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홍포서원(鴻浦書院)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계내리 1336
   윤 환(尹 桓) 윤자당(尹子當) 윤 지(尹 志) 윤석보(尹碩輔) 윤탁연(尹卓然)
   1782년(정조 6)
   
   3월 하정(下丁)
   
홍포서원은 1782년(정조 6)에 윤환(尹桓), 윤자당(尹子當), 윤지(尹志), 윤석보(尹碩輔), 윤탁연(尹卓然) 등 다섯 사람을 추향하기 위하여 창건한 서원이다. 1857년에 개수(改修)하였으며 당시는 봄, 가을 일 년에 두 번 향사(享祀)를 올렸다.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가 광복 후 1974년에 복설되었으며, 1980년 7월에 현재 위치인 계내 수곡 상포재(上浦齋) 앞에 홍포서원을 중건하게 되었다.

1)주벽-윤환(尹桓, ?~1387)
고려 후기의 관인. 본관은 칠원(漆原). 군부판서(軍簿判書) 수(秀)의 손자이다. 1328년(충숙왕 15) 호군으로 원나라에 가서 모시와 종이를 바쳤다. 충혜왕 초에는 대언을 제수받았으나, 충숙왕이 복위하자 전왕의 총애를 이유로 손기(孫琦) 등과 함께 하옥되었다가 장류(杖流)되자 원나라로 도망하였다.
1339년(충숙왕 복위 8) 조익청(曺益淸)과 충혜왕 측근의 불량배들을 제거하려다 참소를 입어 칠원군으로 추방되었다. 충혜왕이 복위하자 동지밀직(同知密直)이 되고 원나라로부터 행성원외랑(行省員外郎)이라는 관직을 받았다.
1342년(충혜왕 복위 3) 조적(曺頔)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1등공신에 올라 수성양절보리공신(輸誠亮節輔理功臣)호를 받고, 찬성사로 승진했으며, 원나라로부터 다시 행성낭중(行省郎中)에 제수되었다. 1343년 강릉교주도도순문사(江陵交州道都巡問使)로 임명되었으며 1349년(충정왕 1)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에 봉해지고, 수성양절선력보리공신(輸誠亮節宣力保理功臣)호를 받았다.
1354년(공민왕 3) 찬성사가 되고 판삼사사(判三司事)를 거쳐, 1356년 수충협의동덕익찬공신(輸忠秊義同德翊贊功臣)호를 받고, 좌정승으로 승진, 그 해 관제개혁으로 수문하시중(守門下侍中)으로 고쳐 임명되었으나, 죄를 지어 유배되었다.
1360년 칠원후(漆原侯)로 봉해졌다가 칠원백(漆原伯)으로 고쳐 봉해졌고, 1365년 동서북면도통사(東西北面都統使)가 되었다. 1371년 신돈(辛旽)이 제거된 뒤 문하시중이 되었고 무인으로서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를 겸임하고 추성병의동덕섭리익찬공신(推誠秉義同德燮理翊贊功臣)호를 받았으나, 이듬해 파직되었다.
1377년(우왕 3) 북원(北元)으로부터 평장사(平章事)에 제수되고, 1380년 다시 문하시중에 올랐다. 다섯 왕을 섬겨 세 차례 수상을 지냈으며, 고향에 내려가 있을 때 큰 기근을 당하자 가재를 털어 빈민을 구제하였다. 시호는 충효(忠孝)이다.
 
2)윤자당(尹子當)
칠성부원군(漆城府院君) 휘(諱) 환(桓)공의 아드님이시고 묘는 상포선영(上浦先瑩) 시조공묘 좌측 산줄기에 모셔져 있다. 조선 태조(太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병조전서(兵曹典書)에 올랐다. 재임중에 박포(朴苞)의 난을 토평(討平)하여 태종을 보필한 공으로 추충분의익대좌명공신(推忠奮義翊戴佐命功臣)으로 좌찬성(左贊成)이 되시었다. 칠원부원군(漆原府院君)에 봉(封)해졌으며 정평(靖平)의 시호를 받으셨다. 태종께서 훈공을 기록한 서책 철권(鐵卷)을 주시며 말하기를 “황하(黃河)가 변함없이 흐르고 태산(泰山)이 닳아 없어질때까지 오래도록 안락(安樂)을 누리며 근심 걱정도 같이하자”고 하였다 한다. 사신으로 중국에 갔을 때 황제로부터 그 인품이 훌륭하다 하여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를 제수(除授) 하였다.
 
3)윤지(尹志)
조선의 학자. 자는 가형(可衡), 호(號) 양성당(養性堂) 고려 낭장(郞將) 천이(天怡)의 손자. 세종 때 김종직(金宗直)·서거정(徐居正) 등과 함께 집현전(集賢殿)에 뽑혀 들어가서 「치평요람(治平要覽)」의 서사(書寫)를 맡았다. 문종 때 홍천 군수(洪川郡守)로 치적(治績)을 올리고 청백리(淸白吏)에 녹선(錄選)되었으며, 대사간을 지내다가 세조가 왕위를 찬탈(纂奪)하자 사직했다.
 
