, 그 현대적 적용 양상에 천착해온 학자. 서울대 철학과를 나와 일본 도쿄대 대학원 동아시아사상문화학과에서 박사학위를 받았다. 한림대 철학과 교수를 지냈으며, 올해부터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옌푸 - 중국의 근대성과 서양사상’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