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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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신산서원(新山書院)
   경상남도 김해시 대동면 주동리 737
   조 식(曺 植)
   1609년(광해군 1)
   1609년(광해군 1)
   2월, 8월 중정(仲丁)
   산해정(山海亭)-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125호(1985.01.23지정)
조선시대 남명 조식(南冥 曺植)이 30년 동안 학문과 덕을 닦으며 제자를 가르치던 서원이다. ‘산해정(山海亭)’이라는 이름은 높은 산에 올라 바다를 굽어본다는 뜻으로, 학문을 닦아 경지가 높아지면 경륜과 도량이 바다와 같이 넓어진다는 것을 의미하여 쓴 것이다.
1593년(선조 21)에 서원으로 착공했으나 왜란으로 중지된 것을 1609년(광해군 1)에 완성하여 신산서원이라고 하였다. 같은 해에 ‘신산(新山)’이라고 사액되었다. 그러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고, 해방 후 고쳐 지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99년 김해시에서 신산서원을 복원하였다.

1)주벽-조식(曺植, 1501~1572)
조선 전기의 성리학자이고 영남학파의 거두이다. 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건중(楗仲), 호는 남명(南冥). 명종과 선조에게 중앙과 지방의 여러 관직을 제안 받았으나 한 번도 벼슬에 나가지 않고 제자를 기르는 데 힘썼다.
1501년 연산군 7년 경상도 삼사현 토골에서 승문원 판교 조언형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였지만, 과거에는 1,2번 응시하고 이후로 응시하지 않았다. 1527년 중종 22년 부친상을 당하여 3년간 시묘하였고, 1531년 생계가 어려워지자 처가인 김해의 탄동으로 찾아가 산해정을 짓고 제자교육에 힘썼다.
1539년 38세에 헌릉참봉에 임명되었지만, 벼슬을 고사하였고, 1544년 관찰사의 면담도 거절하였다. 1549년 명종 4년 전생서주부에 특진되었으나 고사하였고, 집 근처의 계복당과 뇌룡사를 지어 강학에 전념하였다. 1556년 종부시주부로 다시 부름을 받았지만, 역시 고사하였고 1544년 벼슬길에 나가라는 이황의 권고도 거절하였다.
1561년 지리산의 덕천동으로 옮겨 산천재를 짓고, 성리학을 연구하여 독특한 학문의 체계를 이룩하였다. 1567년 5월 명종의 부름을 받고 찾아가 치국의 도리를 건의하고 돌아왔다. 만년에는 두류산에 들어가 학문 연구와 후진 양성에 전념하였다. 여러 차례 조정에서 벼슬을 내렸으나 모두 고사하였다.
그의 제자로 김효원, 김우옹 등 저명한 학자들이 배출되었다. 일반적으로 낙동강을 경계로 경상우도 지역(오늘날의 경상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학맥을 형성하였다. 유명한 글로는 ‘단성소’라고 불리는 ‘을묘사직소’가 있다. 선조 때 대사간, 광해군 때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2)신계성(申季誠, 1499년~1562)
자는 중성(仲誠). 본관은 평산(平山). 소는 석계(石溪), 송계(松溪)라 하였는데 죽은 뒤에 학자들이 높혀서 송계선생(松溪先生)이라 하였다. 연산군 5년 기미(1499) 11월 27일에 밀양 삽포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과거는 일삼지 아니하였다.
일찍 송당 박영(松堂 朴英)의 문하에서 수학하여 도의를 강마(講磨)하고 성리(性理)를 토론하여 조예가 더욱 심오하고 소견이 더욱 고명하여 남명 조식(南冥 曺植), 황강 이희안(黃江 李希顔), 대곡 성운(大谷 成運), 삼족당 금대유(三足堂 金大有), 청송 성수침(聽松 成守琛), 동주 성제원(東洲 成悌元) 등과 더불어 서로 왕래하며 사귀어 마침내 서로 막역한 사이가 됨에 그들이 외우(畏友)로 추대하였다.
돌이 맑은 개울가 송죽림(松竹林) 속에 몇 간의 초당을 지어 석계정사(石溪精舍)라 하고 모여오는 제자들을 돈독히 행의(行義)로써 예절을 가르치고, 배움에는 반드시 소학(小學)을 먼저 가르쳐 유학(儒學)을 깨우치니 모두 다 공경하고 따랐으며, 공경대부(公卿大夫)와 선비가 그의 지역에 들어오면 가서 뵈옵고 그의 문 앞을 지나가기를 두려워하며, 모두 다 당대의 산림제상(山林宰相)이라 하였다. 나라에서 덕행(德行)으로 여러 번 불렀으나 벼슬에 나가지 아니하고 평생을 백의(白衣)로서 살았다.
명종 17년 임술(1562) 5월 21일 향년 64세로 세상을 떠나 밀양읍 장선리(長善里=용평리)에 안장하였다. 명종 20년 을축(1565)에 남명 조식(曺植)이 묘갈명(墓碣銘)을 짓고, 선조 4년 신미(1571)에 문인 박재(朴齋), 김유(金紐)가 행장(行狀)을 쓰고, 낙천(洛川) 배신(裵紳)이 행록(行錄)을 썼다.
선조 9년 병자(1576)에 부사 김극일(金克一)이 여표비명(閭表碑銘)을 지어 삽포리에 세웠는데 임진왜란으로 폐몰된 것을 인조 12년 갑술(1634)에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이 발문을 짓고, 글씨를 썼으며 봉조하(奉朝賀) 유척기(兪拓基)가 전(篆)하여 중건하였다.
선조 39년 병오(1606)에 김해 신산서원(新山書院)에 남명 조식선생과 병향(竝享)으로 입향(入享)하니 상향축문(常享祝文)은 입재(立齋) 정종노(鄭宗魯)가 지었으며, 광해 원년 기유 (1669)에 사액(賜額)되었다. 인조 15년 정축(1637) 10월에 덕성서원(德成書院)이라 하고 점필재 김종직 선생의 배향위(配享位)에 입향되고 현종 10년 기축(1669)에 사액되었다. 순조 15년 을해(1815)에 實紀 1책을 목판으로 간행하고 지금까지 장판(藏板)하고 있다.

사당 영역이 없이 학문을 가르치는 공간만으로 이루어진 서원 형식을 가지고 있었다. 건물은 앞면 5칸·옆면 2칸의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여덟 팔(八)자 모양인 팔작지붕이다. 1999년 복원으로 사당, 강당(산해정), 동재, 서재, 내삼문, 외삼문을 갖추게 되었다.

1)산해정-경상남도문화재자료 125호(1985.01.23지정)
지금의 산해정(山海亭)은 1815년(純祖 20)에 송윤증(宋允增) 등이 다시 세운 것이다. 남명선생의 위패(位牌)를 모시는 사당(祠堂)은 없고 가르치는 공간만으로 된 서원이다.
건물은 앞면 5칸, 옆면 2칸에 추녀 끝을 올린 지붕의 목조기와집(木造瓦家)이다. 앞부분의 기둥을 받치는 높은주춧돌과 잔가지를 엮어 진흙을 바른 침실 천장의 제작법이 특징이다.

참고-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