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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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삼현서원(三賢書院)
   전라북도 김제시 백산면 하정리 165
   강 승(姜 昇) 김시습(金時習) 남효온(南孝溫)
   1844년(헌종 10)
   
   2월 중정(中丁), 8월 중정
   
1844년(헌종 10) 지방유림의 공의로 강승(姜昇)·김시습(金時習)·남효온(南孝溫)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선현배향과 지방교육의 일익을 담당하여 오던 중 1869년(고종 6)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되었다. 그 뒤 1924년 후손과 유림에 의하여 복원되었으며, 1969년과 1983년에 중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1)주벽-강승(姜昇, 1430∼1500)
조선 전기 충신, 자는 자양(子揚), 호는 완휴재(玩休齋), 본관은 진주이다. 통계 회중(通溪 淮仲)의 증손, 김강호(金江湖)의 문인이다.생원으로 계성전 내빈소윤(啓聖殿 內賓少尹)을 역임하고 송화 대구 벽동 김제 사읍재(四邑宰)를 지내며 권농흥학(勸農興學)하고 정청사간(政淸事簡)하였다. 김제군수로 있을 때 단종이 폐위되자 사직하고 두문불출하며 求道에 전심하였다. 세조 때 송산군(松山君)을 봉했으나 받지 않았다.
 
2)김시습(金時習, 1435∼1493)
조선 초기의 학자·문인, 생육신의 한 사람. 본관은 강릉(江陵). 자는 열경(悅卿), 호는 매월당(梅月堂)·청한자(淸寒子)·동봉(東峰)·벽산청은(碧山淸隱)·췌세옹(贅世翁), 법호는 설잠(雪岑). 서울 출생. 작은 키에 뚱뚱한 편이었고 성격이 괴팍하고 날카로워 세상 사람들로부터 광인처럼 여겨지기도 하였으나 배운 바를 실천으로 옮긴 지성인이었다. 이이(李珥)는 백세의 스승이라고 칭찬하기도 하였다. 그의 생애를 알려주는 자료로는 ≪매월당집≫에 전하는 <상류양양진정서 上柳襄陽陳情書>, 윤춘년(尹春年)의 전기(傳記), 이이의 전기, 이자(李耔)의 서문(序文), ≪장릉지 莊陵誌≫·≪해동명신록≫·≪연려실기술≫ 등이 있다.
10대에는 학업에 전념하였고, 20대에 산천과 벗하며 천하를 돌아다녔으며, 30대에는 고독한 영혼을 이끌고 정사수도(靜思修道)로 인생의 터전을 닦았고, 40대에는 더럽고 가증스러운 현실을 냉철히 비판하고 행동으로 항거하다가 50대에 이르러서는 초연히 낡은 허울을 벗어 버리고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다가 마지막으로 찾아든 곳이 충청도 홍산(鴻山) 무량사(無量寺)였다.
이곳에서 59세의 나이로 병사하였다. 유해는 불교식으로 다비(茶毗)를 하여 유골을 모아 그 절에 부도(浮屠)로 안치하였다. 그는 생시에 이미 자기의 초상화인 노·소(老少) 2상(二像)을 손수 그리고 스스로 찬(贊)까지 붙여 절에 남겨두었다고 하나, 현재는 ≪매월당집≫(신활자본)에 <동봉자화진상 東峯自畫眞像>이 인쇄되어 전한다. 그 밖에 작자 미상인 김시습의 초상화가 무량사에 소장되어 있다. 그는 단종이 복위된 숙종 33년(1707)에 사헌부 집의(執議)에 추증되었고, 정조 6년(1782)에는 이조판서에 추증되었으며 동8년에는 청간(淸簡)이란 시호가 내려졌다. 그가 쓴 많은 시가 유실되었으나 그의 문집은 중종 때에 정부관료들에 의해서 그의 시가 좋다고 하여 편찬이 논의되었고, 이자(李耔)에 의하여 10여 년 동안 수집하여 겨우 3권으로 모아졌으며, 윤춘년·박상이 문집 자료를 모아 1583년 선조의 명에 의하여 이이가 전을 지어 교서관에서 개주 갑인자로 23권이 간행되었다. 일본 봉좌문고와 고려대학교 만송문고에 소장되어 있다.
 
