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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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수곡서원(水谷書院)
   경기도 양평군 지평면 수곡리 631
   권경우(權景祐) 권경유(權景裕)
   1714년(숙종 40)
   
   음력 2월 중정일
   
수곡서원은 조선전기의 문심으로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화를 입은 권경우(權景祐), 권경유(權景裕) 형제의 덕행을 추모하고자 건립된 서원이다.
수곡서원 창건은 1714년(숙종 40)에 건립된 향현사(鄕賢祠)와 연관을 갖는다. 즉 향현사에는 조선중기의 문신인 신변(申抃), 조형생(趙亨生), 조문형(趙文衡)을 제향 해 오다가 1798년(정조 22)에 유생 민성유(閔聖游) 등이 상소하여 특명으로 권경우를 추가 제향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향현사가 훼철된 후 권경우의 후손 등 지역 유림들이 권 경우, 권경유의 사우를 별도로 건립하기로 결의하였다. 그 후 1922년~1930년에 걸쳐 서원을 건립하였으며, 의친왕 이강(李堈)이 수곡서원이라는 현판을 친히 써 주었다. 1966년에 단청을 했으며, 1971년과 1976년에 내삼문을 보수하였다. 음력 2월 중정일에 안동권씨 문중이 주관하여 제향을 올리고 있다.

1)권경우(權景祐, 생몰년 미상)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자수(子綏). 집지(執智)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화(永和), 아버지는 판관 질(耋), 어머니는 우참찬 이승손(李承孫)의 딸이다. 동생이 대사헌 경희(景禧)와 이조정랑 경유(景裕)이다.
1470년(성종 1)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해 예문관검열이 되었다. 뒤에 예문관봉교로 승진해 사관 선발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듬해에는 천추사(千秋使)의 검찰관으로 중국에 다녀오면서, 통사(通事) 조종손(趙宗孫) 등의 밀무역을 검찰한 공로로 4계급 승진해 사간원정언이 되었다. 이어서 홍문관수찬으로 옮겨 제주경차관(濟州敬差官)으로서 제주도민의 궁핍현상을 지적하고, 그 대책의 강구를 요청하였다. 이듬해 다시 사간원정언이 되어 임사홍(任士洪)이 국정을 농락함을 규탄했다. 한편, 국왕의 수렵 활동시 승지와 사관의 대동을 금하자 불가함을 주장하고, 국왕의 거동에 대해 사소한 것이라도 기술하게 했다.
1482년 홍문관부교리로 있을 때, 왕비 윤씨를 폐위시킨 처사를 간언하다가 파직되었다. 1486년에 직첩이 환급되어 예관(禮官)으로 복직되고, 이어서 사간으로서 평안도병마절도사 이조양(李朝陽)의 군비 소홀과 군공 사칭을 탄핵, 면직시켰다. 그 뒤 형조참의·동부승지·우승지·도승지를 역임하고, 1498년(연산군 4) 사헌부대사헌에 올라 사찰 건립의 불가함을 논하고, 정숭조(鄭崇祖)·이창신(李昌臣) 등의 탐폭을 규탄했다. 그러나 그해에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동생이 주모자로 처형되었고, 자신도 연루되어 강릉부 관노로 배속되었다.
성품이 강직해 권신에게 구차하게 의부하지 않았으며, 직무를 공정히 다스려 많은 사람들이 감복했다. 중종반정으로 적몰가산이 환급되고 죄명도 신원되었다.
 
2)권경유(權景裕, ?∼1498)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군요(君饒)·자범(子汎), 호는 치헌(癡軒)·취정(翠亭). 집지(執智)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영화(永和)이고, 아버지는 판관 질이며, 어머니는 우참찬 이승손(李承孫)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다.
1483년(성종 14)에 진사가 되고, 1485년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예문관검열에 등용된 뒤 홍문관정자를 거쳐, 1490년에는 호당(湖堂)에서 사가독서(賜暇讀書)하였다. 여러 차례 천거되어 교리에 이르렀으며, 1495년(연산군 1)에는 외직을 청하여 제천현감이 되었다.
성종 때 김일손(金馹孫)과 함께 사관 (史官)으로 있으면서 스승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을 사초(史草)에 실었는데, 이것이 문제가 되어 일어난 1498년의 무오사화 때 유자광(柳子光)·이극돈(李克墩) 등은 충의를 빙자하여 사당(私黨)을 조직하고 조의제문을 사초에 실어 후세에 전하려 하였으므로 그 죄가 김종직보다 가볍지 않다고 주장하여 국문을 받은 뒤 아들 연(沇) 및 김일손·권오복(權五福)과 함께 능지처사되었다.
중종반정 후 도승지에 추증되었다. 그는 남효온(南孝溫)·김일손·강경서(姜景敍) 등과 함께 사장(詞章)·정사(政事)·절의(節義)·효행으로 이름이 높았다. 남효온은 “성품이 강직하면서 굳세고 일을 만들기를 즐기지 않았다.”고 평하였다. 시호는 효강(孝康)이다.

서원이 위치한 지역은 1484년(성종 15)에 권경우(權景祐)가 조부상을 당하여 인근 월산리에서 시묘살이를 하면서 입향하게 된 곳이라 한다. 서원은 수곡리 안골마을 뒤편의 능선에 자리 잡고 있으며, 시설물로는 사당·내삼문·강당·외삼문 등이 있다. 성경재(誠敬齋)란 현판이 붙은 강당은 중앙에 마루를 두고 양쪽에 온돌방을 두었다.
성경재는 정면 5칸, 측면 1칸 반 규모로 팔작지붕을 올렸으며, 가운데 대청을 두어 마루를 깔고 양쪽 협실에 온돌을 깔았다.
재실과 사우 중간에는 높은 기단을 쌓고 내삼문을 설치하였는데 솟을 대문을 달았으며 1976년 보수한 것이다. ‘수곡서원’이란 제액이 달린 본당(本堂) 사우는 정면 3칸, 측면 2칸이나 측면 칸 너비가 좁다.
일제시기에 중건하면서 만들어진 현판이 몇 점 있을 뿐이다.
 
유물명
유형
시대
크기
재질
비고
1
편액(성경재)
현판
일제시대
179×63
목재
강당에 걸린 편액
2
편액(수곡서원기)
현판
1935
129×83
목재
강당 내부에 걸린 편액
3
편액(수곡서원)
현판
일제시대
228×65
목재
사당에 걸린 편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