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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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팔봉서원(八峰書院)
   충청북도 충주시 이류면 문주리 74-1
   이 자(李 耔) 이경연(李慶延) 김세필(金世弼) 노수신(盧守愼)
   1582년(선조 15)
   1672년(현종 13)
   
   충청북도기념물 제129호(2003.06.13지정)
1582년(선조 15)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이자(李耔), 이경연(李慶延)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고1612년(광해군4) 김세필(金世弼), 노수신(盧守愼)을 추가 배향하였다. 1672년(현종 13)에 ‘八峰’이라고 사액되었으며,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오던 중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1998년 후손들이 출연하고 시, 도의 지원을 받아 전통양식으로 복원되었다. 2003년 6월 13일 충청복도 기념물 제129호로 지정되었다.

1)주벽-이자(李耔, 1480∼1533)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한산(韓山). 자는 차야(次野), 호는 음애(陰崖)·몽옹(夢翁)·계옹(溪翁). 이색(李穡)의 후손으로, 대사간 예견(禮堅)의 아들이다.
1501년(연산군 7) 진사가 되었고, 1504년 식년문과에 장원급제해 사헌부감찰을 지냈다. 천추사(千秋使)의 서장관으로 북경에 다녀온 뒤 이조좌랑에 승진했지만, 연산군 난정 하의 관직 생활에 환멸을 느껴 술로 세월을 보내다가 자청해 의성현령으로 나갔다.
1506년 중종반정 후에 발탁되어 홍문관수찬·교리 등을 지내다가 1510년(중종 5) 아버지의 상으로 관직을 떠났다. 1513년 복직하여 부교리·부응교·사간원사간을 역임하고, 이듬해 어머니의 상으로 사직했다가 1517년부터 홍문관전한직제학을 거쳐 부제학에 승진하였다.
그 후에 좌승지로 옮겼다가 다음해에 대사헌이 되었다. 이 무렵 조광조(趙光祖)·김정(金淨) 등의 신진 사류들과 일파를 이루어 도학정치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으나, 그들의 급진적 개혁 정책을 완화하고자 노력하였다. 1518년 종계변무주청사(宗系辨誣奏請使)의 부사로 북경에 파견되었다. 이 때 정사로 갔던 남곤(南袞)이 병들어 거의 죽게 된 것을 지성으로 간호해 회복하게 했는데, 이 때문에 그는 기묘사화 후 큰 화를 면할 수 있었다. 1519년 귀국해 한성판윤·형조판서·우참찬 등에 임명되었다.
그는 사림파의 한 사람이었으나 성품이 온유하고 교제가 넓어 남곤·김안로(金安老) 등의 훈구 세력과도 원만하게 지냈다. 양파의 중간에서 반목과 대립을 해소하고 온건한 정책으로 유도하고자 했으나 급진 사림파의 반발로 실패하였다.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 사림파가 참화를 입게 되자 그도 여기에 연좌되어 파직, 숙청되었다. 그 뒤 음성·충주 등지에 은거하여 세상을 등지고 독서와 시문으로 소일하고, 이연경(李延慶)·김세필(金世弼)·이약빙(李若氷) 등과 학문을 토론하며 여생을 마쳤다.
효도와 우애가 돈독했고 학문과 수양에 정력을 기울였다. 많은 사평(史評)을 썼으나 일찍 죽어 정리되지 못하였다. ≪주자가례≫를 독신했으며 자손들에게 그 실천을 유언하였다. ≪기묘명현록≫에 올랐고,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음애일기≫와 시문집인 ≪음애집≫이 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다.
 
