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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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화산서원(華山書院)
   충청남도 서천군 기산면 화산리
   권 벽(權 擘) 권 변(權 抃) 권 성(權 惺) 조수륜(趙守倫) 권 필(權 韠) 홍 미(洪 冞)권 양(權 讓)
   미상
   
   음력 3월 5일
   권성선생영정(權惺先生影幀)-충청남도문화재자료 325호 (1993.11.12지정)
화산서원은 옛 서천 향현사의 전통을 이은 사우이다. 원래 서천 향현사는 권벽(權擘)과 권변(權抃)을 제향했던 사우로서 사림과 문인들에 의하여 화양면 구동리 월광산 아래 백록동에 건립된 향현사이다. 아마도 이 유적이 서원등록에 보이는 권신영당이 아닌가 한다. 어쨌든 이 사우에는 권변과 권성의 영정을 봉안해 왔었다고 하는데, 1868년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으로 훼철되자 종가에 옮겼다가, 현재의 기산면 화산리에 영당을 짓고 이곳에 영정을 봉안하였다. 그러다가 최근에 화산사로 개칭 복설하면서, 원래의 2위 이외에 습재 권벽(習齋 權擘)을 주벽으로 하여 과거 건암서원에 제향됐던 풍옥헌 조수윤(風玉軒 趙守倫)과 석주 권변(石洲 權抃), 또 한산 향현사에 제향되었던 과묵당 홍미(果默堂 洪冞), 지족당 권양(知足堂 權讓)을 포함, 모두 7위의 인물들을 제향하는 사우로 발전시켰다.

1)주벽-권벽(權擘, 1520∼1593)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대수(大手), 호는 습재(習齋). 염(念)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광흥창수(廣興倉守) 억(憶), 아버지는 좌승지 기(祺), 어머니는 청풍김씨(淸風金氏)로 목사 세영(世英)의 딸이다. 시인 필(韠)의 아버지이다.
1543년(중종 38) 진사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식년문과의 을과로 급제, 예문관검열(藝文館檢閱)을 거쳐 홍문관정자(弘文館正字)에 발탁되었다. 이 때 안명세(安名世)·윤결(尹潔) 등 청류 선비들과 교유했다.
그러나 두 사람이 당시 윤임(尹任) 등과 친하며 윤원형(尹元衡) 일파를 공박하면서 야기된 을사사화에 화를 입자 모든 교유를 끊고 오로지 학문에만 힘썼다. 명종이 즉위하자 예조참의·장례원판결사(掌隷院判決事)를 역임하고 춘추관기주관(春秋館記註官)이 되어 ≪중종실록≫·≪인종실록≫·≪명종실록≫의 편찬에 참여했다.
이문(吏文)에 밝아 행정 실무에 능했고,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일본 승사(僧使)를 접대하고, 이어 서장관(書狀官)과 동지사로 두번 명나라에 다녀왔으며 원접사(遠接使)가 되기도 했다. 외직으로는 성주목사·장단부사를 거쳐 안변부사가 되었다가 순무어사 허봉(許篈)의 탄핵으로 체직되었다.
그 뒤 대호군·오위장·강원도관찰사를 역임하며 선정을 폈다. 시문이 높은 경지에 이르러 승문원부제조·제조(提調) 및 지제교(知製敎)를 오랫동안 지내며 문한(文翰)을 주관하였는데, 특히 명나라에 오가는 외교 문서를 전담했다.
1572년(선조 5) 김성일(金誠一) 등과 함께 완의록(完議錄)에 올랐고, 광국원종공신(光國原從功臣)에 봉해졌다. 한시에 능해 많은 사람들이 그의 시를 즐겼으며, 당대의 명사인 노수신(盧守愼)·정유길(鄭惟吉) 등도 그의 시문을 높이 평가했다.
50여 년 벼슬 재위 기간 가사를 돌보지 않고 자식의 혼사도 모두 부인에게 맡겼으며, 손님도 거의 맞지 않으면서 오직 시에만 마음을 쏟아 높은 경지를 이루었다. 예조참판에 추증되었으며 저서로는 ≪습재집≫ 8권이 있다.
 
