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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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행주서원(杏洲書院)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행신외동 162-1
   권 율(權 慄)
   1842년(헌종 8)
   
   4월 15일 9월 15일
   경기도문화재자료 제71호(1985.09.20지정)
행주서원은 임진왜란 때 행주산성(幸州山城)에서 왜적을 물리친 도원수(都元帥) 권율(權慄)을 배향한 곳이다. 행주대첩의 전공과 권율의 업적에 비해 그를 기리는 사당의 창건은 상대적으로 매우 늦은 시기에 이루어졌다. 즉 사당 건립에 관한 논의는 1841년(헌종 7)에 임금이 서삼릉(당시에는 2릉)에 거둥하는 중 행주를 지나다가 권율의 공덕을 기리는 사당이 있느냐고 물었던 데서 비롯되었다. 그 뒤 영의정 조인영(趙寅永)이 정식으로 권율의 사당을 세울 것을 건의하였고, 이듬해 헌종의 특명으로 대첩지인 산성의 남서쪽에 서원을 건립하게 되었다. 이 때 사당에는 ‘공훈을 기린다’는 뜻의 기공사(紀功祠)라는 편액이 내려졌다. 한편 외삼문의 현판은 ‘杏洲書院’으로 되어있는데, 이는 병자수호조약과 조미수호통상조약 체결 시 조선의 전권대관(專權大官)으로 활동한 신헌(申櫶)이 쓴 것이다. 예로부터 행주산성이 있는 덕양산에 살구나무가 많은데다, 이곳의 지형이 섬모양을 하고 있어 행주(幸州)가 아닌 행주(杏洲)로 쓴 것이라 전한다. 1845년에는 1602년(선조 35)에 세운 행주대첩비의 훼손이 심해지자 비문의 내용을 그대로 옮기고, 권율의 누락된 행적과 기공사 중창기를 추가한 대첩비를 만들어 기공사 옆에 세웠다. 그 뒤 서원은 1871년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되었다.
그 후 1970년대 정부가 국난극복의 역사적 문화유적에 대한 대대적인 정화작업을 추진하면서 권율의 사당을 있던 자리에 복원하지 않고, 행주산성 안에 건립한데다 명칭도 충장사(忠莊祠)라 한 것이다. 이 때 기공사에 있던 행주대첩비도 충장사 앞으로 옮겨졌다. 이후 행주서원은 외삼문과 낭각(廊閣)만 남은채 유지되다가 1980년대 이후 경기도·고양시·안동권씨종친회를 중심으로 복원작업이 추진되었다. 1988년에 강당을 건립하고, 1997년에는 사당을 복원하여 본래대로 기공사라 편액하였다. 이어 1988년에 내삼문과 담장을 축조하고 이듬해 재실(齋室)을 완공하여 옛 서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충장사에서는 행주대첩일(1593년 2월 12)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3월 14일에 행주대첩제(幸州大捷祭)를 개최하는 반면, 행주서원에서는 권율의 기일인 7월에 향사를 올리다가 4월 15일과 9월 15일에 제향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1)주벽-권율(權慄, 1537∼1599)
조선 중기의 문신·명장.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언신(彦愼), 호는 만취당(晩翠堂)·모악(暮嶽). 도첨의(都僉議) 보(溥)의 9세손으로, 할아버지는 강화부사 적(勣), 아버지는 영의정 철(轍), 어머니는 적순부위(迪順副尉) 조승현(曺承晛)의 딸이다. 이항복(李恒福)의 장인이다.
1582년(선조 15)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승문원정자가 되었다. 이어 전적·감찰·예조좌랑·호조정랑·전라도도사·경성판관을 지냈다. 1591년에 재차 호조정랑이 되었다가 바로 의주목사로 발탁되었으나, 이듬해 해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에 제수되어 바로 임지로 떠났다. 왜병에 의해 수도가 함락된 뒤 전라도관찰사 이광(李洸)과 방어사 곽영(郭嶸)이 4만여 명의 군사를 모집할 때 광주목사로서 곽영의 휘하에서 중위장(中衛將)이 되어 서울의 수복을 위해 함께 북진했다. 이광이 수원과 용인 경내에 이르러 이곳에 진을 친 소규모의 적들을 공격하려 하자 극력 반대하면서 자중책을 말하기도 했다. 즉, 서울이 멀지 않고 대적이 눈앞에 있는 상황에서 적은 적과의 싸움에서 도내의 병력을 모두 소모할 것이 아니라, 조강(祖江)을 건너 임진강을 막아서 서로(西路)를 튼튼히 하여 군량미를 운반할 수 있는 도로를 보장한 다음에 적의 틈을 살피면서 조정의 명을 기다리는 것이 옳겠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주장인 이광이 듣지 않고 무모한 공격을 취해 대패하고 선봉장 이시지(李詩之)·백광언(白光彦) 등 여러 장수들이 전사했다. 그러나 오직 혼자만이 휘하의 군사를 이끌고 광주로 퇴각해 후사를 계획했다.
