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허조(許稠, 1369~1439)
고려 말 조선 초의 문신. 본관은 하양(河陽). 자는 중통(仲通), 호는 경암(敬菴). 판전객시사 수(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관정랑(都官正郞) 윤창(允昌)이고, 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 귀룡(貴龍)이며, 어머니는 통례문부사 이길(李吉)의 딸이다. 권근(權近)의 문인이다. 1385년(우왕 11) 진사시, 1387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390년(공양왕 2) 식년문과 2등에 급제해 전의시승(典儀侍丞)이 되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좌보궐(左補闕) ‧ 봉상시승(奉常寺丞)으로서 지제교를 겸해 예악제도(禮樂制度)를 바로잡는데 힘썼다.1397년 성균관 전적이 되어 석전(釋奠)의 의식을 개정했으며, 1399년(정종 1) 좌보궐로서 지제교를 겸하였다. 태종이 즉위하자 사헌부잡단(司憲府雜端)으로 발탁되었으나, 강직한 발언으로 왕의 뜻을 거슬러 완산판관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강직한 성품이 다시 인정받아 1402년(태종 2) 이조정랑, 1404년 호군 ․ 집현적직제학으로서 세자시강원좌문학이 되었다. 1406년 경승부소윤(敬承府少尹), 이듬해 예문관직제학으로서 세자시강원문학을 겸임하였다.세자가 명나라에 들어가게되자 집의에 올라 서장관으로 수행하였다. 이 때 명나라의 여러 제도를 자세히 조사하였다. 그리고 귀국 중에 들렀덤 궐리(闕里)의 공자묘(孔子廟)를 본떠 조선의 문묘에서 허형(許衡)을 제향하고 양웅(揚雄)을 몰아내었다.1409년 판사섬시사(判司贍寺事)로 세자시강원우보덕을 겸했으나. 조대림사건(趙大臨事件)에 연루되어 춘주(春州)로 귀양갔다. 그러나 곧 경승부윤으로 복직했으며, 1411년 예조참의가 되어 의례상정소제조를 겸임하였다. 이때 사부학당(四部學堂)을 신설하고 왕실의 각종 의식과 일반의 상제(喪制)를 찬정하였다.태종조의 이루어진 많은 예약제도는 거의 그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다시피하였다. 뒤에 이조 ․ 병조의 참의를 거쳐 평안도순찰사가 되었는데, 도내의 민폐를 자세히 조사 ․ 보고 하면서 조세감면과 왕의 수렵 자제를 극간하기도 하였다.1415년 한성부윤 ․ 예문관제학, 1416년 예조참판 ․ 제조, 1418년개성유후사유후 ․ 경기도관찰사사를 역임하였다. 세종 즉위 후에는 공안부윤(恭安府尹) ․ 예조판사로서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을 제의해 시행케하였다. 이때부터 과거 시관이 되어 많은 인재를 발탁하였다.1422년(세종 4) 이조판서가 되자 부민고소금지법과 구임법(久任法)을 제정해 전곡을 다루는 경관(京官)은 3년, 수령은 6년 임기를 채우도록 정하였다. 그리고 죄인의 자식이라도 직접 지은 죄가 없으면 처벌하지 않도록 하는 연좌법을 적용하지 않게 하는 법제를 만들었다. 또한 이듬해 세종 5년에 《속육전 續六典》의 편수의 명을 받고 이 법은 국맥(國脈)을 배양하는 근본으로 너무 각박하게 해서는 안된다고 하고 속육전 6책과 등록 1책을 최초의 법전으로 수찬하였다.1426년 참찬 ․ 빈객이 되었다가 이조판서에 재임했는데, 이때 대간들의 간언을 두호(斗護 : 남을 두둔해 돌봐줌.)해 언로를 넓힐 것을 주장하였다. 1428년 판중군도총제부사가 되어서는 동북방의 적을 막기 위해 평안도에 성곽을 쌓고 전선(戰船)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1430년 찬성에 승진되면서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절찬하고 1432년 다시금 이조판서에 올라 관리 임명에 공정을 기하는 한편, 효자순손(孝子順孫)과 충현(忠賢)들의 자손을 발탁해 예교(禮敎)를 장려하는데 힘썼다. 이듬해 세종이 파저강야인(婆渚江野人) 이만주(李滿住) 등을 치려고 하였을 때는 후환이 있을 수 있다면서 극력 반대하였다.1435년 지성균관사가 되고, 이듬해에는 예조판서를 겸임하였다. 과거시험에서 사장(詞章)보다는 강경(講經)을 중시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초장강경(初場講經)을 주장했으나, 이를 성사시키지는 못하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사장 중시의 경향이 강했던 때문이다.1438년에는 세종을 도와 신숙주(申叔舟) 등 진사 100인과 하위지(河緯地) 등 문신급제자 33인을 뽑았고, 같은 해 우의정 영집현전춘추관사 세자부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궤장(几杖)이 하사되고 좌의정 영춘추관사 세자부에 승진되고 세종21년(1439) 서거하였다.《소학》․ 《중용》을 즐겨 읽었고 효행이 지극했으며,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특히, 유교적 윤리관을 보급해야 하는 조선 초기에 태종 ․ 세종을 도와 예약제도를 정비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시호는 문경(文敬)이다.