2)권변(權抃, 1651∼1726)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이숙(怡叔), 호는 수초당(遂初堂)·경곡(瓊谷). 인(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佺)이고, 아버지는 집의 양(讓)이며, 어머니는 홍사도(洪思道)의 딸이다.
1681년(숙종 7) 소과를 거쳐, 1689년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그러나 이 때 숙종이 인현왕후를 폐위하려 함을 알고 고향에 돌아가 나오지 않았다. 1694년 인현왕후가 복위되자 시강원설서(侍講院說書)·병조좌랑·참의 등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았다.
또, 연신(筵臣) 이기진(李箕鎭), 좌의정 민진원(閔鎭遠) 등의 천거로 병조참판·예조참판에 이어 대사헌에까지 임명되었으나 죄인을 자처하고 모두 응하지 않았다. 그러나 1706년에 홍문록(弘文錄)에 기록되었으며 1708년에 부수찬이 되었다. 이후 1717년에 벼슬이 대사간에 이르렀다.
시로는 <칠석장사연당호운 七夕長沙蓮堂呼韻>·<기낙중제제 寄洛中諸第>가 유명하며, 저서로는 ≪수초당집≫·≪국조전감 國朝全鑑≫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3)권성(權惺, 1653∼1730)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중(警仲), 호는 제월재(霽月齋). 인(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전(佺)이고, 아버지는 양(讓)이며, 어머니는 한극겸(韓克謙)의 딸이다.
1687년(숙종 13) 알성문과에 장원급제, 지평·장령·집의·헌납·사간 등을 지냈다. 1703년 조광조(趙光祖)·이이(李珥)의 유집에서 현군이 행하여야 할 18개조를 뽑아 ≪국조명신주의집록 國朝名臣奏議輯錄≫을 편찬하여 숙종에게 바쳤다. 그 내용은 근성학(勤聖學)·양세자(養世子)·근천계(謹天戒)·절완호(絶玩好)·억사치(抑奢侈)·엄궁위(嚴宮衛)·두참설(杜讒說)·변사정(辨邪正)·득현상(得賢相)·개언로(開言路)·추성신(推誠信)·파붕당(破朋黨)·계척완(戒戚畹)·정사습(正士習)·휼민은(恤民隱)·엄장법(嚴贓法)·신기미(愼幾微)·택장수(擇將帥)였다. 특히, ‘득현상’에서 당시의 재상들을 비난하여 우의정 김구(金構)와 좌의정 이여(李畬)의 처벌을 주장하였으나 숙종은 옹호하였다. 그 뒤 평안·황해·강원·함경·경상·충청도 등의 관찰사를 역임하는 동안 선정을 베풀어 명관으로 이름이 났다.
1721년(경종 1) 한성부판윤으로 신임사화를 맞아 삭직되었다가, 1725년(영조 1) 노론이 집권하자 부총관·판윤·공조판서 등을 지냈다. 1727년 정미환국으로 다시 물러났다가 형조판서·참찬 등에 여러 차례 기용되었으나, 사퇴하고 전원생활로 여생을 보냈다. 시호는 정간(貞簡)이다.
 
4)조수륜(趙守倫, 1555∼1612)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풍양(豊壤). 자는 경지(景至), 호는 풍옥헌(風玉軒)·만귀(晩歸). 팽(彭)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홍문관전한 종경(宗敬)이고, 아버지는 홍문관응교 정기(廷機)이며, 어머니는 관찰사 강욱(姜昱)의 딸이다. 처는 동래정씨(東萊鄭氏)로 현감 선복(善復)의 딸이다. 성혼(成渾)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1579년(선조 12) 사마시에 합격하여 진사가 되고, 1584년에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에 제수되었으며, 1590년에 선릉참봉(宣陵參奉)을 역임하였다. 임진왜란 중 선공감역(繕工監役)에 임명되었으나 곧 해직되고, 1601년 동몽교관(童蒙敎官)으로 복직되었다. 1604년 대흥현감에 제수되었다가 1607년에 파직되었고, 1609년(광해군 1) 호조좌랑으로 기용되었다가 1611년에 평택현감이 되었다. 1612년 신율(申慄)이 황혁(黃赫)과의 오랜 원한으로 역옥(逆獄)을 일으켰는데 이에 연루되어 옥중에서 죽었다.
성혼의 문하에서 단아한 행실로 인해 명성을 얻었으며, 경학에도 조예가 있어 그가 집무하는 관아에서 여러 동문들과 함께 ≪우계집 牛溪集≫을 편집, 출간하였다. 병조참판에 추증되고, 서천의 건암서원(建巖書院)에 제향 되었다.
 
