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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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종천서원(宗川書院)
   경상남도 하동군 옥종면 안계리 651
   하홍도(河弘度)
   1677년(숙종 3)
   
   3월 상정(上丁)
   모한재(慕寒齋) -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30호(1996.03.01지정)
1677년(숙종 3)에 지방유림의 공의로 하홍도(河弘度)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하여 위패를 모셨다. 1697년에 하진(河溍), 1718년에 하연(河演)을 추가 배향하였다.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1868년(고종 5)에 훼철되었다. 이에 유림들이 하홍도의 강학장소인 모한재(慕寒齋)에다 하홍도의 위패를 옮겨놓고 1920년부터 향사를 지내왔다. 이와 함께 종천서원의 현판을 이곳으로 옮겨 사실상의 서원 역할을 하게 되었다.
모한재(慕寒齋)는 본래 하홍도(河弘度)가 1635년(인조 13)에 창건한 것이다. 하홍도는 벼슬을 단념하고 재야에서 학덕을 닦고 실천했던 당대 대표적인 성리학자의 한 사람이었으며 특히 예학에 밝았던 인물이다. 이 재사는 그가 학문을 닦고 후학들을 가르치던 곳이며 미수 허목 등을 비롯한 당대의 명유들과 교류하던 곳이기도 했다.
모한재(慕寒齋)의 사당에는 겸재 하홍도의 위패를 모시고 있으며 매년 음력 3월 10일에 제사를 받들고 있다. 선생의 위패는 원래 종천서원에서 모시고 있었으나 서원이 철폐되면서 옮겨왔으며 종천서원의 현판 등이 보관되어 있다.

1)주벽-하홍도(河弘度, 1593~1666)
조선 중기의 학자. 본관은 진주(晉州). 자는 중원(重遠), 호는 겸재(謙齋). 아버지는 광국(光國)이며, 어머니는 강양이씨(江陽李氏)로 광우(光友)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고현(古賢)과 같이 되겠다는 큰 뜻을 가지고 벽에 겸괘(謙卦)의 단상도(彖象圖)를 그려놓고 스스로 ‘겸재’라 하였다. 몸과 집을 엄정하게 다스려 촌부(村婦)들의 경박한 행동이 있으면 노복을 시켜 한 우물을 먹지 못하게 하였고, 이웃사람 중에 강상(綱常)의 죄를 범한 자가 있으면 그곳을 지날 때 얼굴을 가리고 다녔다. 처음 성균관의 유생이 되어 동료들의 존경을 받았으나, 광해군의 실정을 개탄하여 벼슬길을 단념하고 고향에 돌아와 오로지 경사(經史) 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썼다. 1623년(인조 1) 인조반정 후 유일(遺逸)로 여러 차례 불렸으나 사양하고 암천(巖泉)의 산재(山齋)에 살며 학문에만 힘썼다.
1662년(현종 3) 어사 남구만(南九萬)이 안계(安溪)로 그를 방문하여 앞서 조정에서 있었던 예론(禮論)을 토의한 뒤, 그 해박한 지식에 감탄하여 현종에게 아뢰어 후한 상을 하사하였으나, 소를 올려 사양하고 끝내 받지 않았다. 또한, 천문학에도 조예가 깊어 일월성신(日月星辰)의 도수를 추정하여 시행되는 역법(曆法)을 시정하기도 하였다. 저서로는 ≪겸재집≫이 있다.

현재 경내에는 모한재, 경승루, 사우, 관리사, 내삼문, 외삼문 등이 배치되어 있으며 모한재는 정면 5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 건물이다.

1)모한재(慕寒齋)-경상남도문화재자료 제230호(1996.03.11지정)
모한재는 겸재 하홍도(謙齋 河弘度)가 도학을 연구하고 학문을 강의하던 곳으로 당대의 현인인 미수 허목, 약천 남구만 등이 지내기도 한 곳이다. 여기에는 미수 선생의 친필을 보관하고 있으며 해마다 음력 3월 10일에는 영남 사람들이 선생의 위패를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
 
2)미수선생이 친필로 쓴 모한재의 현판과 기문이 남아있다.
 
참고-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