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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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예암서원(禮巖書院)
   경상남도 김해시 삼방동 10-1
   조이추(曺爾樞)
   1709년(숙종 35)
   
   (음력) 3월 20일
   
조이추(曺爾樞)의 행적을 기리기 위해 그의 사후 2년 후인 1709년(숙종 35)에 예암사(禮巖祠)를 창건하여 향사를 거행하였다. 1822년(순조 22)에는 예암서원으로 확대 개편하였다. 1869년(고종 6)에 서원훼철령으로 철거되었다가, 1978년에 복구하였다. 이후 1995년에 토지구획사업으로 서원이 다시 철거되었는데, 2005년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여 복구하였다.
1. 1707년(숙종33) 12월 29일 사우당공(휘 曺爾樞)선조 서거(逝去) 
2. 1709년(숙종35) 12월 예암사(禮巖祠) 창건(儒林道義稧門生 鄕民主役) 
3. 1822년(순조22) 4월 예암서원으로 승격(陞號時道會通文) 
4. 1871년(고종8) 서원정비정책으로 훼철 
5. 1978년 서원복원(後孫共役 儒林後援) 
6. 1995년 김해시의 도시정비사업으로 인하여 철거 
7. 2005년 이전 복원중건(後孫共役 儒林後援) 
8. 2007년 6월 10일 위패봉안식 및 고유향례 거행 

1)주벽-조이추(曺爾樞,, 1661~1707)
본관은 창녕이고, 자는 원경(元卿)이고 호는 사우당(四友堂)이다. 아버지는 전(恮)이고, 어머니는 진양강씨 수인(壽仁)의 딸이다. 할아버지가 음직으로 찰방(察訪)을 역임하였으며, 아버지는 관직을 역임하지 않았다. 성장하면서 이황의 ≪성학십도≫를 수양의 근본으로 삼아 공부하였다. 또한 김해에서 오랫동안 후학을 훈도하였던 조식의 학문 분위기도 그의 실천 수양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별한 관직을 역임한 적이 없으나, 문중의 대소사를 잘 처결하였으며, 고을의 일에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였다. 그의 묘지명(墓誌銘)에 따르면, 임진왜란 이후 없어진 고을 향약을 복원하기 위해 마을의 몇몇 유지들과 함께 여씨향약(呂氏鄕約)과 퇴계향약(退溪鄕約)을 본받아 14조의 향약을 제정하여 시행함으로써 고을의 풍속이 크게 변혁되었다고 특기하였다. 그와 교유한 인물 가운데 이름난 이는 이형상(李衡祥), 이만부(李萬敷), 김남수(金南粹), 김여진(金汝振)등이다.
 
건축물
강당은 정면 5칸의 건물이며, 묘우인 경모사(景慕祠)는 2칸으로 구성되었다. 내삼문인 경숭문(景崇門)은 1칸이며, 동재인 이연재(怡然齋)와 서재인 양성재(養性齋)는 모두 3칸으로 구성되어 있다. 외삼문인 창예문(彰禮門)은 2칸으로 구성되었으며, 이 밖의 건물로는 측사(側舍)가 있다.
 
∘대지면적 : 300평
∘정당(5칸) : 24평
∘묘우(廟宇 : 景慕祠) : 2칸 8평 
∘내삼문(景崇門) : 1칸 4평 
∘동재(怡然齋) : 3칸 12평 
∘서재(養性齋) : 3칸 12평 
∘외삼문(彰禮門) : 2칸 8평 
∘측사(側舍) : 4평
 
예암서원의 상량문(上樑文) 김여진(金汝振) 
사우당공의 문집에 상량문 등 10건과 유시:84건, 서(書):27건, 제문:11수, 만장:19매, 발문:14건 등이 전해오고 있으나 본란에서는 예암서원 상량문과 유거3수만을 소개한다. 