한편, 남원에서 1,000여 명의 의군을 모집해 다시 북진, 금산군에서 전주로 들어오려는 고바야카와(小早川隆景)의 정예 부대를 맞아 동복현감(同福縣監) 황진(黃進)과 함께 이치(梨峙)에서 싸웠다. 이 싸움에서 황진이 총을 맞아 사기가 저하되었으나 굴하지 않고 군사들을 독려해 왜병을 격퇴시켜 호남을 보존하였다. 그 해 가을 이치싸움의 공으로 곧 전라감사에 승진하였다.
12월 도성 수복을 위해 1만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북진 길에 올라 직산에 이르러 잠시 머물다가, 체찰사 정철(鄭澈)이 군량미 마련 등에 어려움이 있으니 돌아가 관내(管內)를 지키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이에 잠시 주저했으나 북상하라는 행재소의 전갈을 받고 북진을 계속했다. 그러나 앞서 용인에서 크게 패한 전철을 다시 밟지 않기 위해 바로 북상하는 것을 피하고, 수원 독성산성(禿城山城)에 들어가 진지를 구축했다. 대병이 그곳에 와 있다는 소식을 전해들은 왜병의 총사령관 우키타(宇喜多秀家)는 후방의 연락이 단절될 것을 염려한 나머지 도성에 주둔한 왜병을 풀어 삼진(三陣)을 만들고 오산 등 여러 곳에 진을 친 다음 서로 오가게 하며 독성산성의 아군을 밖으로 유인하려 했다. 그러나 성책을 굳게 해 지구전(持久戰)과 유격전을 펴가면서 그들에게 타격을 가하자 몇 날이 지난 다음 영책(營柵)을 불사르고 도성으로 물러났다. 적이 퇴각할 때 정예 기병 1,000명을 풀어 적의 퇴로를 기습해 많은 왜병을 베었다.
그 뒤 명나라 원군과 호응해 도성을 수복하기 위해 독성산성으로부터 서울 근교 서쪽 가까이로 옮기기로 하고 먼저 조방장 조경(趙儆)을 보내 마땅한 곳을 물색하도록 해 행주산성을 택했다. 조경에게 명해 2일간에 걸쳐 목책(木柵)을 완성하게 하고 이어 독성산성으로부터 군사를 옮기는 작업을 개시했다. 대군의 행렬을 위해서 그는 독성산성에 소수의 군사만을 남겨 많은 군사가 계속 남아 있는 것같이 위장한 뒤 불시에 행주산성으로 옮겼다.
그는 행군 중 휘하 병 가운데 4,000명을 뽑아 전라병사 선거이(宣居怡)로 하여금 금천(衿川 : 지금의 始興)에 주둔하게 하고 도성의 적을 견제하도록 하였다. 이때 휴정의 고제(高弟) 처영(處英)이 의승병(義僧兵) 1,000명을 이끌고 당도하였으나, 행주산성에 포진한 총 병력은 수천 명에 불과했다. 그 뒤 정예병을 뽑아 도성에 보내어 도전하니 적장들은 이 싸움에서 대패한 경험이 있고, 또 독성산성에서의 치욕을 경험한 탓으로 일거에 침공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적은 도성에 모인 전군을 총출동시켜 행주산성을 공격하겠다는 결의를 제장(諸將)의 중론으로 정하고 조선 침입에서 한 번도 진두에 나서본 일이 없었던 총대장 우키타를 위시해서 본진장령(本陣將領)들까지 3만의 병력으로 행주산성을 공격했다.
왜병은 7대로 나누어 계속해 맹렬한 공격을 가해 성이 함락될 위기에까지 직면했으나, 일사불란한 통솔력과 관군과 의승병이 사력을 다해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대패한 적은 물러가기에 앞서 사방에 흩어져 있는 시체를 모아 불을 질렀으나, 그밖에도 유기된 시체가 200구에 달했고 타다 남은 시체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권율의 군대는 그들이 버리고 간 기치(旗幟)와 갑주(甲胄)·도창(刀槍) 등 많은 군수물을 노획했다. 이것이 1593년 2월 12일에 있었던 행주대첩이다. 그 뒤 권율은 왜병의 재침을 경계해 행주산성은 오래 견디어내기 어려운 곳으로 판단, 파주산성(坡州山城)으로 옮겨가서 도원수 김명원(金命元), 부원수 이빈(李薲) 등과 성을 지키면서 정세를 관망했다. 그 뒤 명나라와 일본 간에 강화 회담이 진행되어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휴전 상태로 들어가자, 군사를 이끌고 전라도로 복귀했다. 그해 6월 행주대첩의 공으로 도원수로 승진되어 영남에 주둔했는데, 1596년 도망병을 즉결한 죄로 해직되었으나 바로 한성부판윤에 기용되었으며, 호조판서·충청도관찰사를 거쳐 재차 도원수가 되었다.
1597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적군의 북상을 막기 위해 명나라 제독 마귀(麻貴)와 함께 울산에 대진했으나 도어사 양호(楊鎬)의 돌연한 퇴각령으로 철수했다. 이어 순천 예교(曳橋)에 주둔한 왜병을 공격하려 했으나, 전쟁의 확대를 꺼리던 명장(明將)들의 비협조로 실패했다. 1599년 노환으로 관직을 사임하고 고향으로 돌아가 7월에 죽었다. 영의정에 추증되었고,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宣武功臣) 1등에 영가부원군(永嘉府院君)으로 추봉되었다.
1841년 행주에 기공사(紀功祠)를 건립, 그해 사액되었으며, 그곳에 향사되었다. 그가 임진왜란 대 활약한 공훈을 중심으로 기록된 사적이 ≪권원수실적 權元帥實蹟≫이란 책명으로 1권이 전한다. 시호는 충장(忠莊)이다.
 

