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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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청계서원(淸溪書院)
   경상남도 함안군 칠서면 천계리 791
   이삼로(李三老) 이시분(李時馩)
   1670년(현종 11)
   
   3월 10일
   
청계서원은 이삼로(李三老), 이시분(李時馩) 두 사람의 충정과 행적을 추모하기 위하여 1670년(현종 11)에 창건된 서원이다. 그러나 대원군의 서원훼철령에 의해 1868년(고종 5)훼철되었다. 그 후 1981년에 다시 건립하여 3월 10일에 향례를 행하고 있다.

1)주벽-이삼로(李三老, 1560~1645)
조선 중기의 의병장. 본관은 장수(長水). 자는 중유(仲儒), 호는 고산(孤山). 단성 출생. 아버지는 명충(命忠)이며, 어머니는 진주하씨(晉州河氏)로 여정(汝禎)의 딸이다.
어려서부터 체구가 크고 힘이 세어 장재로 지목되었고,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의 병에 한달이 넘게 기도하여 병이 나았다고 한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가동(家僮) 100여명으로 의병을 일으켜 정진(鼎津)에 주둔한 곽재우(郭再祐)의 의군에 합류하여 1594년 가력(嘉力)에서, 1597년 화왕산성(火旺山城)의 전투에서 공을 세웠다. 전쟁이 끝나자 군을 해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갔다.
1602년 고산정사(孤山精舍)를 지어 후진을 교육하고, 이듬해 강설하는 규정을 만들어 학교의 제도를 확립하였다. 1621년(광해군 13) 임진왜란 때의 전공이 인정되어 훈련부정에 임명되었으나 세상이 시끄러워 부임하지 않았다. 1641년 수직(壽職)으로 승정원좌승지에 올랐다. 뒤에 예안의 청계서원(淸溪書院)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고산실기≫ 3권이 있다.
 