2)이연경(李延慶, 1484∼1548)
조선 중기의 문신. 본관은 광주(廣州). 자는 장길(長吉), 호는 탄수(灘叟)·용탄자(龍灘子). 할아버지는 판중추부사 세좌(世佐)이고,아버지는 도사 수원(守元)이며, 어머니는 남양방씨(南陽房氏)로 사용(司勇) 의문(毅文)의 딸이다. 1504년(연산군 10)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섬으로 귀양갔다.
1507년(중종 2) 생원시에 합격했으나 학문에만 전념할 뿐 과거는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한다. 1518년 풀려난 뒤 재행(才行)을 겸용한 인물이고 억울하게 죽은 인물의 자손으로 천거되어 선릉참봉·조지서사지(造紙署司紙)·공조좌랑이 되었다.
이듬해 현량과(賢良科)에 급제해 사헌부지평을 거쳐 곧 홍문관교리로 승진하였다. 교리로서 경연에 참석했을 때 재상의 선출이 논의되자 조광조(趙光祖)를 천거하였다. 조광조 일파의 힘으로 급제 전에 이미 청요직에 진출하는 혜택을 입었다.
이와 같은 평소의 조광조와의 교유로 인해 1519년 기묘사화가 일어나자 연루되어 축출될 뻔했으나, 중종이 어필로 찬인록(竄人錄 :귀양 간 인물들을 적은 기록)에서 이름을 지워 귀양을 면했다.
현량과가 혁파되자 관직을 버리고 공주에 물러가 살면서, 이자(李耔)와 더불어 산수를 주유하며 낚시를 즐겼다 한다. 1539년 평시서령(平市署令)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았고, 1545년(인종 1) 현량과가 복과(復科)되었을 때도 나가지 않았다.
자품이 높고 학문과 식견이 뛰어났으며 지조가 있었다 한다. 학문은 세속에서 벗어나 고명한 경지에 마음을 두어 시종 불변하였다. 덕망과 의리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사방에서 선비들이 모여와 문하가 되었는데, 노수신(盧守愼)·강유선(康維善)·심건(沈鍵)은 그의 문하이자 사위들이다.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광안군(廣安君)으로 봉해졌으며, 팔봉서원(八峰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정효(貞孝)이다.
 
