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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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완계서원(浣溪書院)
   경상남도 산청군 신등면 단계리 113
   권 도(權 濤) 권극량(權克亮)
   1614년(광해군 6)
   1788년(정조 12)
   3월 상정(上丁)
   동계선생문집책판-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33호(1983.08.06지정)
1614년(광해군 6)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권도(權濤)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788년(정조 12)에 ‘완계(浣溪)’라고 사액되었으며 그 뒤 권극량(權克亮)을 추가 배향하였다. 1871년(고종 8)에 훼철되었다. 그 후 1883년(고종 20)에 강당을 중수하였고, 1985년에 중건하였다.
‘동계선생문집책판’은 서원에 보관해 왔으나 도난 등의 문제점이 있어 5~60년 전부터 선생의 13대 종손인 권진혁(權珍赫)씨가 선생의 생가인 단계리 585번지의 별묘인 영모당에 보관해 오고 있다.

1)주벽-권도(權濤, 1575~1644)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정보(靜甫), 호는 동계(東溪). 아버지는 사포서별좌(司圃署別坐) 세춘(世春)이며, 어머니는 상산김씨(商山金氏)로 담(湛)의 딸이다. 정구(鄭逑)·장현광(張顯光)의 문인이다.
1601년(선조 34) 진사시에 합격했고, 1623년(인조 1) 승정원주서에 제수되었다. 1624년(인조 2) 이괄(李适)의 난 때 한림(翰林)으로 왕을 공주까지 호종(扈從)한 공으로 원종훈(原從勳)이 되어 성균관전적에 제수되었다. 1625년에는 홍문관부수찬에 제수되었고, 1628년 유효립(柳孝立)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영사원종공신(寧社原從功臣) 1등에 책록되었다. 1631년 원종의 추숭(追崇)을 극력 반대한 일로 남해로 유배되었다. 1640년에는 사간원대사간에 제수되었다. 죽은 뒤에 이조판서에 추증되었고, 도천서원 (道川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동계문집≫ 8권이 있다.
 
2)권극량(權克亮, 1584~1631)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사임(士任), 호는 동산(東山). 아버지는 약(瀹)이며, 어머니는 함안조씨(咸安趙氏)로 충의공(忠毅公) 종도(宗道)의 딸이다.
어려서는 체격이 크고 기상이 뛰어나 사람들로부터 크게 될 인물이라는 평을 받았다. 아버지가 일찍 죽고, 9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 가족들과 함께 약 8년 동안 회덕·성주 등지로 피난 다니다가 17세에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회덕에 있을 때 이윤우(李潤雨)에게 학문의 도리를 배웠고, 고향에 돌아와서는 다시 장현광(張顯光)을 찾아가 학문의 요체를 터득하였다. 그 뒤 별시(別試)에 나아가 초시에 1등으로 합격하였으나, 벼슬에 뜻이 없어 복시에 응시하지 않았다.
진주의 서굴촌에 조그마한 집을 지어 성인의 유상(遺像)을 모셔놓고 잠명고훈(箴銘古訓)을 독송하며 분향묵좌(焚香默坐)로 수행하여 사람들이 그를 동산처사(東山處士)라고 불렀다. 또한, 하동에 향약을 만들어 풍속교화에 힘썼다.
1627년(인조 5)에는 영릉참봉(英陵參奉)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다. 그는 시에도 능하였으며, 조위한(趙緯韓) 형제 등과 경의(經義)를 강론한 적이 있다. 두릉서원(杜陵書院)·완계서원(浣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동산선생문집≫ 3권이 있다.

경내의 건물로는 묘우(廟宇)·신문(神門)·정당(正堂)·문루(門樓)·고사(庫舍) 등이 있다.

