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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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용계서원(龍溪書院)
   경상북도 경산시 자인면 원당리
   최문병(崔文炳)
   1700년(숙종 26)
   
   3월 중정(中丁)
   
1712년(숙종 38)에 지방 유림의 공의로 최문병(崔文炳; 1557 ~1599)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의사(倡議祠)로 창건되었다. 1786년(정조 10년) 3월 12일 조정의 명령에 따라 용계서원(龍溪書院)이라 이름하였다. 이보다 먼저, 즉 1712년(숙종 38년)에 충현사(忠賢祠)를 지어 의병장 성재(省齋) 최문병(崔文炳)선생을 모셨다. 그 후 1868년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에 따라 훼손되고 위패는 사당 터에 묻었다고 한다.
서원복원을 위해 그의 후손인 최기열과 문중의 후예들이 적극 활동하여 드디어 문화공보부로부터 국고지원으로 사당인 충현사를 복원하였다. 그리하여 선생의 위패를 다시 모시고 매년 향사를 받들고 그의 학덕과 충효정신을 본받고 있다.

1)최문병(崔文炳, 1557~1599)
성재(省齋) 최문병(崔文炳)선생은 1557년(명종 12년) 4월 20일에 옛 자인현 울곡리(지금의 자인면 울옥리)선비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본은 영천이며 성재(省齋)는 그의 아호이다. 일찍이 외숙인 계동(溪東) 전경창(全慶昌: 퇴계의 제자)에게서 학문과 대의를 배우면서도 오직 경학(經學)에만 전념하여 벼슬에는 뜻이 없는 순수한 유학자였다. 1592년(선조 25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신하된 도리로 죽음을 각오하고 여러 고을의 장정들과 의병을 규합하여 의병장으로 추대되어 왜적과 싸우기로 결심하였다. 파죽지세로 진격해오는 왜구에게 관군이 패주하니, 최문병 의병장은 왜구가 침범해오는 요소 요소에 의병을 매복시켜 일격에 무찌르고 적으로 하여금 감히 자인현의 경계를 침범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런 뒤에 청도의 의병장 박경전(朴慶傳)과 합세하여 두곡에서 왜적 수 백명을 죽이고 선암(청도 금천)에 있는 적을 막았다. 

갈지고개(葛旨峴)에서는 적의 식량과 병기를 약취하여 그들의 활동을 제약했다. 왜적이 영천에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최문병은 영천의 의병장 권응수(權應銖)와 합세하여 군위 하양 등지의 적을 격파하고 군사를 3부로 나누어 영천성(永川城)에 다다르니 우장(右蔣)인 정대임(鄭大任: 영천인)과 더불어 좌장(左蔣)으로서 말을 달리어 방어하는 적 10여명의 목을 베었다. 따르던 장병이 비로소 용기를 얻어 질풍같이 진군하니 적이 일제히 달아났다. 이에 바람을 따라 불을 질러서 적을 모조리 태워 죽였다. 이와 같이 자인 고을뿐 아니라 인접한 청도, 군위, 하양, 서악(西岳)의 적을 대파하니 인접 지역 백성들의 성재(省齋)선생에 대한 신망과 칭송이 잦았다고 했다. 

성재(省齋)선생은 난중(亂中)에 조정으로부터 조산대부(朝散大夫), 장기현감, 별제어모장군(別提禦侮將軍), 훈련첨정감목관(訓練僉正監牧官)의 벼슬을 받았으나, 모두 사양하여 취임하지 않았다. 그 후 전란이 끝나던 해에 집으로 돌아와 집안 일을 돌보던 중 선조 32년(1599)에 향년 43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묘소는 용성면 용전리에 있다. 선생은 타고난 어진 성품과 닦은 학문으로 충과 효를 갖추었을 뿐 만 아니라, 재난에 대비하여 병기를 미리 준비하였으며, 적을 대하는 용기와 지략은 다른 장수들의 본보기가 되었는데, 선생은 언제나 스스로를 낮추고 공적은 다른 사람에게로 돌렸던 것이다. 

선생이 세상을 떠난 뒤 조정에서 가선대부한성부우윤(嘉善大夫漢城府右尹)을 증직하였고, 향인은 자인 원당리 뒷산에 충현사(忠賢祠)를 세워 우국충정의 정기를 기리어 향사를 받들어 왔다. 전술한 바와같이 1786년(정조 10년)에는 용계서원(龍溪書院)으로 승격하여 선생의 유업을 선양하였다. 그후 후손들이 유물관을 새로 지어 유품을 보관하고 있다. 보물 745호인 전시(戰時)에 사용하던 말안장 1좌, 궁구(弓具) 2점, 책상 1개, 책장 1개, 병풍서 8매, 하사받은 벼루 1좌, 서화(書畵) 20매, 그리고 교지(敎旨) 5매, 성재선생실기 문집목판 60매 등이다. 입으로 붓글씨를 쓴 구도서(口倒書)와 병풍글씨 8매는 선생의 증손(曾孫) 최영기(崔永基)가 선생 친필임을 병풍 끝 부분에 서명해 놓았다. 그리고 선생이 학문을 닦던 인지재(仁智齋)는 그후 서당으로도 쓰였으며 용계서원과는 좀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경내의 건물로는 3칸의 묘우(廟宇), 신문(神門), 6칸의 강당, 1칸의 전사청(典祀廳), 각 3칸의 동재(東齋)와 서재(西齋), 정문(正門), 고직사 등이 있다.
사당인 충현사(忠賢祠)에는 최문병의 위패가 봉안되어 있다. 강당은 경재당(敬齋堂)이라 현액되어 있으며, 동편의 협실은 헌관실로 사용되고 마루는 원내의 여러 행사와 유림의 회합 등의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동재는 재석 및 유사실로, 서재는 제원 및 유생들이 기거하면서 공부하는 장소로, 전사청은 향례 때에 제수를 장만하여 보관하는 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강당과 사당 사이에 유물관을 배치하였다. 서원의 입구를 강당의 측면으로 내었다.

유물관을 새로 지어 유품을 보관하고 있다. 보물 745호인 전시(戰時)에 사용하던 말안장 1좌, 궁구(弓具) 2점, 책상 1개, 책장 1개, 병풍서 8매, 하사받은 벼루 1좌, 서화(書畵) 20매, 그리고 교지(敎旨) 5매, 성재선생실기 문집목판 60매 등이다. 입으로 붓글씨를 쓴 구도서(口倒書)와 병풍글씨 8매는 선생의 증손(曾孫) 최영기(崔永基)가 선생 친필임을 병풍 끝 부분에 서명해 놓았다.

참고-한국국학진흥원 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