3)김세필(金世弼, 1473∼1533)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경주(慶州). 자는 공석(公碩). 호는 십청헌(十淸軒) 또는 지비옹(知非翁). 아버지는 첨정 훈(薰)이며,어머니는 여산송씨(礪山宋氏)로 학의 딸이다.
1495년(연산군 1) 사마시에 합격하고 같은 해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홍문관의 정자·박사를 거쳐 수찬이 되고, 이어서 사헌부지평에 올랐다. 1504년 갑자사화에 연루되어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1506년(중종 1) 중종반정으로 풀려나서 홍문관응교로 기용된 뒤에 사가독서의 은전을 입었다.
뒤에 전한·형조참판·부제학을 지내고 외직으로 광주목사(廣州牧使)·전라도관찰사 등을 역임하였다. 이어 대사헌·이조참판을 지내고, 1519년 사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그 해 겨울 기묘사화가 일어나서 조광조(趙光祖)를 사사(賜死)하자, 임금의 처사가 부당하다고 규탄하다가 유춘역(留春驛)으로 장배(杖配)되었다.
1522년 풀려났으나 다시는 벼슬에 나가지 않고 고향으로 내려가서 십청헌을 짓고 후진을 교육하였다. 그 뒤 공로를 인정하여 이조판서에 추증하고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에 향사되었다. 시호는 문간(文簡)이다. 저서로는 ≪십청헌집≫ 4권이 있다.
4)노수신(盧守愼, 1515∼1590)
조선 중기의 문신·학자.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과회(寡悔), 호는 소재(蘇齋)·이재(伊齋)·암실(暗室)·여봉노인(茹峰老人). 우의정 숭(嵩)의 후손이며, 아버지는 활인서별제(活人署別提) 홍(鴻)이다. 1531년 17세에 당시 성리학자로 명망이 있었던 이연경(李延慶)의 딸과 결혼하고, 장인의 문하생이 되었다.
1541년 27세 때 이언적(李彦迪)과 최초의 학문적 토론을 벌였다. 1543년 식년문과(式年文科)에 장원한 뒤로 전적(典籍)·수찬(修撰)을 거쳐, 1544년에 시강원사서(侍講院司書)가 되고, 같은 해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였다. 인종 즉위 초에 정언이 되어 대윤(大尹)의 편에 서서 이기(李芑)를 탄핵해 파직시켰으나, 1545년 명종이 즉위하고, 소윤(小尹) 윤원형(尹元衡)이 을사사화를 일으키자 이조좌랑의 직위에서 파직, 1547년 순천으로 유배되었다.
그 후 양재역벽서 사건(良才驛壁書事件)에 연루되어 죄가 가중됨으로써 진도로 이배되어 19년간 섬에서 귀양살이를 하였다. 그동안 이황(李滉)·김인후(金麟厚) 등과 서신으로 학문을 토론했고, 진백(陳柏)의 <숙흥야매잠 夙興夜寐箴>을 주해하였다.
이 주해는 뜻이 정명(精明 : 정교하고 명확함.)해 사림 사이에 전송(傳誦 : 전하여 외워옴)됨으로써 명성이 전파되었다. 또한 ≪대학장구 大學章句≫와 ≪동몽수지 童蒙須知≫ 등을 주석하였다. 1565년 다시 괴산으로 이배되었다가 1567년에 선조가 즉위하자 풀려나와 즉시 교리(校理)에 기용되고, 이어서 대사간·부제학·대사헌·이조판서·대제학 등을 지냈으며, 1573년에는 우의정, 1578년에 좌의정을 거쳐 1585년에 영의정에 이르렀다. 1588년에 영의정을 사임하고 영중추부사(領中樞府事)가 되었으나, 이듬해 10월에 정여립(鄭汝立)의 모반 사건으로 기축옥사가 일어나자 과거에 정여립을 천거했던 관계로 대간(臺諫)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그는 시·문·서예에 능했으며, 경일(敬一) 공부에 주력할 것을 강조하고 도심미발(道心未發)·인심이발설(人心已發說)을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양명학(陽明學)도 깊이 연구한 탓에 주자학파의 공격을 받았다. 또한 승려인 휴정(休靜)·선수(善修) 등과의 교분을 통해 학문적으로 불교의 영향을 입기도 하였다.
학문에서는 그가 일찍이 옥당(玉堂)에 있을 때 경연에서 ≪서경≫을 강함에 인심도심(人心道心)의 설명이 주자설과 일치했으나, 진도로 유배되어 그 당시 들어온 나흠순(羅欽順)의 ≪곤지기 困知記≫를 보고 난 후는 전설(前說)을 변경해 도심은 미발, 인심은 이발이라고 해석하게 되었다.
한편 그의 덕행과 업적의 성과는 매우 다양해, 인군과 백성들, 그리고 많은 동료들에게 영향을 주었다. 그가 진도에 귀양 갔을 때 그 섬 풍속이 본시 혼례라는 것이 없고 남의 집에 처녀가 있으면 중매를 통하지 않고 칼을 빼들고 서로 쟁탈하였다. 이에 예법으로써 섬 백성들을 교화해 드디어 야만의 풍속이 없어졌다.
또한 아버지의 상을 당했을 때 대상 후에 바로 흑색의 갓을 쓰는 것이 죄송하다고 생각해 백포립(白布笠)을 쓰고 다니기를 국상(國喪) 때와 같이 했는데, 그 뒤 직제학 정철(鄭澈)이 이를 본받아 실행했고, 뒤에 교리 신점(申點)이 주청해 담제(禫祭) 전에는 백포립을 쓰도록 제도화시켰다.
그는 온유하고 원만한 성격을 가진 문신이자 학자로서 사림의 중망을 지녔으며, 특히 선조의 지극한 존경과 은총을 받았다. 충주의 팔봉서원(八峰書院), 상주의 도남서원(道南書院)·봉산서원(鳳山書院), 진도의 봉암사(鳳巖祠), 괴산의 화암서원(花巖書院)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소재집≫ 13권 8책이 있다. 시호는 문의(文懿)이며, 뒤에 문간(文簡)으로 고쳤다.

터만 남아 있던 것을 1998년 전통양식으로 복원하였다. 건물은 앞면 3칸·옆면 2칸 크기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을 한 맞배지붕이다. 출입문은 솟을삼문(三門)형태로 ‘팔봉서원’의 현판이 걸려 있고 사당의 오른쪽으로는 재실이 있으며 왼쪽에는‘복원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서원은 수주팔봉의 절경이 바라다 보이는 야트막한 언덕의 8부 능선에 자리 잡고 있다.


참고-충주시사
한국향사연구전국협의회, ≪훼철서원조사보고≫, 1993.
문화재청 http://www.cha.go.kr/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