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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주벽 : 이능(李能)
이능(1290〜 ?)은 고려 후기 문신으로 본관은 성산(星山)이었으나 조선 영조 때 관향을 성산・광평(星山・廣平)으로 하였다. 충숙왕(忠肅王) 복위를 위하여 이조년(李兆年)과 같이 명나라에 가서 황제에게 충숙왕의 정직함을 호소하는 글을 올렸으며, 그 결과로 충숙왕은 환국하여 복위하였다. 이러한 외교적인 훈업으로 이름을 능(能)으로 사명(賜名)하고, 벼슬이 삼중대광(三重大匡) 광평군(廣平君)에 봉해졌다. 성주 월항면 안포리 덤개마을은 봉작식읍지(封爵食邑地)였다. 그 후 벼슬을 사임하고 낙향하였고, 성주 월항면 덤개마을에 봉작식읍지(封爵食邑地)를 받았으며, 서당을 지어 후진양성에 힘썼다. 사후(死後) 임금께서 개성(開城) 종각에 이름을 새기고 화상(畵像)을 그리게 하였으며, 향축을 내리고 불천위(不遷位)로 제사를 지내게 하였다. 광평군 이능은 개성유수 이억년(李億年:성주이씨)의 사위이며, 경산소부윤(京山小府尹) 이감(李瑊:경산이씨)은 이능의 사위이다. 묘역(墓域)은 성주군 월항면 안포리에 있으며, 신도비(神道碑)가 있다. 암포서원(巖浦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2)이호성(李好誠)
이호성(1395〜1468)의 본관은 성산(星山)이었으나 조선 영조 때 관향을 성산・광평(星山・廣平)으로 하였다. 벼슬이 오위도총관 및 병조판서에 이르렀으며, 시호(諡號)는 정무(靖武)이다. 세종9년에 무과에 급제하였다. 거제현령으로 부임한 후 진관체제(鎭管體制)를 확립하여 왜구를 물리치고 위민치안(爲民治績)과 청백리명관으로 명성이 자자했다. 경주부윤을 거쳐 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ㆍ경사우도처치사(慶尙右道處置使)에 제수되었다. 청렴・강직한 성품으로 행정실무에 수완을 발휘하였고 무예와 병법에 뛰어났다. 1433년 최윤덕(崔潤德)장군이 4군(郡)을 설치할 때, 막료로 참여하여 여진족 정벌에 큰 공을 세웠다. 특히 궁마술(弓馬術)이 탁월하여「비장군(飛將軍)」의 칭호를 받았으며,『왕조실록』에 기록되어 후세 인물평가에 척도가 되었다. 세종대왕께서는 그의 학식과 덕망과 능숙한 국정수행을 격려하시고 무(武)・용(勇)・청(淸)・개(介)의 4자(字) 어필휘호(御筆揮毫)를 하사하였다. 묘소는 경북 김천시 양천동 산65-4번지 안정산(安靖山)에 있으며 마을이름도 안정포(安靖浦)라 하였다. 신도비(神道碑)는 경남 함안군 검암리 116번지 동산정에 있다. 암포서원(巖浦書院)ㆍ덕산서원(德山書院) 등에 배향되었다.
3)이칭(李偁)
황곡(篁谷) 이칭(1535〜1600)은 남명 조식과 퇴계 이황의 문하에서 수학하였으며, 1558년(명종 13) 진사(進士)가 되고, 석성현감ㆍ지평을 역임하였으며 조선조 대학자로 선비의 최고 징사(徵士: 임금이 불러도 쉽게 나가지 않는 선비)로 문장・도덕이 높았다. 함안현감 정구(鄭逑)와 교유하고,『함주지』편찬에 참여하였다.
4)이명호(李明怘)
매죽헌(梅竹軒) 이명호(1565〜1624)는 1605년(선조 38) 진사가 되었으며, 관직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문장덕업(文章德業)이 사표1세(師表一世)이고 한강(寒岡) 정구(鄭逑)ㆍ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과 교유하면서 후진양성과 지방민의 순화에 노력하였으며, 학구십칠조(學究十七條)를 만들어 시행하였다. 특이한 필법의 명필가(名筆家)라는 칭송이 자자했으며, 노양서원ㆍ경현사(景賢祠)에 배향되었다.
5)이명신(李明 )
이명신(1566〜? )은 1594년(선조 27)에 등과(登科)하였으며, 정유재란 때 웅천현감으로 부임하여 왜적을 물리치고 웅천고을 수호에 큰 공을 세웠다. 이어 웅천현감 겸 병마절제도위에 제수되었으며, 이괄의 난에 공을 세워 진무원종공신에 훈권(勳卷)되었다. 경현사(景賢祠)에 배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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