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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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오강서원(五崗書院)
   전라북도 익산시 팔봉면 석암리 반산
   김시흥(金時興) 김 향(金 珦) 김 관(金 觀) 김문기(金文起) 김 준(金 遵)
   1852년(철종 3)
   
   (음력) 3월 5일
   
오강서원은 1852년(철종 3)에 현재의 익산시 오산면 오산리에 창건하였으나 1868년(고종 5)에 대원군의 시책에 따라 철폐되고 그 후 1884년(고종 21)에 현재의 위치로 옮겨와 설단(設壇)을 하여 반산원(盤山院)이라 하였다. 그 후 1961년 이곳에 배향된 김문기의 후손들에 의해 사당 3칸, 강당 4칸을 중건하여 오강서원이라 하였다.
이곳에는 김시흥(金時興)을 주벽으로 하고 김향(金珦), 김관(金觀)과 김문기(金文起), 김준(金遵)을 배향하고 음력 3월 5일 배향한다.

1)주벽-김시흥(金時興)
시조대보공의 38세손이고 중시조 경순왕의 11세손이며 호는 송악 또는 둔촌 고려 고종과 원종때 살았고 벼슬 광록대부평장사였고 김녕군을 봉군받았고 시호는 문열공 국난을 평정한 공으로 상낙군을 봉받았다고 또 공을 세워 김녕군으로 이봉받았다. 할머니는 부부인(府夫人)개성 왕(王)씨 자녀는 둘인데 아들만 둘이다. 아들 상과 순이다
 
2)김향(金珦)
고려 인종 때 공신, 자는 부민(富民) 호는 옥강(玉岡), 익호는 원정(元靖), 본관은 김녕이다.
서리(胥吏)로 기용되었는데 학식은 없었으나 일처리를 잘하여 중용되니 벼슬이 병부상서 (兵部尙書), 동지추밀원사(同知樞密院事)에 이르렀다. 이자겸과 사돈 간이었으나 그가 역모를 꾀하자 왕명으로 척춘경과 논의하여 이자겸 일당을 없애는데 성공, 위사공신(衛社功臣)의 호를 받고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에(門下侍郞同中書文下平章事) 이르렀다.
 
3)김관(金觀)
호는 수헌(睡軒), 본관은 김녕이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탁월하고 덕업이 높아 일찍이 문과에 급제하였다. 벼슬은 자헌대부, 이조판서에 이르렀다. 충효로 이름 있었다. 대광보국숭록대부 의정부영의정(大匡輔國崇祿大夫 議政府領議政)에 증직되었다.
 
4)김문기(金文起, 1399∼1456)
조선 전기의 문신. 초명은 효기(孝起). 자는 여공(汝恭), 호는 백촌(白村). 충청북도 옥천 출신. 김알지(金閼智)의 후손으로 당대에는 본관을 김해(金海)로 사용하였으나, 후대에 이르러 그 후손들이 김수로왕(金首露王)의 후손인 김해김씨와 구별하기 위하여 김녕(金寧)과 경주(慶州)로 사용하는 두 파로 갈려졌다. 아버지는 관(觀)이다.
1426년(세종 8)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했으나 아버지의 상을 당해 3년 동안 시묘하였다. 1430년 예문관검열, 1436년 사간원좌헌납을 거쳐, 1445년에 함길도도절제사인 박종우(朴從愚)의 천거로 함길도도진무(咸吉道都鎭撫)에 임명되었다.
그런데 1447년에 이질로 군무에 장기간 복무할 수 없게 되자 내직으로 들어와 1448년에 겸지형조사(兼知刑曹事)에 임명되었다.
1450년 병조참의를 거쳐, 1451년(문종 1) 함길도도관찰사에 임명되자 임지에 가서 안변·정평 등지에 둔전(屯田)을 설치할 것을 건의하였다. 1453년(단종 1)에 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형조참판에 제수되었다가 다시 외직인 함길도도절제사로 나갔다.
1455년 세조가 즉위하자 차사원(差使員)과 힘을 합쳐 유시에 따라 온성의 읍성을 축조하는 공사에 공을 세웠다. 그 해 또다시 내직으로 들어와 공조판서에 임명되었다.
그러다가 다음 해인 1456년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 등이 주동한 단종 복위 계획이 사전에 발각되어 모두 주살당할 때, 그도 이 사건에 관련되어 군기감 앞에서 처형되었다. 단종 복위에 가담한 사람들 중에 6인의 절의(節義)를 ‘사육신’이라 했으며, 사육신의 사실은 남효온(南孝溫)이 쓴 ≪추강집 秋江集≫의 육신전(六臣傳)에 실려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그 뒤 1691년(숙종 17) 국가에서는 육신을 공인해 복관시켰고, 뒤따라 1731년(영조 7)에는 김문기를 복관하고 1757년에 충의(忠毅)란 시호를 내렸다.
또한 1791년(정조 15)에 단종을 위해 충성을 바친 여러 신하들에게 ≪어정배식록 御定配食錄≫을 편정(編定)할 때, 그는 삼중신(三重臣 : 閔伸·趙克寬·金文起)의 한 사람으로 선정되고, 성삼문·박팽년·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하위지(河緯地) 등 6인은 ≪추강집≫의 육신전대로 ‘사육신’에 선정되었다. ≪어정배식록≫은 정조가 내각과 홍문관에 명령해 ≪세조실록≫을 비롯한 국내의 공사 문적을 널리 고증해 신중히 결정한 국가적인 의전(儀典)이다.
이 때 김문기에게는 앞서 1453년 계유옥사 때 사절(死節)한 이조판서 민신과 병조판서 조극관과 같은 판서급의 중신이라는 이유로 삼중신이란 칭호를 내린 것이었다.
그의 사실을 기록한 ≪백촌유사 白村遺事≫ 3책이 전하며, 경상북도 김천시 지례면의 섬계서원(剡溪書院)에 향사되었다.
 
5)김준(金遵)
조선 전기 문신이며 자는 응원(應遠), 호는 만지당(晩池堂), 본관은 김녕이다. 어려서부터 자질이 뛰어났고 1426년(세종 8)에 문과에 급제, 벼슬이 영돈녕부사(領敦寧府事)에 이르렀다. 단종이 폐위되자 가족을 이끌고 흥양 가산촌에 은거하였다. 세조가 즉위하여 여러 차례 불렀으나 나가지 않고, 만지(晩池)라는 호를 지어 소요(逍遙)하고 세조의 일을 분개(憤慨)하며 일생을 마쳤다. 명신록에 올랐으며 고흥 봉암사에 향사되었다.

1961년 이곳에 배향된 김문기의 후손들에 의해 중건되어 사당 3칸, 강당 4칸을 중건하여 오강서원이라 하였다.

참고-전북도지, 한국민족문화백과대사전
전북향교사우대관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