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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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성곡서원(星谷書院)
   충청남도 금산군 남이면 성곡리 844
   김 신(金 侁) 윤 택(尹 澤) 길 재(吉 再) 김 정(金 淨) 조 헌(趙 憲) 고경명(高敬命)
   1617년(광해군9)
   1663년(현종4 )
   음력 10월 19일
    1871년(고종8) 훼철
성곡서원은 금산지역의 서원중에서 가장먼저 창건되었고, 금산지역의 유일한 사액서원(賜額書院)이었다. 성곡서원의 건립논의는 광해군 즉위 초기인 1613년에 선비들의 요청으로 고려 공민왕 때의 율정 윤택(栗亭 尹澤)이 관직에서 물러나 살았던 진악산(進樂山) 아래에 당시의 금산군수 이안눌(李安訥,1611.10~1613.11. 재임)이 주도하여 창건되었고, 1617년에 군수 김원록(金元錄, 1613.11~1618.1. 재임)에 의해 봉안되었다. 『원기(院記)』는 김원록이 지었고 제영(題詠)은 이안눌과 서산군수 김대덕(金大德, 1577~1639, 호: 蘇峰·易安堂,김원록의 아들)이 지었다.
서원에 배향된 인물 6명은 서원 건립 당시에 배향되는데, 고려말의 요양행성 참정(遼陽行省 參政)을 역임한 낙천재 김신(樂天齋 金侁), 율정 윤택(栗亭 尹澤), 야은 길재(冶隱 吉再), 기묘사화 때 8현 중의 한사람인 충암 김정(冲菴 金淨), 그리고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조헌(趙憲)과 고경명(高敬命)이다.
1663년(허현종 4)에 본읍 유생 한수신(韓秀臣)이 상소하여 예조좌랑 정동엽(鄭東燁)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고 ‘성곡서원(星谷書院)’ 의 이름으로 사액(賜額)하였고, 복호미 4결을 내려주어 경비를 충당하게 하였다. 편액의 글씨는 동춘당 송준길(同春堂 宋浚吉)이 썼고, 학규(學規)는 초려 이유태(草廬 李惟泰)와 진보현감 이진병(眞寶縣監 李震炳)이 함께 지었고, 원규(院規)도 이유태가 지었다.
성곡서원에는 원장 1인, 장의 2인, 유사 2인, 훈도 1인을 두고 원생 25인을 뽑아 지방교육에 힘썼고, 삼남의 유생들이 모여들어 성황을 이루었으며 지방유림들이 전답을 헌납하여 재정이 풍부하여 지방교육에 이바지하였던 것이다.
1871년(고종 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어 성곡서원이 있었던 자리에는 현재 밭으로 변하여 『성곡서원지(星谷書院址)』라는 유허비(遺墟碑)에 위치, 면적, 연혁[金侁 尹澤 金淨 吉再 趙憲 高敬命의 六賢을 配享한 書院址다. 光海君 9年(1617) 地方儒林에 의거 創建되었으나 高宗 五年(1868) 大院君의 書院 撤廢令에 의하여 毁撤되었다]이 기록되어 있어서 이곳이 서원의 자리였음을 알려주고 있다.
성곡서원에 주벽(主壁)으로 배향되었던 낙천재 김신은 254년 역사의 성곡서원이 1871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된 후 금산군 부리면 불이리 246-1소재 야은 길재를 배향한 청풍사(淸風祠)에 추배(追配)하였다가 1946년 후손들이 금산군 남일면 황풍리 산22번지에 황풍사(皇風祠)를 창건(상단사진 참조)하여 75년 만에 이배(移配)하였으며 1969년 황풍사 입구에 만리황풍비(萬里皇風碑)를 건립하고 매년 음력 10월 19일에 향사하고 있으나 금산군의 유일한 사액서원이고, 최초의 서원인 성곡서원을 조속히 복설하여 금산군민의 표상으로써의 충효교육의 장으로 해야 한다는 금산향교, 유림, 각급 학교 등 군민전체의 여망이다.