사람이 돌아가신 일주기(一周朞)에 바야흐로 원근의 애통함이 간절하도다. 사당이 그 다음해에 세워지니 곧 향리의 정을 보리로다. 사당으로 제사할만한 례(禮)는 그러하거니와, 성하도다. 
사우당의 주인이여! 이는 오직 창녕(昌寧)의 세가(世家)라. 재주가 어찌 일찌이 아름답지 않던가! 가르침을 받을 수 없어도 바르게 길러진. 뜻이 어찌 일찍이 작은 데 있었서리오? 
여러 번 빛나게 문장(文章)을 이루려 했으나 두려워 길을 바꿈은(병서 폐지) 문득 자후(子厚: 張子厚)가 손오병서(孫吳兵書)를 사절했음 같도다. 
열연(悅然)히 깨달아 알았으니 거백옥(遽伯玉:衛의 賢大夫)이 용감히 덕의에 나아감 같았도다. 시(詩)는 뜻을 말함이라. [覺今是而昨非(오늘이 옳고 어제까지가 잘못)]라는 문장을 썼으며 서(書)는 기록 함이라. 미도(迷道:實迷途而未遠)와 실지(實地)를 글씨로 썼도다. 
네 받은 성품(性品) 안에 진작(振作)하는 조습공부(鳥習工夫:새가 날갯짓 하는 공부)를 했으니 누구가 그 기품 바꾸어 표범같이 변한 군자 되기 어렵다고 말 하리요? 과연 모습이 갑자기 변했도다. 
군자가 검소하여 절도 있음은 의복음식의 사이요. 환연히 볼 수 있음은 주선 진퇴의 즈음이로다. 그 적학(積學)의 오램을 비교하면 도를 향한 부지른 함을 더욱 보겠도다. 밝은 창 앞에 우뚝이 앉아 십수 년 오토(烏兎)의 광명 짓고 책 앞에 조용히 앉아 천만년 성현(聖賢) 마음 기약했도다. 
말과 행동에 나타나 허물이 없으니 잠깐 사이에도 성현(聖賢)은 따른다 하겠고 사무를 처리하여 예의가 있으니 거의 습관이 자연스럽게 되었다. 
정성과 공경의 두 가지 다 선조(先祖) 받들기에 다해졌으니 종족(宗族)이 다 기뻐하고 벗을 믿고 구휼[(救恤:임괴(任愧) 주례(周禮)에 6행(六行)의 두 번째로 효우(孝友) 목휼(睦恤) 임괴(任愧)라 함)]은 사물을 접함에 일치(一致)하여 온 고을이 함께 추중(推重)했다. 
지령(地靈)은 인걸(人傑)을 따라 좋으니 모두 금관(金官=金海)에 한선비가 있다 했는데 하늘이 어찌 연수(年壽)를 주지 않았는고? 문득 아드님이(玉樹) 삼천(三泉)에 묻힘을 보리로다. 학은 누가 마당에 길들일꼬? 
서호처사림화정(西湖處士林和靖)의 세월이 슬프도다. 까마귀만 공연히 지붕위에 울음을 남기니 동리(東里)의 (鄭子産) 그리운 사모(思慕)가 더욱 깊구나! 
어찌 세월을 비워두고 제사하지 않으랴! 진실로 때에 따라 공경을 일으키는 자 있도다. 그 죽음을 슬피함에 이에 여항(閭巷=民間)의 여론이 일어났고 이 덕성을 좋아하매(民之秉彝 好是懿德:민지병이 호시이덕) 드디어 향교나 서원(書院)의 공찬(公讚)이 합치되었다. 

이로 인하여 예부터 집을 세우니(잉단구지:仍堂搆之) 누가 느껴 그리워하지 않으라. 건물이 새로운 법도로 세워지니 모두가 눈을 닦고 보았고 소문(所聞=風聲)이 미치는 곳에 따라 모든 백성이 와서 날짜를 채우지 못하고서도 공역(工役)이 완성되었고(庶民自來 不日成之) 지기(志氣)가 같은 바에 구름 같은 선비가 모여 들었다. 백년 신령(神靈) 모실장소가 이루어지니 상향축(常享祝)은 영원히 역사에 남을 것이고 많은 선비 학문 강론할 자리 세워지니 장수(藏修)는 천억년(千憶年)을 기대하리라. 다만 육위(六偉=上樑) 노래 베풀어 들보 얹음에 흥을 도우리라.
어엿차(兒郞偉) 이 들보를 동쪽으로 들어 보세. 동해 위의 신어명산(神魚名山) 아련히 떠 있는데 어떡하면 마음 밭에 참 도리를 구해 볼가? 
아침마다 붉은 해가 하늘 향해 붉어지네. 


어엿차(兒郞偉) 이 들보를 서쪽으로 들어보세. 
이로부터 서당 향교 길이 혼미 않으리라. 한 거울 근원머리 활천 물이 내려오니 동네 이름 천고토록 새벽닭이 울어 예리. 

어엿차 이 들보를 남쪽으로 들어보세. 삼차강(三叉江) 푸른 물빛 쪽풀보다 더 푸르니 헤엄치는 고기떼가 연못에 펄펄 뛰네. 
그 위에 솔개 날아 두세 바퀴 돌고 도네 

어엿차 이 들보를 북으로 들어보세. 
신어산 구지암(神魚山 龜旨岩)이 끝없이 달려오네. 우리네 하려는 일 어찌 다만 우연이리? 때마침 남악 형산 금간(南岳 衡山 金簡:황금의 귀중문서 = 여기서는 地靈 人傑) 얻기 기다렸네. 

어엿차 이 들보를 위쪽으로 들어보세. 
강산 풍월(江山風月) 둘 다 밝아 무진장 벌였으니 어찌 다만 취지무검 (取之無禁;강산의 경치는 누구나 취하여도 방해할 자 없다) 용지불갈(用之 不竭:써도 무방하다) 뿐이겠는가? 
그대에게 주어 본뜨고 알게 하면 하늘 마땅히 우러르리. 

