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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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용산서원(龍山書院)
   전라남도 보성군 미력면 덕림리
   박광전(朴光前)
   1607년(선조 40)
   1707년(숙종 33)
   불향
   죽천선생문집 및 유묵목판 -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206호(1999.07.05지정)
용산서원은 보성출신의 죽천 박광전(竹川 朴光前)을 제향 했던 곳으로, 1868년 훼철되었다가 1984년 복원사업이 진행되었다. 이 서원의 창설은 1607년 죽천의 학덕과 충의를 평소 흠모하였던 이 지방유림들에 의하여 추진되었다. 특히 건원 시에는 죽천의 문인으로 문명이 높았던 우산 안방준(牛山 安邦俊)의 역할이 컸던 것으로 보여 지는데, 1607년(선조 40) 그는 <건원통문建院通文>을 작성하여 열읍과 유림에게 전하는 한편 실제로 정길(鄭佶)을 비롯한 도내사림들의 협조를 얻어 서원을 건립하였다. 이로부터 2년 뒤인1610년(광해군 2)에는 광해군이 왕세자시절 그의 사부였던 죽천에게 증정원좌승지겸 경연참찬관을 증직하였고, 가묘에 예관을 보내어 치제致祭하기도 하였다.
창건 이후 100여년이 지난 1705년(숙종 31)에는 호남유생 임치당 등이 용산서원에 사액을 청하는 청액소를 올렸다. 당시 청액의 이유로는 우선 이미 건립된 지 100여년이 경과하여 제향하여 왔다는 점과 다른 設處가 없다는 점, 그리고 학덕과 행의가 사림의 추앙을 받을 만 하다는 사실이 지적되었고, 당시 조정에서는 예조판서 조태채가 주선하여 사액의 지명을 받았다. 그러나 실제로 선액이 된 것은 2년 뒤인 1707년(숙종 33)이었으며 이는 당시 용산서원의 원장이었던 권상하, 이만성, 신임, 김흥경, 이재, 조연빈 등의 합계가 있었기 때문이라 한다.
이후 한차례의 중수가 있었는데 죽천의 7대손인 박벽덕과 윤종의의 <용산서원중수상량문>이 그 사정을 알려주나 정확한 연대는 알 수가 없다. 아마도 이때는 죽천의 묘지명찬(1738년), 문집완성(윤봉조書, 1739년), 묘표찬(윤봉구撰, 1748년) 등 일련의 사업들이 이뤄지던 시기가 지나고 1809년 문집이 중헌되던 어간이 아닐까 생각된다.
이후 1871년 훼철될 때까지의 특기할 연혁은 확인되지 않으며, 다만 1809년(순조 9)에 이루어진 죽천문집의 목판각주와1834년(순조 34)의 청액소와 이에 의한 증직 및 문강이란 익호 하액(1841) 등이 주목된다.
한편≪죽천집≫권8에는 용산서원의 제헌 9수가 전해지는데 그 정확한 년대는 밝힐 수가 없다. 이 제헌의 내용을 보면 임원과 직무,향사의례, 재산(전답)관리, 원생(30인) 및 수직군(30인) 규정, 施罰 등이다. 이밖에 서원자료로 건원통문(1607, 안방준), 청액소(임치당 시) 등이 있다.

1)주벽-박광전(朴光前, 1526~1597)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진원(珍原). 자는 현재(顯哉), 호는 죽천(竹川). 아버지는 진사 이의(而誼)이며, 어머니는 습득 최명기(崔命夔)의 딸이다. 이황(李滉)의 문하에서 수업하였고, 1568년 진사시에 합격하였다. 유희춘(柳希春)이 감사(監司)였을 때 천거되어 경기전참봉(慶基殿參奉)이 되었고, 다시 헌릉참봉(獻陵參奉)으로 옮겼으나 곧 그만두었다. 1581년 왕자의 사부(師傅)가 되었고, 함열(咸悅)·회덕(懷德) 현감을 역임하였으나 상관의 뜻을 거슬려 파직되었다.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임계영(任啓英)·김익복(金益福)·문위세(文緯世) 등과 보성(寶城)에서 의병을 일으켰다. 정병 700여명을 모집하고, 문인 안방준(安邦俊)을 종사(從事)로 삼고 장자인 근효(根孝)를 참모로 삼았으나, 병으로 의병을 통솔할 수 없자 임계영을 의병장으로 추대하였다.
1597년 다시 정유재란이 일어나 적이 호남을 침범하자, 전 판관(判官) 송홍렬(宋弘烈), 생원 박사길(朴士吉) 등에게 격문을 보내어 의병을 일으키고 의병장이 되었다. 동복(同福)에서 적을 크게 무찔렀으나 병이 악화되어 죽었다. 좌승지에 추증되고 보성 용산서원(龍山書院)에 제향되었다. 시호는 문강(文康)이다.