1) 김신(金侁, 1234 ~1307)
금산 출신인 김신은 고려 충렬왕 때의 문신으로 자는 윤직(倫直), 호는 낙천재(樂天齋), 본관은 진례(進禮, 현재 錦山의 고대지명)이고, 낭장을 역임한 왕연(王涓)의 사위이다.
고종조에 문과에 등제하여 한림원 직원(直院), 국자감 사업(司業) 등를 거쳐 원종조에 밀직사 밀직(密直), 중서문하성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추밀원 부사(副使) 동정지역(東征之役)에 좌군사(左軍使)가 되었다.
『원명내비잡사(元明內秘雜史)』에 의하면 1274년(원종 15) 제1차 정동지역에 원나라의 도원수 홀돈(忽敦)이 전패(戰敗)를 은폐하고 죄를 대신하여 김신을 인재로 천거하여 벼슬이 정일품 금자광록대부 요양행성 참정(正一品 金紫光祿大夫 遼陽行省 參政)에 이르렀으며, 30여년간 재직하면서 선정을 베풀어 교민의 지위향상과 복지증진에 진력하였으며, 연경(燕京)을 왕래하는 본국사신에 편의를 제공하고 대원외교(對元外交)에 공헌이 지대하였다.
1304년(충렬왕30)에 원나라 황제 성종(成宗)의 “만리황풍(萬里皇風)”의 친필을 가지고 귀국하니, 이듬해에 충렬왕은 그의 공적을 치하하고 고향인 진례현(進禮縣)을 금주군(錦州郡: 遼陽省內 錦州地名에서 由來)으로 승격시키고, 이에 부리(富利), 진동(珍東), 청거(淸渠), 주계(朱溪), 단천(丹川) 등 5현을 소속시켜 김신을 지금주사(知錦州事)로 제수하고 금주군(錦州君)으로 봉하였으며, 지금의 남일면 황풍리(皇風里)와 마장리(馬壯里) 일대를 장원(莊園)으로 하사하였다. 지금도 이 들을 참정평(參政坪, 속칭 참뱅이 들)이라하며, 황풍리라는 동네 이름도 여기서 유래한 것이다.
김신은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하였다.
원에서 귀국하여 고향에 돌아와 보니 모친이 왜구(倭寇)에 변을 당하여 그 시신을 찾을 수 없어 뒷산에 단(壇)을 쌓고 7일동안 치성치세하였다.
이튿날 눈이 와서 한가닥 길이 트여 따라가 보니 여러 구(具)의 시체가 있는데 모친의 시신을 알아 볼 수가 없어서, 다시 치성으로 하늘에 기도하니 백골(白骨)이 청색(靑色)으로 변하므로 거두어 장례를 모시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그의 출천지효(出天之孝)에 감탄하였다.
지금도 신대리 뒷산에 수골유적(收骨遺蹟)이 있으니 제천대(祭天臺)와 진악산 아래에 변청동(變靑洞),염골리(染骨里)라 전해온다.
김신이 죽은 후 예관을 파견하여 무주군 안성면 공진동에 장례하였다.
1617년 성곡서원에 배향되고, 그 뒤에 무주군 안성면 죽계서원에 배향되었다.
 
2) 윤택(尹澤, 1289~1370)
고려 공민왕 대의 문신으로 자는 중덕(仲德), 호는 율정(栗亭), 본관은 무송(茂松)이다.
국학 대사성 문한사학(國學大司成 文翰司學)을 지낸 해(諧)의 손자이다.
고모부인 윤선좌(尹宣佐, 1269~1343)를 따라서 공부하였고, 특히 『춘추좌전(春秋左傳)』에 능통하였다.
1317년(충숙왕 4) 문과에 급제하여 경산부사록(京山府司錄), 교감(校勘) 등을 거쳐 1334년 검열에 올랐다.
연경에 머물고 있던 충숙왕으로부터 강릉대군 기(江陵大君 祺, 후의 공민왕)를 뒷날 후계자로 추대하라는 부탁을 받았다. 충목왕이 돌아가자 이승로(李承老)와 함께 중서성에 글을 올려 강릉대군을 왕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충정왕이 즉위하자 얼마후 광양감무로 좌천되었다.
공민왕 즉위 후 밀직제학에 임명되었고, 이듬해 상소하여 시사를 논의하였으나 윤허되지 않자 개성부윤으로 벼슬을 사직하였다. 항상 충숙왕의 부탁을 생각하여 치국안민의 길을 왕에게 건의했고,1361년 정당문학(政堂文學)에 임명되었으며, 1363년 첨의 찬성사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이듬해 벼슬을 사직하고 금주(錦州)에 내려와 노모에 극진히 효도하고 진악산 아래의 계동(溪洞)에 거처하며 독서와 저술에 힘썼다.
공민왕이 직접 진용(眞容)을 그려주고, 호인 율정(栗亭)을 크게 써주기도 하였다.
1617년 성곡서원에 배향되고, 남일면 초현리에 효자비(孝子碑)가 있으며,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3)길재(吉再, 1353~1419) : 선산 金烏書院 참조
 
4)김정(金淨, 1486~1419) : 보은 象賢書院 참조
 
5)조헌(趙憲,1544~1592) : 김포 牛渚書院 참조
 
6)고경명(高敬命, 1533~1592): 순창 花山書院 참조

1871년(고종8)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하여 훼철

1) 성곡서원 청아록(星谷書院菁莪錄)
2) 심원록(尋院錄: 정조7)
3) 심원록(尋院錄: 순조17)
4) 육현배향승전서(六賢配享繩典序)
5) 성곡서원사소유(星谷書院事疎儒)