 

서원은 1871년의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하였으나 한국전쟁 때 폭격으로 소실되었다. 복원사업 전까지는 가로 18m, 세로 20m의 담장 터가 남아 있고 그 안 뒷편으로는 약간 높은 대지에 사당이 있던 자리가 남아 있는데 건물터는 정면 8.4m, 측면 6.5m이며 주춧돌 6개가 남아 있다. 주춧돌 중 아래로는 장대석의 석축이 남아 있으며, 석축 아래로 강당으로 쓰이던 건물이 남아 있다. 건물은 정면 5간 측면 1간의 홑처마 맞배지붕 건물이며 1고주(高柱) 2량(梁)의 간단한 구조를 이루고 있다. 또한 강당의 앞에는 좁은 석축 위에 세운 대문과 좌우 행각이 있고 그 앞으로 한강을 향하여 삼문(三門)이 세워져 있다.
그 후 1980년대 이후 경기도·고양시·안동권씨종친회를 중심으로 복원작업이 추진되었다. 1988년에 강당을 건립하고, 1997년에는 사당을 복원하여 본래대로 기공사라 편액하였다. 이어 1988년에 내삼문과 담장을 축조하고 이듬해 재실(齋室)을 완공하여 옛 서원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행주서원의 기공사에 걸려있던 8점의 현판을 현재는 고양시청에서 보관중이다.
 
유물명
유형
시대
크기
비고
1
편액(기공사상량문)
현판
1842
154.5×48
 
2
편액(權昌燮 詩句)
현판
1886
59.5×27
후손 權昌燮의 글을 새긴 편액
3
편액(權應燮 詩句)
현판
1886
70×30.8
후손 權應燮의 시를 새긴 편액
4
편액(紀功祠重修記)
현판
1933
173×72
 
5
편액(紀功祠記)
현판
19세기
194.5×41.5
承文院副正字 權應燮 한 기공사 기문을 새긴 편액
6
편액(기공사유감)
현판
19세기
53×41.3
雲石 趙寅永의 시를 새긴 편액
7
편액(차우석기기사)
현판
19세기
54.5×41
雲石의 기공사에 대한 글에 趙萬永이 지은 시를 새긴 편액
8
현판(행주서원)
현판
19세기
192×6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