4)윤석보(尹碩輔, ?~1505)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칠원(漆原). 자는 자임(子任). 천이(天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삼(參)이고, 아버지는 사(思)이며, 어머니는 김맹상(金孟常)의 딸이다. 1462년(세조 8) 진사가 되고 1472년(성종 3)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그 뒤 여러 관직을 거쳐 1480년 사간원정언이 되어 유자광(柳子光) 등과 파당을 만들어 횡포를 자행한 임사홍(任士洪)에게 극형에 처하지 않고 유배로써 그친 것을 비판하였다. 또 이듬해에는 의정부·육조·대간의 어느 곳에서도 천거를 받지 못한 신정(申瀞)이 평안도관찰사로 임명되자 이의 부당함을 상소하였다.
풍기군수·성주목사 등 여러 곳의 수령을 거쳐 1495년(연산군 1) 사간이 되었고, 그 뒤 홍문관직제학을 거쳐 1504년 대사간이 되었다. 이 해에 갑자사화가 일어나는 등 실정을 거듭하는 연산군에게 충언을 하다가 강음(江陰)으로 유배되었으며 유배지에서 이듬해 죽었다.
1506년 중종반정으로 연산군이 폐출된 뒤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오랜 간관생활 중 직언을 잘 하였으며, 생전의 청렴결백한 공직생활로 1506년(중종 1) 염근리(廉謹吏)에, 선조 때 청백리에 녹선되었다.
 
5)윤탁연(尹卓然, 1538~1594)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칠원(漆原). 자는 상중(尙中), 호는 중호(重湖). 석보(碩輔)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문형(文亨)이고, 아버지는 우봉현령 이(伊)이며, 어머니는 김윤선(金胤先)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인이다.
1558년(명종 13) 생원시에 합격하고 1565년 알성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에 보임되었다. 승정원주서를 거쳐 1568년(선조 1) 전적·사간원정언을 역임하고 천추사(千秋使) 서장관이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어 홍문관수찬이 되어 지제교검토관·춘추관기사관을 겸임했으며 ≪명종실록≫ 편찬에도 참여하였다.
1574년 주청사(奏請使)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사헌부지평·장령·교리·검상·사인 등을 역임하고 이듬 해 외직으로 동래부사·상주목사를 지내면서 선정으로 치적을 남겼다. 1580년 좌승지·도승지·예조참판을 지내고, 1582년 영남 지방에 큰 흉년이 들자 왕이 그의 재능을 믿고 경상도관찰사로 특채하였다.
이듬 해 형조참판으로 형조에서 죄인을 다스릴 때 임산부를 장형(杖刑)에 처해 낙태해 죽게 한 책임을 지고 좌천되었다가 1585년 경기도관찰사에 올랐다. 그 뒤 한성부판윤에 승진하고 세 차례의 형조판서와 호조판서를 지냈다.
1591년 종계변무(宗系辨誣)의 공으로 광국공신(光國功臣) 3등에 책록되고 칠계군(漆溪君)에 봉해졌으며, 특히 비변사유사당상(備邊司有司堂上)을 역임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을 모시고 북으로 가던 도중 검찰사(檢察使)에 임명되었다.
그 때 함경도 지방에는 이미 적이 육박했으며, 함경도에 피난한 왕자 임해군(臨海君)과 순화군(順和君)이 회령에서 북변 반민(北邊叛民)과 적에게 아부한 무리들에 의해 적의 포로가 되자 조정은 근왕병(勤王兵)을 모아 적을 격퇴시킬 계획을 세웠다.
그는 왕의 특명으로 함경도도순찰사가 되어 의병을 모집하고 왜군에 대한 방어 계획 등 시국 타개에 노력하다가 그곳에서 객사하였다. 송익필(宋翼弼)·이산해(李山海) 등과 팔문장가의 한 사람으로 시문에 능하였다. 함흥의 창의사(彰義祠)에 제향되었다. 저서에 ≪계사일록 癸巳日錄≫이 있다. 시호는 헌민(憲敏)이다.

칠원윤씨문중과 지방유림이 홍포서원 복원을 소원하던 차에 전국 종현들의 성금을 모아 1980년 7월에 현재 위치인 계내 수곡 상포재(上浦齋) 앞에 홍포서원을 중건하게 되었다. 당시 종약장 홍근(弘根)공께서 쓴 「홍포서원 중건 상량문(鴻浦書院重建 上梁文)」에서 중건 전 아쉬웠던 점과 상량을 하면서 개감스러웠던 당시 느낌을 짐작할 수 있다.
사당영역과 강학공간이 따로 분리되어 있으며 사당영역에는 사당과 삼문, 강당여역은 외삼문과 강당, 기타건물 1동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당영역 오른쪽에 사당영역을 따로 내었다. 사당 앞에는 비석이 1기 있다. 사당영역 옆에는 재실과 별도의 출입문이 따로 영역을 내고 있으며 강당의 외삼문 앞에는 재실방향으로 홍살문이 서있다.

1)홍포서원 유허비
서원 철폐 후 수년이 지나는 동안 이 서원 터는 풀밭으로 무성하여 지나가는 사림(士林)들이 다섯 분의 길이 귀감이 될 행록이 잊혀져감을 안타까이 여기다가 뜻을 모아 서원 터에다 1873년 유허비(遺墟碑)를 세우게 되었다. 유허비문은 당시 통정대부 안동 김연한공이 지었다.

참고-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