어엿차 이 들보를 아래로 들어보세. 
우뚝하다. 눈앞에 큰 집 세운 것 보니 사물 시초(始初:權輿) 이제부터니 현재(賢材)를 길러내리. 재재다사(濟濟多士:많고 많은 선비) 유유록명(唯唯鹿鳴:꾸루룩 사슴울음:詩經에 唯唯鹿鳴 食野之革) 소아편(小雅篇)을 노래하네. 
엎드려 원컨대 들보를 엊은 뒤에 골짜기엔 교룡(蛟龍)을 깃들게 하고 숲 속에는 표범을 감추게 하여 저잣 먼지 떨치고 물 더 맑고 산 더 높이 누른 책을 스승 삼아 낮에도 함이 있고 밤에도 얻음 있어 집 집 마다 시를 읊는 풍속이 일어나고 집에 들어가면 효도하고 문밖에 나오면 공손하는 풍속이 이루어지면 지키지 않아도 (사회가) 움직이니 (好轉되리니) 사람이 어찌 보고 느끼지 않으리오? 뜻이 있으면 이와 같이 되는 것이니 선비들은 마땅히 귀의(歸依 : 立德에) 할 것이다. 
▶ 禮岩書院 上樑文 金汝振 
人亡周一年方切遠邇之慟廟成越明歲乃見鄕里之情社可祭於禮則然矣猗歟四友堂主寔惟夏山世家才何曾不美乎未能蒙而養正志豈嘗在小也累欲賁然成章惕然改轍條謝子厚於孫吳怳爾知非勇進伯玉於德義詩言志也題覺今悟昨之章書用識哉有迷途實地底字自謂性分可盡作之鳥習工夫誰道氣稟難移果然豹變君子儉而有節衣服飮貪之間煥然可觀周旋進退之際比其積學之久益見向道之勤兀坐明窓前十數年烏兎光景靜對遺經上千萬古聖賢心期見於云爲而無愆可謂造次必於是措諸事務而有禮庶幾習慣著自然誠敬兩盡於奉先宗族咸悅任恤一致於接物鄕黨共推地逐人而好焉皆稱金官有一士天胡年不假也遽見玉樹埋三泉鶴誰馴於庭中西湖之焉月堪愴烏空餘於屋上東里之羹牆益深其可使暖歲而不祀乎固有所登時而起敬者哀其死也載發閭卷之輿論好是德哉遂合核院之公議仍堂搆之舊祉孰不感懷刱棟宇之新規擧皆拉目風聲所及來不日之庶民志氣値同就如雲之章甫爲百歲妥靈之所享祝永擬於春秋作多士講道之場藏修可期於千億聊陳偉唱助擧修樑兒郞偉抛樑東海上神山縹緲中何似情田求實理朝朝旭日向天紅兒郞偉抛樑西自此黌堂路不迷一鑑源頭來活水里名千古喚晨雞兒卽偉抛樑南三叉江色碧於藍游魚潑潑漂中躍其上焉飛可兩參兒卽偉抛裡北魚岳龜巖來不極吾人所欲豈徒然會待衡山金簡得兒郞偉抛機上風月雙淸無盡藏奚但取之與用之許君體認天宜仰兒郞偉抛樑下突流眼前看大廈權輿從此養賢村濟濟鹿鳴歌小雅伏願上根之後壑遁蛟龍林藏虎豹謝紅塵於朝市水益淸而山益高師黃卷之訓謨書有爲而宵有得家維戶誦之風作八孝出惰之俗成不保其往焉人盍觀感有意者若是士宜依歸
 
◆ [詩] 유거삼수(幽居三首: 깊숙이 살며 세가지 시) 
구름이 몰려드니 온 산이 허옇더니 
구름 흩어지니 온 산이 푸르구나! 
아침저녁 구름과 산속에서 
화락하게(怡然:이연) 내 마음 기르네. 
 
산 모습 예나 지금 모두 같고요 
도랑물 졸졸졸 얕고도 깊지. 
북창(北窓)에 그윽한 잠 깨고서 보니 
지저귀는 새소리 무심도 하네. 

도랑물 조수(潮水) 따라 삭망(朔望)이 있고 
달력 없이 초목(草木)으로 봄을 알겠네. 
마음 편하니 거문고도 게을러 
산 모습 좋기에 시 짓기(覓句:멱구)도 잦아라.
▶ 幽居三首 
雲來乎山白 雲去乎山靑 
朝暮雲山裏 怡然養性靈 
山色無今古 溪聲有淺深 
北窓幽夢覺 啼烏自無心 
有溪潮占朔 無曆草知春 
心適調琴懶 山奇覓句頻



참고-창녕조씨김해예암서원종문회, ≪예암서원지≫, 2007.
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