1)동계선생문집책판(東溪先生文集冊板)
-경상남도유형문화재 제233호(1983.08.06지정)
이 책판은 조선 중기의 문신인 권도(權濤)의 시문을 모아 간행한 것이다. 권도는 39세 때 가을 증광시에 급제하여 벼슬에 나아가기 시작하였으며, 내외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이 책판은 순조 9년(1809)에 간행하였고, 전부 8권으로 되어 있으며 서문은 정종노(鄭宗魯)가 썼고, 발문은 김굉이 썼다. 권1~2에는 시, 권3에는 만(挽), 시보다 산문성이 강한 글인 부 그리고 권4에는 교서, 소, 답사, 계사, 권5에는 서, 권6에는 잡서, 잠, 책문, 표전, 전문, 권7에는 축문, 제문, 묘비에 적는 글인 묘갈, 명지, 행장, 권8에는 부록, 연보가 들어가 있다. 이 책판에는 위와 같은 다양한 글들이 실려 있어서 당시 향촌사회의 모습을 연구하는데 좋은 자료가 될 것으로 평가된다.
 
순암선생문집 제20권
 축문(祝文)
완계서원에 동계 권공을 봉안하는 글[浣溪書院東溪權公奉安文] 기유년

아, 선생은 아름다운 덕을 타고나시어 충성스럽고 효성스러우며 재주와 식견이 있었습니다. 유문(儒門)에서 수업하여 일찍부터 칭찬을 받았고 석전(石田)의 문하에 나아가 도의(道義)로써 서로 연마하였습니다. 과거에 합격하여 장차 큰 일을 할 듯하였으나 혼란한 시대를 만나 아래에 네 글자 원문 빠짐 간사한 무리들이 나라의 권력을 휘어잡아 기염을 토함에 강우(江右 경상우도)의 일대가 한결같이 붙좇아 복종하였으나 홀로 서서 두려워하지 않고 노적(老賊)이라는 말로 지목하였으니, 늠름하기가 빙상(氷霜)과 같고 우뚝하기가 지주(砥柱)와 같았는바, 이로 말미암아 충심을 다하는 사람들이 그릇된 길로 들어서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반정(反正)을 함에 이르러 조정에 들어가 주서(注書)가 되어 허물을 바로잡고 삼사(三司)를 두루 거쳤는데, 전례(典禮)에 관한 상소문은 사림들 사이에 전송되었고, 뇌물 받는 관리를 풍자한 글에는 탐욕스러운 재상이 무릎을 꿇었습니다. 은대(銀臺)가 되고 간장(諫長)이 되어 물러가는 것으로써 영광을 삼았기에 맑은 이름 곧은 절개가 북두성과 같이 우뚝하였으며, 벼슬하고 들어앉고 나아가고 물러남을 오직 의리에 따라 하였고, 종시토록 학문에 힘을 쏟으며 계술하는 데 뜻을 두었습니다. 전라 감사가 되었을 때나 바닷가에 귀양갔을 때 곳에 따라 가르침을 베풀어 선비들이 줄을 이었거니와, 더구나 이 두릉(杜陵)은 선생께서 머물러 있던 곳으로서 후학을 이끌어 인도하는 일을 게을리 아니하여 일찍이 서당을 설치하였으니, 다달이 시험보이는 법과 날로 나아가게 하는 공부는 이천(伊川)의 남긴 가르침이요 호문(湖門)의 유풍이었습니다.
유적이 남아 있는 곳에 보답하여 제사지내는 것이 예로 보아 합당한데, 도천서원(道川書院)에 배향한 지 이미 거의 120년이 되었습니다. 강성(江城)의 옛 사당에 사액(賜額)이 새롭게 걸리니 주객(主客)이 이에 나뉘어 서원을 별도로 세워야 마땅할 듯하고, 또한 조정의 명이 있어 다시 세울 것을 허락하였습니다. 완계(浣溪)의 옛 땅이 실로 여러 사람들의 뜻에 맞아 새로 우뚝한 사당을 짓고 제사를 받들게 되었습니다. 경건히 제사를 올리느라고 많은 선비들이 달려 나오니 양양(洋洋)하게 위에 계셔서 어렴풋이 맑은 향기를 접하는 것 같습니다. 우리 사문의 도(道)를 빛나게 하심은 영원히 끝이 없을 것입니다.

참고-산청군지, 2006.
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