죽천사(竹川祠는) 가묘로써 종가대대로 후손들이 모셔오던 사당이었던 것으로 용산서원의 훼철되고 복설되지 않게 되자 문중의 사우로 이용하고 있다. 1935년 신실(神室)을 중건 상량하였으며,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다. 소슬삼문과 돌담으로 구획되어 있고 전면후측으로 강당이 있다. 이 사우에 죽천사 목판이 보관되고 있다.

1)용산서원유허비
원래 1929년 민내승이 찬한 것을 1987년 박복주의 글씨로 새로 만들어 세운 것으로 서원의 유적입구 동산에 위치한다.
 
2)죽천선생문집 및 유묵목판-전라남도문화재자료 제206호(1999.07.05지정)
임진왜란 때의 의병장 박광전(朴光前)의 시문집이다. 후손 박봉석(朴鳳錫)이 영조 15년(1739)에 편집을 완료하고, 영조25년(1749) 죽곡정사에서 초간, 순조 9년(1809) 용산서원에서 중간, 1930년 죽곡정사에서 3刊된 바 있다.
책판의 편성체제는 권두에 송치규(宋穉圭)의 중간구서(重刊舊序)와 윤봉조(尹鳳朝)의 구서(舊序)가 있고, 권 6말에 5대손 박내석(朴乃錫), 7대손 박형덕(朴馨德) 발문(跋文)이 있다. 또한 권9 말에 기정진(奇正鎭)·오진영(吳震泳)의 속집발문과 안규용(安圭容)의 중간 발문이 있다. 1930년의 별본에는 <七賢擧義錄>이 부록되어 있다.
이 책판의 주요내용은, 賦는 인간의 본심에 관하여 설명한 <정심부>, 자신의 웅대한 포부와 경륜을 피력한 동시에 대장부란 어떤 것인가를 논설한 <대장부부>, 인간의 수양에 관한 <독침부괴부> 등이 있다. 소 중 <상 왕세자 무군시서>는 임진왜란 때 광해군에게 민심을 안정시키고 농사를 장려할 것을 권고한 내용이며, 서 중 <상퇴계선생문목>은 이황과 <주자서절요>중 의심난 부분을 질의, 응답한 내용이다. 잡저 중 <임진거의시격문>은 저자가 의병을 일으킬 적의 격문이다.
책판의 형태적 특징은 가로 47.2㎝에 세로 20.5㎝이고, 변란은 사주가 쌍변으로 되어 있다. 반곽의 크기는 가로 14㎝, 세로 20㎝이다. 반면은 10행, 한행에 20자씩 배자되어 있다. 판면의 왼쪽 1행에 ‘죽천선생문집’라는 권두서명이, 가운데의 판심부에는 상어미 위쪽에 ‘죽천집’라는 판심서명이 보이고 있다. 어미의 안쪽으로 권수 및 장수가 표시되어 있으며, 어미는 상하향2엽화문어미형식을 보이고 있다.
이 책은 그의 사후 3차에 걸쳐 판각되었다. 그러나 초·재각판은 이번 조사를 통해서 죽천사에 소장되어 있는 책판 가운데 한판도 발견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사실로 보아, 현재 이곳에 보관된 책판은 1929년에 세 번째로 판각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3)신도비와 친필
죽천사에서 50여 m정도 떨어진 곳에 박광전의 신도비(1918년, 田愚撰)가 있고, 친필유묵으로 우계기(愚溪記)가 전해진다.
참고-목포대학교 박물관. 전라남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