2)이시분(李時馩, 1588~1663)
1640년 당시 단성현에 살던 한 선비가 자신이 살고 있던 고장의 자연, 인물, 호구, 풍속 등을 상세히 조사해 한 권의 책으로 엮었다. ‘丹邱誌(단구지)’ 또는 ‘丹城誌(단성지)’ 라고 불리는 이 책을 세상 사람들은 ‘운창지’ 라고도 부른다.
책을 엮은 선비가 바로 운창 이시분이기 때문이다. 운창은 마을의 역사를 일목요연하게 정리해 후세 사람들에게 경계를 삼고자 했다. 즉 고을의 충신 열부 효자 학자 등의 행적 등을 정리해 후세 사람들이 본받도록 하기 위해서 ‘단성지’ 를 편찬한 것이다. 지금도 학계에서 이 책은 단성의 역사를 말해주는 중요한 학술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그는 1588년 단성현 어은동(漁隱洞)에서 태어났다. 장수(長水) 이씨로 선대는 용인 필동에 살았는데, 운창의 증조부때 단성으로 이주를 해 왔다. 운창이 태어난 어은동은 현재 생비량면 도전리 어은마을로 현재 운창의 흔적을 찾을 수 있는 것은‘도전제방’뿐이다.
‘도전제방’은 운창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도전 뜰이 너무 메말라 농사를 지을 수 없자, 당시 27세인 운창이 거금을 들여 제방을 쌓은 것이다. 이때 마을 사람들이 운창의 공을 기려 공덕비를 세우기도 했다. 이 도전 제방은 지금도 옛날 그 위치에 그대로 있으며, 운창에 관한 전설이 전해온다. 당시 어은동 사람들이 마을에 논을 만들고자 앞강을 막아 보를 만들었다. 그러나 그 보가 번번이 홍수에 휩쓸려가곤 했다. 어느날 밤 이 마을에 살던 운창이 꿈을 꾸니 백발노인이 나타나서 “나는 이곳의 텃신인데 너희들의 숙원이 이루어지도록 가르쳐 줄 것이다.”고 하면서 사라졌다. 운창이 새벽에 일어나 꿈속 노인이 말한 곳을 가보니 하얀 서리가 줄을 친 듯 내려있었다. 마을 사람들이 그곳에 보를 세우려고 노력을 했으나, 워낙 급류라서 인력으로 하기 힘들었다. 그러던 중 어느 날 밤 도깨비들이 몰려와서 메밀죽을 원하므로 마을 사람들이 힘을 모아 대접했더니 도깨비들이 큰 바윗돌을 굴러다가 기틀을 놓고 해서 보를 완성시켰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그 보를 ‘도깨비 보’라고 불렀다고 한다.
운창은 어려서 중부(仲父)인 고산(孤山) 삼로(三老)에게 공부를 배웠다. 중부 고산공은 일찍이 퇴계선생의 ‘성학십도’와 남명선생의 ‘신명사도’를 구해 공부방에 걸어놓고 학문에 정진한 선비이다. 운창은 어려서 퇴계와 남명의 학문을 중부로부터 전수받았다고 할 수 있다. 중부는 운창을 가르칠 때 “학문은 모름지기 단계를 밟아 앞으로 나가야지, 한꺼번에 다 습득하려고 해서는 안된다”라고 가르쳤다.
19세 때 향시에 급제하고, 20세에 문과에 응시했으나 급제하지 못하고 돌아왔다. 이로부터 운창은 과거에 뜻을 두지 않고 오로지 선현들의 학문에만 심혈을 기울이기로 마음을 먹었다. 운창이 과거를 포기한 해에 덕천서원에 들른 한강 정구를 만나 예를 올렸다. 23세때 운창은 지경재(持敬齋)로 한강을 찾아가 정식으로 제자의 예를 올렸다.
26세 때 운창정사를 완성했다. 무민당 박인은 “구름이 비를 내리게 하여 만물을 소생시키듯이, 운창의 인품이 돈후하여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을 입힌다.”는 점을 들어 운창정사의 완공을 기렸다. 운창은 과거를 포기하고 운창정사에서 학문에 정진하면서, 남명의 학문을 사숙한 선비들인 겸재 하홍도, 태계 하진 등과 덕천서원 등지에서 교유하면서 학문을 토론했다. 47세때 남명선생의 ‘학기유편’ 편찬의 일에 관여하게 되는데, 당시 옥종에 살던 겸재 하홍도가 찾아와 학기유편의 일을 운창에게 상의해서 그렇게 된 것이다.
50대의 나이에 접어들어서는 당시 명유인 미수 허목 등과도 교유를 했으며, 학덕이 조정에 까지 알려져 단성현감을 제수하려고 했다. 하지만 초야의 선비에게 바로 6품직을 제수한다는 것은 불가하다는 말이 있어 벼슬이 내리지는 않았다. 53세 때는 ‘단구지’를 완성했으며, 55세때는 당시 진주목사인 한사 강대수가 운창을 방문하기도 했다. 61세 때는 중부의 정사인 고산정사(孤山精舍)에서 찾아오는 벗들을 맞이하며 한편으로는 제자들을 가르치면서 노년을 보냈다. 그리고 76세 되던 해 어은정사에서 병이 들어, 그해 9월 세상을 떠나고 만다.
운창의 후손인 이창동씨(사천 송포동)는 “운창 선조는 남명학파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분입니다. 학포 정훤, 상암 권준, 무민당 박인 등 이름난 선비들의 묘문을 다 지으신 분입니다. 그런데 지금 남명학맥에서 잊혀져 가는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라며 운창이 남명학파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강조한다.
운창은 평생 고향 단성에 살면서 남명의 사숙인들과 교유하며, 뛰어난 문장으로 이름을 떨쳤다. 하지만 그의 많은 문장들 중 지금 전하는 것은 얼마 되지 않는다. 아마 전란으로 많은 부분이 소실되었을 것이다.
운창이 세상을 떠난 후인 철종 원년(1850년) 함안 칠원에 청계서원을 세우고 그 학덕을 기렸다. 평생 단성에서 태어나고 세상을 떠난 운창이지만, 후손들이 칠서에 터전을 잡아 그곳에 서원을 건립했다고 한다.
운창문집(雲牕文集)

3권, 부록 2권, 합 5권 2책. 목활자본. 1856년(철종 7) 후손 상석(祥錫)·영주(永柱) 등이 사림(士林)과 함께 그가 제향된 청계서원(淸溪書院)에서 간행하였다. 권두에 유필영(柳必永)의 서문이, 권말에 이훈호(李熏浩)의 발문이 있다. 규장각 도서에 있다.
권1에 부(賦) 1편, 시 27수, 서(書) 2편, 권2에 잡저인 단성지(丹城誌), 권3에 발(跋) 2편, 전(傳) 2편, 제문 2편, 봉안문 1편, 유사 5편, 지갈(誌碣) 3편, 부록 권1에 연보, 권2에 제현증시(諸賢贈詩) 2수, 제현서독(諸賢書牘) 4편, 서(序) 1편, 기(記) 1편, 만시 5수, 행장·가장·묘갈명·묘표·청계서원상량문·봉안문·상향문(常享文) 각 1편이 수록되어 있다.
「영남부(嶺南賦)」는 앞뒤에 결문(缺文)이 있는데, 노흠(盧欽)·조종도(趙宗道) 등의 인물을 읊은 것이다. 시는 친구 박인(朴絪)·하홍도(河弘度) 등에게 준 교유시와 만시가 많다. 잡저인 「단성지」는 10편으로 되어 있는데, 단양 팔리(八里)의 산천·인물·풍속·토산·호구·군액(軍額) 등을 고증하여 자세하게 기록한 인문지리서 성격의 저술이다.
이 「단성지」의 인물 전설은 「단성군우공전(丹城君禹貢傳)」·「절부이씨전(節婦李氏傳)」과 함께 단양의 역사와 문화의 이해에 도움이 되는 자료이다.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의 목조와가 팔작지붕이다.

참고-창원대학교 경남학연구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