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원연합회

  1. 홈
  2. 로그인
  3. 회원가입

율곡리더십아카데미 - 옛 성현의 얼과 지혜가 살아 숨쉬는 곳!


우저서원(牛渚書院)
   http://www.nrich.go.kr/kr/mmulti/mContentV.jsp?ca_id=4&arc_id=446&arc_… [1430]
   경기도 김포시 감정동 492
   조 헌(趙 憲)
   1648년(인조 26)
   1675년(숙종 1)
   음력 2월 중정일, 음력 8월 18일
   경기도유형문화재 제10호(1972.05.04지정) 조헌선생유허추모비(趙憲先生遺墟追慕碑) -경기도유형문화재 제90호(1979.09.03지정)
우저서원은 선조 때 문신·학자이자 의병장인 조헌(趙憲)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여 창건되었다. 본 서원은 조헌이 살던 옛 집터에 세워졌다. 1648년(인조 26)에 창건된 후 1669년(현종 10)에 김포 유생 이만춘(李萬春)등이 상소하여 사액을 청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하다가 1675년(숙종 1)에 송준길(宋浚吉)의 청으로 사액되었다. 1834년(순조 34)에 중건되었고,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도 훼철되지 않고 존속하였다. 1973년부터 3년간에 걸쳐 전면 보수가 이루어졌다. 서원에서는 음력 2월 중정일과 조헌의 기일인 음력 8월 18일에 향사를 지내고 있다.
 

1)주벽-조헌(趙憲, 1544∼1592)
조선 중기의 문신·유학자·의병장. 본관은 배천(白川). 자는 여식(汝式), 호는 중봉(重峯)·도원(陶原)·후율(後栗). 경기도 김포 출생. 황(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세우(世佑)이고, 아버지는 응지(應祉)이다. 어머니는 차순달(車順達)의 딸이다. 이이(李珥)·성혼(成渾)의 문인이다.
1555년(명종 10) 12세 때 김황(金滉)에게 시서(詩書)를 배웠는데, 집이 몹시 가난해서 추운 겨울에 옷과 신발이 다 해어졌어도 눈바람을 무릅쓰고 멀리 떨어진 글방 가는 것을 하루도 쉬지 않았으며, 밭에 나가 농사일을 도울 때나 땔감을 베어 부모의 방에 불을 땔 때에도 책을 손에서 떼지 않았다고 한다.
1565년 성균관에 입학했으며, 1567년 식년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1568년(선조 1) 처음으로 관직에 올라 정주목·파주목·홍주목의 교수를 역임하면서 사풍(士風)을 바로잡았다.
1572년부터 교서관의 정자·저작·박사를 지내면서, 궁중의 불사봉향(佛寺封香)에 반대하는 소(疏)를 올려 국왕을 진노하게 하였다. 성절사(聖節使) 박희립(朴希立)의 질정관(質正官)으로 명나라에 다녀와 <동환봉사 東還封事>를 지어 올렸다.
1575년부터 호조좌랑·예조좌랑·성균관전적·사헌부감찰을 거쳐, 경기도 통진현감으로 있을 때, 내노(內奴)의 횡행죄를 엄히 다스리다가 죽인 죄로 탄핵을 받아 부평으로 귀양갔다가 3년 만에 풀려났으며, 다시 공조좌랑·전라도도사·종묘서영(宗廟署令)을 역임하였다.
1582년 계모를 편히 모시기 위하여 보은현감을 자청하여 나갔는데, 그 치적이 충청좌도에서 으뜸으로 손꼽히었다. 그러나 대간의 모함에 따른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가, 다시 공주목제독(公州牧提督)을 지냈다.
1587년 동인 정여립(鄭汝立)의 흉패함을 논박하는 만언소(萬言疏)를 지어 현도상소(縣道上疏)하는 등 5차에 걸쳐 상소문을 올렸으나 모두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다시 일본사신을 배척하는 소와 이산해(李山海)가 나라를 그르침을 논박하는 소를 대궐문 앞에 나아가 올려 국왕의 진노를 샀다.
관직에서 물러난 뒤 옥천군 안읍밤티(安邑栗峙)로 들어가 후율정사(後栗精舍)라는 서실을 짓고 제자 양성과 학문을 닦는 데 전념하였다. 1589년 지부상소(持斧上疏)로 시폐(時弊)를 극론하다가 길주 영동역(嶺東驛)에 유배되었으나, 이 해 정여립의 모반 사건으로 동인이 실각하자 풀려났다.
1591년 일본의 도요토미(豊臣秀吉)가 겐소(玄蘇) 등을 사신으로 보내어 명나라를 칠 길을 빌리자고 하여, 조정의 상하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을 때, 옥천에서 상경, 지부상소로 대궐문 밖에서 3일간 일본사신을 목벨 것을 청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592년 4월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천에서 문인 이우(李瑀)·김경백(金敬伯)·전승업(全承業) 등과 의병 1,600여 명을 모아, 8월 1일 영규(靈圭)의 승군(僧軍)과 함께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그러나 충청도순찰사 윤국형(尹國馨)의 방해로 의병이 강제해산당하고 불과 700명의 남은 병력을 이끌고 금산으로 행진, 영규의 승군과 합진해서, 전라도로 진격하려던 고바야가와(小早川隆景)의 왜군과 8월 18일 전투를 벌인 끝에 중과부적으로 모두 전사하였다. 후세에 이를 숭모하여 금산전투라 일컬었다.
1604년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 1등으로 책록되고, 1734년(영조 10)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1883년(고종 20) 문묘에 배향되고, 옥천의 표충사(表忠祠), 배천의 문회서원(文會書院), 김포의 우저서원(牛渚書院), 금산의 성곡서원(星谷書院), 보은의 상현서원(象賢書院) 등에 제향되었으며, 1971년 금산의 순절지 칠백의총이 성역화되었다. 시호는 문열(文烈)이다.

서원은 울창한 숲을 배경으로 하여 김포평야가 바라보이는 언덕에 있다. 좌향은 북향에서 약간 북동쪽을 향하고 있다. 경내 건축물로는 사당·내삼문·강당·동재·서재·외삼문 등이 있고 사당 앞 오른쪽에는 조헌선생유허추모비(趙憲先生遺墟追慕碑)와 비각이 있다. 강당에는 여택당(麗澤堂)이라는 현판이 걸려 있으며 제향시 유림의 회합장소로 사용되고 있다.
1) 조헌선생유허추모비(趙憲先生遺墟追慕碑)-경기도유형문화재 제90호
(1979.09.03지정)
조선 선조 때의 문신이자 의병장인 조헌(1544∼1592) 선생의 추모비로, 그의 옛 집터에 자리하고 있다. 비는 네모난 받침돌 위에 비몸을 올린 형태이다. 비몸 윗부분의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하였고, 앞면에는 조헌 선생의 행적을 기록하였다. 인조 26년(1648)에 세운 비로, 비문은 이정구가 짓고, 김현성이 글씨를 썼다.
 
2)김포시내의 서원사무실에 있는 소장자료의 대부분은 청금록과 심원록 등이고,