성현의 가르침을 지킨 허조(許稠)
문경공 허조(許稠)는 성품이 간결하고 엄정하며 청렴하고 청아하여 모든 일을 성현(聖賢)의 가르침에 따랐다. 그리하여 날마다 새벽에 닭이 울면 일어나 세수하고 머리를 빗고 관을 쓰고 띠를 매고 단정히 앉아서 비록 하루 종일 있어도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항상 나라의 일만 걱정하고 개인의 일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리하여 조정에서 나라의 일을 의논할 때는 자신 있게 주장해도 다른 사람의 일에는 간섭하지 않아 모두 ‘어진 재상’이라 하였다. 가법(家法)도 엄격하여 아우나 아들의 잘못이 있으면 반드시 그 사실을 사당에 고하고 벌을 주었으며, 종들이 죄를 지으면 원칙을 세워서 공정하게 다스렸다.
허조는 어려서부터 몸이 야위고 어깨와 등이 굽었다. 그가 예조판서로 있을 때 관원들의 복색을 품계에 따라 구별하는 법으로 정하였는데 경박한 사람들이 허조를 미워하여 ‘수응재상(瘦鷹宰相)’이라 불렀다. 그 말은 ‘마른 매’라는 뜻인데, 대개 매는 살찌면 날아다니지만 마르면 새를 잡을 생각만 하기 때문이다. <필원잡기(筆苑雜記)>
매사를 꼼꼼하게 처리하는 허조
허조(許稠)가 세종 때 이조판서를 지냈는데 그때 신상(申商)은 예조판서로 있었다. 허조는 새벽에 조정에 나와서 해가 저물어야 집으로 돌아가는데 신상은 점심 때 나왔다가 해가 지기 전에 일찍 집으로 돌아갔다. 어느 날 허조가 신상을 찾으니 점심 때 왔다가 바로 나갔다고 하자 사람을 신상의 집에 보내어 이르기를,
“어찌하여 늦게 벼슬한 사람이 일찍 집으로 가는가?”
하니 신상이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허판서는 일찍 벼슬해서 무슨 이득을 보았는지 몰라도, 나는 늦게 벼슬했어도 손해 본 것이 없소이다. 각기 제가 맡은 일만 잘합시다.”
하였다. 허조는 모든 일을 정성을 들여 꼼꼼히 하고 신상은 쉽게 일을 잘 처리하여 서로 성질이 달랐다. <청파극담(靑坡劇談)>
어쩌다 농담하고 웃은 허조
명나라 태조가 처음 천하를 평정하고 우리나라로 귀양을 보낸 명왕 옥진(玉珍)의 손자인 명의(明義)가 의정부에서 녹사로 있었는데 사람됨이 옹졸하고 모자랐다. 하루는 문경공 허조(許稠)가 명의를 자세히 보더니
“만약 명왕 옥진이 중국의 황제가 되었다면, 저 사람은 그 나라를 잃어버릴 것이 분명하다.”
라 하였다. 평생 농담을 하지 않던 허조가 처음으로 농담을 하고 웃는 것을 본 관원들이 그 말보다 농담하는 허조를 보고 모두 웃었다. <태평한화 골계전(太平閑話 滑稽傳)>
사람의 정욕을 이해한 허조(許稠)
문경공 허조는 마음이 맑고 고우나 집안을 다스리는 데는 매우 엄격하고 법도가 있었다. 그리하여 아들에게 모든 일을 반드시 소학의 예법을 따르도록 하고 비록 대수롭지 않고 자질구레한 일에도 항상 삼가고 조심하도록 가르쳤다. 그런 까닭으로 친구들이 농담으로 허조에게,
“자네는 평생 남녀 간의 정욕이 무엇인지 모르고 살았을 것이 분명하다.”
하니 웃으면서 대답하기를,
“내가 그것을 몰랐다면, 내 아들 허후(許詡)와 허눌(許訥)이 어떻게 태어났겠나?”
하였다. 그 뒤 조정에서 지방관아에 있는 기생을 없애자는 의견이 나왔을 때 “옳다”는 의견과 “안 된다”는 의견이 나와 임금이
“대신들의 의견을 물어보라.”
