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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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남계서원(南溪書院)
   경상남도 밀양시 청도면 두곡리 366
   김지대(金之岱)
   1704년(숙종 30)
   
   3월 6일
   서원-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29호(1996.03.11지정) 영헌공실기책판(英櫶公實記冊板)-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04호(1995.05.02지정)
청도면 두곡리 쌍수당(雙修堂) 경내에 있는 서원으로 고려 중기에 평장사(平章事)를 지낸 영헌공(英憲公) 김지대(金之岱)의 충효쌍수(忠孝雙修)의 위업을 숭상하기 위해 1704년(숙종 30)에 청도고을 사림(士林)의 중론으로 창건하였다.
처음 사당의 이름을 충효사(忠孝祠)라 하였고 강당을 쌍수당이라 하였는데, 이는 김지대가 그 아버지를 대신하여 종군(從軍)하면서 지은 시(詩)에 “국환신지환친우자소우대친여보국충효가쌍수(國患臣之患 親憂子所憂 代親如報國 忠孝可雙修)”라 한데서 따온 이름이다. 1868년(고종 5)에 서원철폐령에 따라 남계서원도 훼철(毁撤)되어 폐허(廢墟)가 되었으나 그 후 자손들에 의해서 강당을 보수 또는 중창하면서 지내오다가 1907년(순종 1)에 낡은 강당을 철거하고 새로 지었으며, 1954년에도 후손들의 출연(出捐)으로 재차 강당을 철거하고 지금과 같이 쌍수당으로 확장 중건(重建) 하였다.

1)주벽-김지대(金之岱, 1200~1266)
고려 후기의 문신. 청도김씨(淸道金氏)의 시조. 초명은 중룡(仲龍). 1217년(고종 4) 3만명의 거란병(契丹兵)이 침입하였을 때, 아버지를 대신해 출전하였다.
모든 군사들이 방패머리에 기이한 짐승을 그렸으나, 그는 “나라의 어려움은 신하의 어려움이요, 어버이의 근심은 자식의 근심할 바이다. 어버이를 대신해 나라에 보답한다면 충과 효를 닦을 수 있을 것이다(國患臣之患 親憂子所憂 代親如報國 忠孝可雙修).”라는 시를 지어 붙였다.
원수 조충(趙沖)이 이를 보고 중요한 자리를 주었다. 1218년 조충이 시험관으로서 지공거(知貢擧)가 되어 그를 일등으로 발탁하고, 전주사록(全州司錄)에 임명하였다. 그는 고아와 과부 등 어려운 사람들을 보살펴 구하고, 강호(强豪)를 억제해, 이민(吏民)들에게 존경을 받았다. 그 뒤 내직으로 들어와 보문각교감(寶文閣校勘)을 맡았다.
1240년(고종 27) 전라도안찰사로 있을 때, 진도에서 최우(崔瑀)의 아들 만전(萬全)이 횡포를 부리면서 자기의 수하인 통지(通知)를 보내 자신의 요구를 주장하였다. 처음에는 응하지 않고 직접 만전을 만나 요구를 즉석에서 들어주었다.
또 다시 통지를 보내 여러 가지를 요구하자, 통지를 묶어 강물에 던져버렸다. 만전은 원망하였으나 그가 청렴하고 근엄해 감히 해치지를 못하였다. 1255년 판사재사(判司宰事)가 되어 동지공거(同知貢擧)로서 진사를 뽑았다.
1258년 몽고병이 침입하자, 여색만 탐하고 군무를 소홀히 하던 북계지병마사(北界知兵馬事) 홍희(洪熙)를 대신해 그를 첨서추밀원사(簽書樞密院事)에 승진시켜 파견하였다. 이에 서북 40여 성이 안도하였다 한다. 1260년(원종 1) 12월 정당문학이부상서(政堂文學吏部尙書)에 오르고, 1261년 5월 지추밀원사(知樞密院事)로서 지공거가 되어 과거를 주관하였다.
만년에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해 수태부중서시랑평장사(守太傅中書侍郎平章事)로 치사(致仕)하고, 오산군(鰲山君 : 鰲山은 지금의 경상북도 청도)에 봉해졌다. 그의 무덤은 청도에 있으며, 시호는 영헌(英憲)이다.

완만한 구릉지에 위치하는 이 서원은 충효사 우측에 강당이 놓인 좌묘우학(左廟右學)의 배치 형태로 제향 기능을 중시하는 조선후기의 사우형 서원에 속한다.
강당 앞 좌우에 동재(東齋)와 서재(西齋)가 마주보며 그 앞 쪽에 상덕문이 자리 잡고 있다. 강당은 정면 6칸 측면 2칸으로 가운데 2칸은 마루를 두고 좌우에 각각 온돌 방을 두고 있다. 동재와 서재는 모두 정면 3칸의 작은 건물이다. 대보문 전면에 전사청(典祀廳)이 있고 우편에 관리사가 있다.
충효사는 영헌공(英憲公) 김지대(金之岱)의 위패와 전(前) 전공판서(典工判書) 원정공(元貞公) 한귀(漢貴)와 호조판서(胡曹判書) 겸(兼) 지돈녕(知敦寧) 부사(府事) 호강공(胡剛公) 점(漸)을 배향하는 사당으로 쌍수당 우측에 위치한다. 서기 1987년에 신축한 정면 3칸 측면 2칸 규모의 이익공계 건물이며 충효사는 내삼문인 대보문을 통해 출입한다.

1)영헌공실기책판(英憲公實記冊板)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304호(1995.05.02지정)
고려 고종 때의 문신으로서, 1217년(고종 4)에 거란이 강동을 침입하였을 때 늙으신 아버지를 대신해 전쟁터에 종군하여 충효쌍수의 위업을 남긴 김지대(金之岱)의 시와 행적 등에 관한 기록을 모아 새긴 목판이다.
김지대는 당시 전주사록에 임명되어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선정을 펼쳐 사람들이 그를 존경하였다. 그 뒤 내직으로 보문각교감, 판사재사 등을 지냈고, 지공거가 되어 과거시험을 주관하기도 했다. 그가 죽은 후 나라에서 ‘영헌’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연로하신 아버지를 대신하여 전쟁터에 종군하여 충효쌍수(忠孝雙修)의 위업을 남긴 영헌공 김지대의 시와 그의 행적 등에 관한 기록을 모아 판각한 것이다.

참고-밀양문화원, ≪밀양지≫, 2006.
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