3)남효온(南孝溫, 1454∼1492)
조선 전기의 문신.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벽사(碧沙). 영의정 재(在)의5대손으로, 할아버지는 감찰 준(俊)이고, 아버지는 생원 전(恮)이며, 어머니는 도사 이곡(李谷)의 딸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이며, 김굉필(金宏弼)·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수학하였다.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이다. 인물됨이 영욕을 초탈하고 지향이 고상하여 세상의 사물에 얽매이지 않았다. 김종직이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우리 추강’이라 했을 만큼 존경했다한다. 주계정(朱溪正)·이심원(李深源)·안응세(安應世) 등과 친교를 맺었다.
1478년(성종 9) 성종이 자연 재난으로 여러 신하들에게 직언을 구하자, 25세의 나이로 장문의 소를 올렸다. 이 때문에 훈구파(勳舊派)의 심한 반발을 사서 도승지 임사홍(任士洪), 영의정 정창손(鄭昌孫) 등이 그를 국문할 것을 주장했다. 이 일로 인하여 그는 정부 당국자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고, 세상 사람들도 그를 미친 선비로 지목하였다. 1480년 어머니의 명령에 따라 마지못해 생원시에 응시, 합격했으나 그 뒤 다시 과거에 나가지 않았다. 김시습(金時習)이 세상의 도의를 위해 계획을 세우도록 권했으나, 소릉이 복위된 뒤에 과거를 보겠다고 말하였다. 당시는 세조를 옹립한 정난공신(靖難功臣)들이 집권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소릉 복위 주장은 용납되지 않았고, 다른 명목으로 박해하려 하였다. 그 뒤 벼슬을 단념하고 세상을 흘겨보면서, 가끔 바른말과 과격한 의론으로써 당시의 금기에 저촉하는 일을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때로는 무악(毋岳)에 올라가 통곡하기도 하고 남포(南浦)에서 낚시질을 하기도 하였다. 또한, 신영희(辛永禧)·홍유손(洪裕孫) 등과 죽림거사(竹林居士)를 맺어 술과 시로써 마음의 울분을 달래었다. 산수를 좋아하여 국내의 명승지에 그의 발자취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한편으로 “해와 달은 머리 위에 환하게 비치고, 귀신은 내 옆에서 내려다본다.”는 경심재명(敬心齋銘)을 지어 스스로 깨우치기도 하였다. 그리고 당시의 금기에 속한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등 6인이 단종을 위하여 사절(死節)한 사실을 <육신전 六臣傳>이라는 이름으로 저술하였다. 그의 문인들이 장차 큰 화를 당할까 두려워 말렸지만 죽는 것이 두려워 충신의 명성을 소멸시킬 수 없다 하여 ≪육신전≫을 세상에 펴냈다.
그가 죽은 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고담궤설(高談詭說)로써 시국을 비방했다는 이유로 그 아들을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이듬해에는 윤필상(尹弼商) 등이 김종직을 미워한 나머지 그 문인이라는 이유로 미워하여 시문을 간행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 때에는 소릉복위를 상소한 것을 난신(亂臣)의 예로 규정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 당하였다. 1511년(중종 6) 참찬관(參贊官) 이세인(李世仁)의 건의로 성현(成俔)·유효인(兪孝仁)·김시습 등의 문집과 함께 비로소 간행하도록 허가를 받았다. 1513년 소릉 복위가 실현되자 신원되어 좌승지에 추증되었다. 1782년(정조 6)에 다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세상에서는 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김시습·조려(趙旅)·성담수(成聃壽) 등과 함께 생육신으로 불렀다.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 장흥의 예양서원(汭陽書院),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의령의 향사(鄕祠)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추강집≫·≪추강냉화 秋江冷話≫·≪사우명행록 師友名行錄≫·≪귀신론 鬼神論≫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사우(祠宇), 조의문(弔義門), 4칸의 강당, 4칸의 고사(雇舍), 대문 등이 있다. 사우에는 북벽(北壁) 좌측으로부터 강승·김시습·남효온의 순으로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중앙의 마루와 양쪽 협실로 되어 있는데, 서원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및 학문 강론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참고-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전북향교원우대관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