고 명하니 사람들이 물어보나마나 허조는 평소 엄격한 성품이라 “옳다”고 할 것이라고 믿었다. 그런데 허조는 뜻밖에도,
“누가 바보같이 그런 의견을 내놓았소? 남녀 간의 정욕이란 인간의 본능으로 금할 수 없는 것인데 그것을 법으로 금한다는 것은 말이 아니오. 관아의 기생들은 나라에 속한 것이므로 관원이 끼고 자도 문제가 안 생기지만, 만일 기생을 없애면 조정에서 지방으로 출장 가는 젊은 관원들은 욕정을 참지 못하여 여염집 여자를 넘보면 큰 문제가 생기고, 재주 있고 장래가 촉망되는 젊은 선비가 죄를 받게 될 것이 뻔하오. 그런 이유로 난 반대하오.”
하니 반대하던 사람들도 허조의 의견에 찬동하여 실시하지 않게 되었다.
<용재총화(慵齋叢話)>
2) 허 후(許 詡)
?∼1453(단종 1). 본관은 하양(河陽), 영의정 허조(許稠)의 아들로서 조선 전기의 문신이다.
세종 8년(1426)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였으며 직제학(直提學)을 지내고 1436년에 문과중시(文科重試)에 급제하여 승지(承旨)를 거쳐 1442년 2월 1일에 한성부 윤(漢城府尹)이 되었다. 이어 예조 참판, 경기도 관찰사를 거쳐 1445년에 대사헌, 형조 참판을 지내고 1448년에 예조 판서를 역임했다. 문종 1년(1451)에 형조 판서에 올랐고 1452년에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 《세종실록(世宗實錄)》 편찬에 참여했다. 단종 1년(1453)에 좌찬성(左贊成)이 되어 황보인(皇甫仁) · 김종서(金宗瑞) 등과 단종을 보필했으나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일어난 후 김종서 · 황보인 등의 효수에 반대하며 그들의 무죄를 주장하다가 거제도에 유배되고 교살당했다. 실록청(實錄廳)의 감수관(監修官)을 지냈으나 《세종실록》 권말부록의 편찬자 명단에는 삭제되었다. 영조 때 신원(伸老)되고 시호는 충간(忠簡)이다.
【참고문헌】 世宗實錄, 文宗實錄, 端宗實錄, 國朝人物考
3) 허조(許慥) (1430~1456)
호(湖)는 응천(凝川) 본관(本貫)은 하양(河陽)으로 좌참찬(左參贊) 허눌(許訥)의 아들이며 사육신(死六臣)의 한 사람인 충간공(忠簡公) 이개(李개)의 매부(妹夫)이다. 일찍이 문과(文科)에 등제(登第)하고 수찬(修撰)에 제수(除授)되었다.
아버지 허눌(許訥)이 사사(賜死)되고 1453年(세조2)에 성삼문(成三問), 박팽년(朴彭年) 등이 단종(端宗)의 복위(復位)를 모의(謀議)할때 이에 가담하여 함께 거사(擧事)하려 하였는데 배반자(背反者)의 고변(告變)으로 인하여 사전에 동지(同志)들이 체포(逮捕)됨을 듣고 조복(朝服)을 입은후 사묘에서 대곡(大哭)하고 자진하여 죽었다. 금부(禁府)에서 체포(逮捕)하러 몰려왔다가 그 시신(屍身)과 허연령(許延齡), 허구령(許九齡)의 두 아들과 함께 처형(處刑)되었다.
1790年(정조14) 종손(宗孫) 허묵(許默)이 신면을 탄원(歎願)하여 특히 복위되고 부제학(副提學)에 증직(贈職)하였으며 1792年에 아버지 정간공(貞簡公)과 함께 정문(旌門)을 명(命)하고 괴산화암(槐山花岩) 서원(書院)에 추향(追享)되었다.
괴산군지(槐山郡誌) 인물(人物)
단종때에 자결하였다.
전 집현전 부수찬(集賢殿副修撰) 허조(許慥)가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허조는 이개(李塏)의 매부로 역시 모반에 참여하였기 때문이었다. 6월 6일
박팽년(朴彭年)이 이미 공초(供招)에 자복하여 옥중에서 죽으니, 의금부(義禁府)에서 아뢰기를,
“박팽년·유성원(柳誠源)·허조(許慥) 등이 지난해 겨울부터 성삼문(成三問)·이개(李塏)·하위지(河緯地)·성승(成勝)·유응부(兪應孚)·권자신(權自愼)과 함께 당파를 맺어 반역을 도모하였으니, 그 죄가 능지 처사(凌遲處死)에 해당합니다.
청컨대 허조·박팽년·유성원의 시체를 거열(車裂) 하고, 목을 베어 효수(梟首)하고, 시체를 팔도에 전(傳)하여 보일 것이며, 그 재산을 몰수하고, 연좌된 자들도 아울러 율문에 의하여 시행하소서 .6월 7일 세조실록 14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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