5)권필(權韠, 1569∼1612)
조선 중기의 시인.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여장(汝章), 호는 석주(石洲). 승지 기(祺)의 손자이며, 벽(擘)의 다섯째아들이다. 정철(鄭澈)의 문인으로, 성격이 자유분방하고 구속받기 싫어하여 벼슬하지 않은 채 야인으로 일생을 마쳤다.
술로 낙을 삼아, 부인이 금주를 권하니 시 <관금독작 觀禁獨酌>을 지었다. 젊었을 때에 강계에서 귀양살이하던 정철을 이안눌(李安訥)과 함께 찾아가기도 했다. 동료문인들의 추천으로 제술관(製述官)이 되고, 또 동몽교관(童蒙敎官)에 임명되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았으며, 강화에서 많은 유생을 가르쳤다.
임진왜란 때에는 구용(具容)과 함께 강경한 주전론을 주장했다. 광해군초에 권신 이이첨(李爾瞻)이 교제를 청했으나 거절했다. 유희분(柳希奮) 등의 방종을 임숙영(任叔英)이 <책문 策文>에서 공격하다가 광해군의 뜻에 거슬려 삭과(削科)된 사실을 듣고 분함을 참지 못하여 <궁류시 宮柳詩>를 지어서 풍자, 비방하였다. 이에 광해군이 대노하여 시의 출처를 찾던 중, 1612년 김직재(金直哉)의 무옥(誣獄)에 연루된 조수륜(趙守倫)의 집을 수색하다가 연좌되어 해남으로 귀양 가다가 동대문 밖에서 행인들이 동정으로 주는 술을 폭음하고는 이튿날 44세로 죽었다.
시재가 뛰어나 자기성찰을 통한 울분과 갈등을 토로하고, 잘못된 사회상을 비판 풍자하는 데 주목할만한 성과를 거두었다. 인조반정 이후 사헌부지평에 추증되었고, 광주(光州) 운암사(雲巖祠)에 배향되었다. 묘는 경기도 고양시 위양리에 있고, 묘갈은 송시열(宋時烈)이 찬하였다. ≪석주집 石洲集≫과 한문소설 <주생전 周生傳>이 현전한다.
 
6)홍미(洪冞)
과묵당(果默堂) 홍미는 자가 자진(子晋)이고 남양홍씨(南陽洪氏)로서 증영의정 홍온의 손자인데 선조17년(1588)에 충남 서천의 한산에서 나서 부여군 홍산(鴻山)에서 이몽학(李夢鶴)의 난이 일어났을 때 난이 홍주(洪州)로 번졌는데 13세로서 홍주목사(洪州牧使)이던 백부 홍가신(洪可臣)을 도와 난을 평정하고 청난원종훈(淸難原從勳)을 받았다. 이후 편친(偏親)을 효양하며 은일(隱逸)로 경학(經學)에 정진하다가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켰고, 그 재행(才行)이 알려져 조정에서 대군사부(大君師傅)로 3차나 배하였으나 나가지 않다가 인조의 3자 인평대군(麟坪大君)이 후금의 서울 심양(瀋陽)에 탁질(托質)되어 가자 60의 고령으로 이를 배종(陪從)해 가서 서행일기(西行日記)를 남기고 귀환해서는 그 공으로 삼가현감(三嘉縣監)을 배하였다. 인조 27년(1649)에 귀향하여 66세로 졸했으며 묘소는 부여군 양화면 벽룡리에 있고 하계 권유(霞溪 權愈)가 묘비문을 지었다. 숙종 33년(1707)에 여러 고을의 유림이 게건설향(揭虔設享)하자는 의논이 있었고 고종 30년(1893)에 한산사군자(韓山四君子)의 1인으로 기산의 문헌서원(文獻書院)에 배향되었다. 철종 3년(1852)에 그 문집이 발간되었고 1913년에 그 편저 만언분류(萬言分類) 17권 9책이 발간되었다. 1950년 전란 후 문헌서원이 소실되었다가 중건되면서 과묵당이 거기에 복배되지 못하다가 이때에 화산사에 추배되었다.
 
7)권양(權讓, 1628∼1697)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예경(禮卿), 호는 지족당(知足堂). 강원도관찰사 벽(擘)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인(靭)이며, 아버지는 전(佺)이다.
1656(효종 7)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정언·헌납·병조좌랑·장령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또한, 외직으로 무장(茂長)·함양(咸陽)·한산(韓山) 등지를 다니며 백성을 지성으로 다스려 칭송이 높았다.

화산사, 강당, 외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